외전 13화
“…예?”
대신관은 허망한 표정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 것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가 이내 닫아 버렸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대신관이 엄숙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 늙은이가 괜한 말을 했군요. 황후 폐하께서는 이미 바쁜 분이신 것을…….”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관은 무언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 저는 그런 이유에서 거절하는 게 아닙니다.”
“…….”
대신관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레티시아를 조용히 관찰할 뿐이었다.
“대신관님은 그동안 신전을 훌륭하게 이끌어 오셨지요. 그 자리를 대신하려면, 저 또한 대신관님의 의무를 그대로 이어받아야 할 겁니다.”
“얼마든지 바꾸셔도 됩니다.”
대신관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성녀님의 것. 그러니 원치 않는 관습 따위야, 그저 버리면 그만입니다.”
“…관습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레티시아는 조금 답답해졌다.
대신관이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신관들을 뽑고 교육하고 통제하고, 무엇보다도 지금 있는 기존의 신관들을 이끌어 나가는 일 또한 제가 해야 할 테니까요.”
“성녀님께서는 그 일들이, 기껍지 않으십니까?”
레티시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신관은 진심으로 의아해하고 있었다.
“기꺼울 리가 있겠어요?”
레티시아는 기가 막혀 대답했다.
“제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걸요. 제가 아무리 한때 사업을 했다 하더라도, 신전 운영은 전혀 다른 일이에요.”
“…그렇군요.”
대신관은 조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신전을 운영하는 것이 성녀님께는 보잘것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이 늙은이가 진작 했어야 하는데…….”
“보잘것없을 리가 없죠.”
레티시아는 단호하게 대신관의 말을 잘라 버렸다.
“본인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세요. 실은 제가 거절하는 이유도… 대신관님만큼 많은 일을, 훌륭히 해낼 자신이 없어서이니까요.”
사실 꽤나 달랐지만 레티시아는 상대를 조금 띄워 주기로 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조금의 겉치레 정도야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었다.
“성녀님…….”
그리고 정확히 먹혀들어 갔고.
‘…….’
언뜻 대신관을 바라본 레티시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신과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대신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레티시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대신관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만약, 평상시였더라면 레티시아는 대신관이 자신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일부러 느리게 움직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알았다.
대신관은 단순히 황실과의 알력 다툼이 아닌, 더욱 큰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제 레티시아는 그에 대한 호의를 품었다.
신뢰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대신관은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선 레티시아의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대신관을 이제 존경했다.
그가 살아온 삶을.
그리고 앞으로 이 신전을 지탱해 나갈 삶을.
“여기입니다.”
대신관은 한 좁은 통로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레티시아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신성력은 아니야.’
단지, 직감일 뿐이었다.
이 통로를 지나면…….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더는 예전처럼 신전에서 완전히 방관자는 될 수 없다는, 기시감.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레티시아는 억울해서라도 통로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잠시 후.
“……!”
레티시아의 두 눈이 크게 질려 떠졌다.
“대신관님, 이건……!”
“마음에 드십니까?”
대신관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마음에 든다기보단…….”
레티시아는 말을 얼버무렸다.
조금 전 본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성소들.
현재, 제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성소들이 레티시아의 눈앞에 찬란히 펼쳐졌다.
개중엔 이미 꽃이 활짝 만발하여 무르익은 성소도 있었다.
하지만 성소들의 이미지는 눈 깜박할 찰나에 사라지고, 작은 동굴 안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어떻게, 된 거죠?”
“…저도 모릅니다.”
“대신관님!”
레티시아는 목에 힘을 주었다.
대신관이 모른다면, 대체 누가 안다는 말인가.
“성녀님, 이건 진짜입니다. 이 동굴은 얼마 전 나타났는데… 각지의 성소들을 보여 주는 이유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레티시아는 대신관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게 이제야 그 사실을 알려 주시고요?”
퍽 의심스러웠다.
여태까지 레티시아와 미카엘은 새롭게 나타나는 성소를 찾기 위해 상당한 예산과 시간을 소요했다.
이제 이 동굴 덕에 그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으니, 레티시아의 힘은 급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대신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성녀님이 신전을 파괴할 분이 아니라는 보증이 필요했습니다.”
무척이나 당당한 목소리였다.
마치, 꼭 해야 하는 일을 한 사람처럼.
“아…….”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여태까지 대신관의 모든 이야기들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블러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셈이었지만, 딱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대신관의 입장에선, 레티시아에 대한 시험 하나 없이 이 동굴에 대한 정보를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별다른 거래 없이 순순히 알려 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레티시아의 생각을 읽은 듯,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성녀님은 여태까지 저를 방해꾼으로만 여겨 오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누구보다도 성녀님의 안위를 바랍니다. 성녀님이 신전의 유일한 희망이시니까요.”
레티시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관의 말은 단출했지만 그 진심이 그대로 레티시아에게 전달되었다.
동시에,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제 신전의 안위를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대신관은 그 어떤 멍에보다도 무서운 마음의 짐을 자신에게 지웠다고.
레티시아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
신전으로부터 돌아와 황후 궁에 발을 들인 순간.
레티시아는 바싹 긴장했다. 궁 전체가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
레티시아는 곧 그 이유를 알아챘다. 성 전체에선,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모두가 죽어 버린 것처럼.
레티시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은 까마득한 옛날로만 느껴지는 여러 해 전, 불타는 꽃밭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연이어 제국에는 피바람이 일었고.
‘아니, 아닐 거야.’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 리가 없다.
미카엘의 황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건했으며 여론도 좋아서 반란이 일어날 여지라고는 없었다.
즉, 미카엘이 그때 그 당시의 황제처럼 당할 일은…….
‘그냥 과민한 거야, 내가.’
하지만 레티시아는 경계심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기사들을 대동해서 들어올 생각이었다.
“레티시아.”
“…….”
맥이 탁 풀렸다.
미카엘이었다.
레티시아는 등을 돌려 미카엘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미카엘?”
“…….”
미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티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죽였어요, 제이나를?”
“…무슨 소리야.”
레티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이지 말아요, 그 아이. 아직 쓸 데가 있으니까.”
“대체 넌 나를 뭐로 보는 건지…….”
미카엘은 투덜거렸지만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오늘 힘든 하루를 보냈을 것 같길래 쉬게 해 주고 싶었을 분이야. 그래서 사용인들을 모두 밖으로 보냈지.”
“…뭐라고요?”
레티시아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황후 궁 전체에서 사용인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보냈다니.
그럼, 대체 자질구레한 일들은 다 누가 한다는 말인가.
“걱정 마. 어지간한 일은 내가 다 할 수 있으니까.”
“…불은 땔 줄 아세요?”
“레티시아.”
미카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바보?”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목에 손을 감았다.
사용인들을 모조리 내보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생각해 보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기쁜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미카엘에게 알려 주고 싶었으니까.
“미카엘, 기쁜 소식이 있어요.”
“…나도 있는데.”
“미카엘부터 말해요.”
“아니, 레티시아부터.”
레티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 보니, 사용인을 물린 이유는 미카엘이 말하고 싶은 무언가에 있는 듯했다.
제법 궁금했지만, 레티시아는 먼저 자신부터 말하기로 했다.
“다른 성소들의 위치를 알아냈어요. 오늘 신전에 갔는데…….”
설명은 길었다.
레티시아는 자신처럼 미카엘이 대신관의 행동을 미심쩍게 여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모든 정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미카엘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안 기뻐요?”
“기쁜데?”
“그럼 왜 그렇게 죽상인데요?”
“그냥…….”
미카엘은 말꼬리를 흐리다가, 이내 날카로워진 레티시아의 눈초리에 굴복했다.
“그대가 너무 바빠질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