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화
“…….”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의사는 그런 그녀의 안색을 열심히 살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레티시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달거리가 늦어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달거리는 원체 불규칙한 편이었으므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전혀.”
“그래도 초기에 알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워낙 바쁘시니까요.”
의사는 온유하게 표현했지만, 실은 ‘무리하고 있다’라는 뜻이라는 건 레티시아도 알고 그도 알았다.
“…조심하겠다.”
“정말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의사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졌다.
“저는 신성력에 대해 잘 모릅니다만… 만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힘은 나날히 강해지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걱정이라면…….
아직은 존재가 믿어지지 않는 이 아이 역시, 신성력을 타고났을 경우에 대한 걱정 정도일까.
레티시아는 성녀가 이 제국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결코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무거운 짐이라는 것도.
그리고 성녀라는 이름의 위치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뼈저린 현실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폐하께선 너무나 건강하십니다. 하지만 임신이라는 건 알 수가 없어서…….”
레티시아는 의사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임신과 출산이 여인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거나, 그녀는 괜찮아도 태아에겐 좋지 않은 음식과 환경이 있으니 피해야 한다거나.
그 모든 건 지금 당장은 알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오직 미카엘에 대해서만 흘러갔다.
아이를 전혀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미카엘.
그래서 레티시아와 갈등까지 빚었던 미카엘은, 이 새로운 소식에 어떻게 반응할까?
물론 미카엘은 좋은 배우이니만큼 레티시아가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응은 쉽게 꾸며 낼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가 알고 싶은 건 꾸며낸 연기가 아닌 그의 진정한 진심이었다.
매도 알고 맞는 게 낫다고 하지 않는가.
그의 반응에 따라선, 레티시아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레티시아는 마침내 설명을 마친 의사가 좋은 약재를 챙겨 오겠다고 자리를 떠나기 직전, 그를 붙잡았다.
“…약재는 필요없다. 다른 조치도 필요없어.”
“황후 폐하!”
“나는 괜찮다.”
레티시아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이 일을 아는 건 황제 폐하와 나, 그리고 너로 충분하다.”
“…….”
의사는 무척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는 그에게 이 일이 새어 나갈 경우 황궁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협박까지 한 다음에야 의사를 놓아주었다.
잠시 후.
방 안에 혼자 있게 된 레티시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현실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레티시아는 자신의 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안엔 자신과 미카엘의 아기가 있었다.
그토록 그녀가 바라 왔던 그들의 아이가.
레티시아는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미카엘이 먹던 피임약도 멀리 치워 버리고,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리고 그동안 날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열심히 해 댔으니…….
이런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예상했다고 하면 그것 역시 거짓말이었다.
요즘 레티시아는 너무나 바빴으니까. 신전과 관련된 문제에 몰두하느라 도저히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레티시아는 직감했다.
자신이 지나치게 몰두해 있었다는 사실을.
예전의 자신은 아무리 바빠도 그 일 자체에 자가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푹 빠져 버리지는 않았다.
당시의 레티시아에게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언젠가 황궁에서 벗어나겠다는 목표.
우습게도, 미카엘에게서 떠나겠다는 그 목표가 레티시아가 지나치게 황실에 몰입하는 걸 막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게 달라졌다.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곁에 있기 위해 기꺼이 황후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결국 모든 일들은 황실의 권력을 굳건히 하겠다는 미명하에 일어나고, 레티시아 역시 제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찾아온 이 작은 행운이, 레티시아를 본디의 그녀로 돌려놓아 주었고.
레티시아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벌써부터 이 작은 생명에 대한 고마움을 품게 되었다.
그녀를 그녀 자신으로 있게 해 준, 작은 아이에게.
***
“브라스 후작의 영지는 몰수하되 작위는 그대로 두겠다.”
미카엘은 자신에 대한 암살을 모의한 후작에 대한 처벌을 성의 없이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과 달리, 이제 자신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레티시아가 그런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의 생각처럼 미카엘의 본질이 달라져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직위만 있고 영지는 없는 후작.
그리고 그에 대한 반역을 저질렀다는 걸 전 사교계가 아는 후작.
이제 그들의 상황은 작위까지 몰수당한 것보다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황제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을 아니 도와줄 친척 하나 없는 상황에서, 작위에 대한 의무와 위신을 유지해야 하는 동시에 영지가 주는 모든 수익을 잃어버린 후작가의 말로는 뻔했다.
차라리 모든 걸 빼앗겼다면 모를까, 작위라는 희망이 남아 있기에 더더욱 처절하게 발버둥 칠 것이다.
하지만 레티시아에 대한 보고를 들은 순간, 그 모든 것들은 미카엘에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황후 폐하를 진찰한 어의의 동태가 이상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라.”
“몇 번이고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더군요. 그러면서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는 게, 뭔가 큰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
미카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할까요?”
“가만히 있어라.”
미카엘은 당장이라도 의사를 잡아 올 기세인 심복들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내가 직접 알아낼 터이니.”
미카엘은 의사를 찾지 않았다.
그는 곧장 레티시아에게로 향했다.
그의 생각이 맞다면, 레티시아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며 의사를 입단속했을 터.
레티시아에게 직접 묻는 게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었다.
처음 레티시아의 방에 발을 들였을 때 미카엘은 조금 화가 난 상태였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모습을 본 순간, 그의 치기 어린 분노는 눈처럼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배를 바라보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그를 향해 다가왔다.
따뜻한 금안이 그를 주시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처럼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는 눈이었다.
“…의사가 다녀갔다고 들었다.”
레티시아는 전혀 놀라는 투가 아니었다.
“벌써 들었어요?”
“그래.”
미카엘은 천천히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이미 알고 있지 않아요?”
레티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봐도,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인데.”
“그자에게서 직접 듣지는 못했어. 그냥 추측했을 뿐.”
“뭐라고… 추측했는데요?”
“…….”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티시아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동시에 기쁨도.
하지만 그런 밝은 감정뿐만이 아니었다.
레티시아에게서는 걱정과 염려, 그리고 불안도 엿보였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이를 가졌군.”
“정확하네요.”
레티시아는 조금 맥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숨기는 게, 의미가 없어…….”
“레티시아.”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익숙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우리 아이야.”
“알아요.”
“당연히 숨기지 말아야지.”
“…그냥, 생각해 본 거예요. 미카엘은 이런 일이 알려지는 걸 싫어하니까, 한 명이라도 줄이고 싶었죠.”
“날 위해서였어?”
“…….”
레티시아는 잠시 망설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은 그 망설임에서 한 가지 달갑지 않은 사실을 읽어냈다.
레티시아는 아직도 피임약을 한때 미카엘이 복용했다는 사실에 제법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레티시아, 그때 일은……!”
“신경 안 써요.”
레티시아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신경을 무척 쓰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번만큼은 레티시아를 안심시키는 데 성공해야 할 때였다.
“레티시아.”
그는 천천히 운을 떼었다.
“나는 당신이 아이를 가져서… 정말로 기뻐.”
하지만 미카엘은 몰랐다.
그의 무의식에는 아직도 아이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레티시아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