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제가 바보였네요.”
레티시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을…….”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은 아니죠. 멍청했을 뿐.”
레티시아는 자책했다.
탓할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신관들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택했을 뿐이니.
만약 레티시아가 남을 탓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면 그녀는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레티시아는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했다.
바보처럼.
“레티시아.”
미카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네가 멍청하다면, 나는 아마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천지겠지.”
“…실제로 그랬잖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었잖아.”
“그러네요.”
레티시아는 결국 미소 짓고 말았다.
정말이지 미카엘은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는 데 도가 터 있었다.
“그리고 내게 생각이 있어.”
“무슨…….”
“신전을 네 것으로 만드는 거야.”
“…….”
“굳이 대신관이 될 필요도 없어. 대신관이라는 자리를 없애기만 한다면… 자연히 그의 지위가 네게 따라오게 되겠지.”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신관이 그걸 용납할까요?”
“애초에, 네게 대신관의 자리를 권한 건 그자가 아니던가?”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대신관은 모든 걸 포기하는 방법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든, 자신은 그 승부수에 그대로 걸려들었고.
“그럼 역으로 이용해야지.”
미카엘이 싸늘하게 말했다.
“마음만 같아선 제국의 황후를 능멸한 죄로…….”
그는 말을 굳이 잇지 않았다.
섬뜩한 손짓 하나만으로도 의사 전달이 가능했으니까. 레티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작은 일은 아니지.”
“네. 작은 일은 아니에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동의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일 만한 일도 아니죠. 무엇보다도 넘어간 제게 가장 큰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살포시 미소지었다.
“어쨌든, 해결 가능하잖아요? 그것도 바로 미카엘 덕분에.”
“…….”
미카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레티시아는 그의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미카엘의 목에 팔을 감았다. 미카엘의 몸이 흥분으로 단단해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레티시아는 그를 향해 몸무게를 실었다.
“걷기 싫은데…….”
미카엘은 그녀의 말을 바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곧장 레티시아를 두 팔로 안아 들었으니까.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단단한 가슴팍에 의지하면서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신관들을 상대하는 건 내일 할 일이다.
지금은, 그저 미카엘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
“잘 생각하셨습니다.”
의외로, 대신관의 반응은 담담했다.
레티시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화가 나지 않으세요? 제가 대신관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아예 물러나 달라는 건데…….”
“왜 화가 나겠습니까.”
대신관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성녀님께서는 둘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두셨을 뿐인데.”
“…….”
레티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렇게 상대가 아무런 사심 없이 너그러워질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아마, 그동안 사심 그득한 이들만 보아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레티시아와, 미카엘마저도.
사실 미카엘만큼 사심 가득한 사람도 없을 터이고.
레티시아 역시 그랬다.
그래서 눈앞의 초연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관은…….
그저, 감히 레티시아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처럼 보였다.
“죄책감이 드시는군요.”
레티시아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긍정하지도 않았지만 침묵이 충분한 답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자신의 속마음을 어떻게든 티를 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대신관처럼 통찰력 있는 노인에게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황후 폐하는 그런 분이니까요.”
신전에서는 그 누구도 그녀를 ‘황후 폐하’로 부르지 않았기에, 레티시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제가 멍청하게 굴었다는 건 인정하겠어요.”
인정은 생각보다 쉬웠다.
말들은 매끄럽게 그녀의 입에서 빠져나와 두 가지 의미를 만들었다.
대신관이 그녀를 함정에 빠트렸다는 의미와, 그리고 그녀가 함정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는 걸 인정하는 의미.
“멍청하지 않았습니다.”
대신관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를 달래려고 하다니.’
레티시아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소 예상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황후 폐하께선 그저… 이 신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 뿐입니다.”
“네?”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물론, 그녀는 대신관의 말에 완전히 동의했다.
레티시아만큼 신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신을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대신관의 말은, 어딘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저희는 늙었습니다. 그리고 능력도 없죠. 그런데 어떻게 여태까지 신전을 부지해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통이니까요.”
레티시아는 전통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수많은 제국민들이 전통을 중요시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전에 공물을 바쳤으며 기쁜 일과 슬픈 일이 일어날 때마다 기도를 했다.
신앙이라기보단 관성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신전이 지속되기엔 충분한 관심인 셈이다.
“황후 폐하.”
대신관이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씁쓸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건 전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잊혀 가는 관성이죠.”
대신관은 신전의 치부를 콕 찔렀기에, 레티시아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저희가 여태까지 신전을 유지해 온 비결은 다른 데 있습니다.”
“뭐죠?”
대신관이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어떻게 보면, 자포자기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온갖 더러운 짓입니다. 사기, 속임수, 협박, 소문…….”
“……!”
레티시아의 몸이 뻣뻣히 굳었다.
사실,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저중 미카엘이 안 해 본 것 역시 없었으니까.
그리고 레티시아 역시, 그의 비서로서 상당 부분에 관여했고.
레티시아가 놀란 이유는 대신관이 그들 자신의 치부를 털어놓았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모조리.
“지금이야 겨우 지탱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요? 제가 죽는다면… 신전이 일 년이라도 더 갈 것이라고 보십니까?”
“…….”
“황후 폐하,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신전이 계속해서 존재하려면 황후 폐하가 필요합니다. 아니, 황후 폐하께서 신전을 맡아 주셔야 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이제야 대신관의 진정한 의중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거듭 신전을 맡아 달라 청하는 이유도.
대신관은 이제 지쳐 버린 것이다.
손을 더럽히면서, 신전을 지탱하는 것에.
“…확실히 제가 신전을 맡는다면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유지해야 할 필요는 없겠죠.”
레티시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신전은 그녀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뒤섞인 카오스 같은 상태라, 원하는 것을 온전히 추려내려면 심열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황후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신전은 절대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할 거예요. 기존의 관습들도 모조리 사라지겠죠. 사실상, 황실의 부속 기관이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대신관의 주름진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바로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레티시아는 한때, 자신이 이 노인을 존경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조금은 친애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지금, 레티시아에게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신전이라는 형태만 남아있으면, 어떤 식이든 상관이 없으신 거군요.”
“예.”
대신관의 대답은 명료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유지했다간, 끝이 뻔하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황후 폐하의 새로운 신전이 기대가 되기까지 합니다.”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굳이 답을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은 대신관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사실이 기분이 나쁘다고, 가장 옳은 길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
한 달이 흘렀다.
레티시아의 행보는 성공적이었다.
모두가 성녀의 신전 재건에 열광적이었고, 각지에서 신도들과 기부금이 몰려들었다.
물론, 신전이 이득만 취한 건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기존 신전의 악습과 구태의연한 신관들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신관들까지 모조리 쫓아내니 몇 사람 남지 않았는데, 레티시아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새로이 신관이 되고 싶어하는 지원자들이 그만큼 더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어느 날.
주기적으로 레티시아를 진찰하던 황실 어의가 당황한 기색을 띠고 몇 번이나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단단히 결심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경하드립니다. 회임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