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입꼬리가 자꾸만 비실비실 올라가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그런 자신이 조금 민망해져 헛기침을 했다.
‘이 정도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나도 많이 약해졌구나.’
예전이었다면 자신은 미카엘에게 섭섭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본인은 그렇게나 바쁘면서, 레티시아가 바쁜 건 싫으냐고.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알았다.
그런 미카엘의 생각들은 전부, 자신이라도 편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걸.
‘말을 한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만약 예전처럼 자신이 미카엘의 생각을 추측만 해야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많이는 안 바빠지도록, 노력해 볼게요.”
미카엘은 대답 대신, 레티시아를 끌어안았다.
온기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지금만큼은 레티시아는 아무 말 없이도 미카엘의 마음을 예전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미카엘은,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
그날 이후, 레티시아는 그 이전보다 수 배는 바빠졌다.
이제는 제법 협조적인 신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들도 한계가 있었다.
성녀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레티시아는 즐거웠다.
성소를 하나씩 발견하여, 그것들을 깨울 때마다 힘이 커져 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그녀에게 적대적이기만 했던, 그리고 그녀 역시 적대적이었떤 신전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도 좋은 점 중 하나였다.
레티시아는 그동안 자신이 제법 외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친구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기실, 친구라면 이미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여럿 되지 않는가.
레티시아는 소속감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였지만 미카엘부터가 황실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없었고, 하나뿐인 사업은 손을 거의 뗐으며, 황후궁의 하녀들은 반절이 스파이였다.
성녀이긴 했으나, 신을 믿지 않는 성녀였고.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제 신관들과 교류하여, 그들의 동료가 되었다.
심지어 어느 정도까지는 신을 믿을 생각이 들 정도였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이렇게나 많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곤 했다. 만약 단 1년 전의 자신에게, 누군가가 그녀에게 황후가 될 것이며 성녀가 되어 신관들과 어울릴 것이라 말하였다면 순전히 거짓말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성녀님, 다음에는 저희도 데리고 가 주셔요.”
…절대, 이런 말을 들을 사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레티시아는 미소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너무 위험해. 신성력이 너무 강해서…….”
“괜찮아요.”
얼마 전 겨우 수습 신관에서 정식 신관이 되었다는 티레니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녀님이 계시잖아요!”
“나도 지켜 줄 수 없는 힘이야.”
레티시아는 고개를 절래절레 흔들었다.
단순한 겁을 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새로운 성소들은 갈수록 강력해져서, 레티시아마저도 휩쓸릴 뻔한 적도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미카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다는 점이었다.
레티시아는 대체 왜 그런지 무척 궁금했지만, 끝끝내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미카엘에게는 신성력이 없었다. 그건 신전에서도 확인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성력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다.
레티시아는 그녀가 미카엘을 살린 일과 무언가 관련이 있지 않은가 추측했지만, 그것도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사실 레티시아는 전혀 관계가 없기를 바랐다.
관계가 있다면 그녀는 앞으로 사람을 살릴 때마다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럼 입구까지만 같이 가면 안 돼요? 제가 시중 다 들어드릴게요! 이래보여도 하녀 출신이라 할 건 다 해요.”
“미안하지만 나도 하녀 출신이라서. 할 건 다 하거든.”
“…성녀님은 못하는 것도 없으시네요.”
티레니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 약한 편이었다.
특히, 자기보다 어리면 더더욱.
아마도 어린 미카엘을 돌보던 시절의 관성인 듯했다.
결국, 레티시아는 자신을 따라와도 된다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조심해야 해. 알겠지?”
“네!”
당연히 미카엘은 티레니아의 동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파이일 수도 있어.”
“아닐 거예요.”
레티시아는 이번만큼은 확신했다.
티레니아는 성소에 순수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스파이라 할 지라도 기껏해야 신전 측일 것.
걱정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걱정이 되는 쪽이 있다면…….
‘그건 미카엘이지.’
레티시아의 불안한 예감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다음날 아침.
“황, 황제 폐하께서 같이 가시나요?”
티레니아가 겁에 질려 물었다.
“…보통은 아닌데.”
실제로 레티시아는 최근 두 가지 성소는 미카엘 없이, 혼자서 발견했다. 미카엘이 새롭게 나타난 성소들마다 동행하기에는 너무 바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시간이 좀 나서.”
미카엘은 티레니아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미카엘은 티레니아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제이나에다가 티레니아까지. 내 주변 사람들이라면 다 위험하게만 보이는 건지…….’
그녀 역시 미카엘과 10년을 황궁에서 버텼다.
절대 순진한 황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미카엘이 겪어온 세계가 더 참담했기 때문에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했지만, 가끔 그가 의심병 환자처럼 굴 때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돌아가, 티레니아.”
…특히 결말이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성녀님!”
“황후 폐하겠지.”
미카엘이 비아냥거리면서 티레니아의 호칭을 바로잡았다.
“마음대로 부르게 놔둬요. 어차피 둘 다 저인걸요.”
“레티시아, 너는 황후야. 성녀이기 이전에.”
“하지만 티레니아는 신관이죠. 저를 성녀라고 부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미카엘은 여전히 티레니아가 아닌, 레티시아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티레니아…라고 했나.”
“예, 폐하!”
“돌아가라.”
“저… 저는…….”
레티시아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라고 했지, 티레니아.”
“…….”
티레니아는 무척 의기소침한 얼굴이었으나 결국엔 미카엘과 레티시아의 말대로 등을 돌려 떠날 수밖에 없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저렇게 뻔히 보이는 첩자가 옆에 접근하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기껏해야 신전의 첩자일 뿐이에요. 사실, 티레니아 입장에서는 본인은 첩자도 아니겠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게 바로 첩자라는 거야, 레티시아.”
“…….”
미카엘은 입을 굳게 다문 레티시아를 들여보았다.
“화났어?”
“…났다고 하면, 어쩔 건데요?”
“풀어야지.”
“풀 생각이 없다면요?”
“풀게 될 거야.”
그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에, 실소가 터졌다.
레티시아는 팔짱을 껴고 미카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요, 풀어 봐요.”
“첫째, 앞으론 신전에 갈 필요가 없어.”
“…뭐라고요?”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되물음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둘째, 성소의 위치는 지도로 만들어 두었어.”
“지도로 안 만든 이유가 있잖아요!”
레티시아는 소리쳤다.
지도로 만들면 당연히 유출될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기억에 의존했는데, 그걸 또 지도로 만들었다니.
“셋째, 앞으로 성소들엔 신전이 생길 거야.”
“…….”
레티시아는 정말로 화가 풀렸다.
기분이 좋아져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기 때문이었다.
대체 미카엘이 어떻게 그런 일들을 레티시아 몰래 벌일 수 있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레티시아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네 생각.”
미카엘은 당당하게 받아쳤다.
그는 레티시아의 양 팔을 부드럽게 붙잡고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칫하면, 그의 아름다운 눈에 홀려 버릴 것 같아서.
“레티시아, 대신관의 말이 맞아.”
“…….”
“그대가 신전의 주인이 되어야 해. 대신관이 아니라.”
“…내가 바쁜 건, 싫다면서요.”
“싫지.”
미카엘이 수긍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너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상태야. 아주 최악의 상황이지.”
“…….”
“생각해 봐. 티레니아가 왜 그렇게 너를 좋아할까? 왜 그렇게 성소로 가고 싶어 할까?”
“…그야, 제가 신전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맞는 말이야.”
미카엘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마도, 그의 말을 들으면 자신은 다시는 예전처럼 신관들과 어울리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은 네게 다 시키고, 그 성과는 자신들이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야, 레티시아.”
미카엘은 조금 전처럼 고집 센 어조로 그녀를 설득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그리고 슬프게 사실을 알려 줄 뿐이었다.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미카엘의 말이 맞았다.
아주 잠시 동안, 허상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