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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7화 (136/150)

외전 17화

“우우욱……!”

“황후 폐하!”

친절하기도 해라.

레티시아는 시녀가 득달같이 건네준 양동이에다가 오늘 얼마 먹지도 못한 빵 몇 조각을 다 토해내었다.

“고, 고마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용인들이 눈치껏 자리를 피해준 모양이었다.

‘현명하네.’

레티시아는 멍하니 생각했다.

얼마 전 자리를 늦게 피한 하인 한 명이 미카엘의 분노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걸 눈앞에서 보고만 있지 않았는가.

물론 레티시아가 잠깐의 언질만 주었다면 불쌍한 하인은 풀려났을 것이다.

미카엘은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레티시아가 하인의 선처를 호소했다고 질투심에 미쳐 날뛸 만큼 철이 없던 시절도 이제는 지났고.

하지만 레티시아는 웬만하면 미카엘과의 직접적인 대립은 피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다. 그의 심정 역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미카엘을 위한 배려보다는, 그녀 자신을 위한 결정에 가까웠다.

레티시아가 느끼기로는, 미카엘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수틀리면 모든 걸 때려치우고 잠적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하지만, 레티시아의 모든 배려와 인내심은 끔찍한 입덧 아래 증발되고 말았다.

잠시 후.

레티시아가 조금 진정된 듯하자 시녀가 작은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 오렌지 셔벗이에요. 좀 드셔보세요.”

레티시아는 도리질을 쳤다.

오렌지건 자몽이건 도저히 먹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체 왜 임산부라면 신 건 다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원망은 이내 한탄으로 변했다.

이렇게 음식을 넘기는 것조차 힘든 줄 알았다면, 임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을 텐데!

“차라리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좀 나았을 것 같은데…….”

레티시아는 멍하니 읊조렸다.

황제, 황후라는 권력자의 자리를 뒀다 어디 쓰겠는가.

하지만, 지금 그녀는 맹물을 제외한 그 어떤 음식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영양 부족을 걱정한 의사들이 물에 설탕 등을 타는 방법으로 레티시아의 영양을 보충하려고 했지만, 원망스러운 몸은 그 모든 시도들을 거부하고 게워냈다.

당연히 레티시아를 전담하고 있는 의사들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정작 레티시아가 그 누구보다도 태연하다는 게, 코미디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은 무려 성녀인데!

하지만 아무리 성녀의 신성력이라 한들 입덧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레티시아를 볼 때마다, 미카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레티시아는 그 한숨에 죄책감이 다분히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모른 척을 해 주었다.

“황후 폐하, 입맛이 없어도 드셔야 해요.”

레티시아는 물끄러미 시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너무 피곤하구나.”

“조금 드실 수 있을 것 같은 음식도 없나요?”

“으음…….”

레티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이렇게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간, 태아의 성장에 지장이 갈 지도 몰랐다.

신성력은 후천적인 병은 고칠 수 있었으나 선천적인 질환은 고칠 수 없었으므로 먹기는 먹어야 했다.

“아무것도 안 들어간, 묽은 스프……?”

레티시아는 자신없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못 먹을 수도 있고.”

“만들어오겠습니다.”

시녀는 이내 레티시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 자신은 마치 사육당하는 동물이 된 듯했다.

모두가 자신에게 하나라도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그때였다.

“괜찮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소스라쳤다.

“미카엘!”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미카엘은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니까 비밀 통로로 오지 마라고, 제가 몇 번이나 얘기를 해요?”

“미안.”

미카엘은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하지만 여길 통해 오는 게 제일 빠른 걸. 레티시아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서…….”

“…네.”

레티시아는 기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밝아진 목소리 때문에 들키고 말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그냥.”

미카엘이 미소지었다.

“보고 싶어서.”

“…다 알아요. 용건이 있잖아요.”

미카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당하겠군.”

레티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죠?”

“정말인데. 정말로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그게 전부야.”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곁에 마주 앉았다.

레티시아는 도저히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미카엘은 성실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황제였다.

그런데 일과를 모조리 팽개치고 대낮부터 자신을 보러 왔다니.

그것도 ‘보고 싶어서’ 같은 이유로.

개가 다 웃을 소리였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화 안 낼 테니까, 지금 말해요.”

미카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라니까.”

레티시아는 몇 번이나 미카엘에게 거듭 묻고 난 다음에야 그가 정말로 자신을 보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간신히 믿을 수 있었다.

“…해야 할 일, 많지 않아요?”

“글쎄.”

미카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느 전직 비서님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내 할 일은 다 하고 왔다고 해 두지.”

“…….”

레티시아는 눈을 흘겼다.

미카엘은 이런 순간까지도 그녀를 놀리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뭐 어떠랴.

그녀를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일을 끝내고 찾아온 남편이다.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레티시아는 어느덧 자신의 눈이 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아암.”

그녀가 졸음을 참기 위해 일부러 더 크게 하품하자, 몸이 허공으로 기우뚱 들어 올려졌다.

당연히, 미카엘이었다.

그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레티시아를 침대로 옮겨주었다.

“자.”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손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토닥이는 걸 느끼면서, 잠으로 까무룩 빠져들었다.

***

미카엘은 곤히 잠든 레티시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레티시아는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극도로 말라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어린 소녀가 떠오를 정도로.

당시 레티시아는 미카엘에게 한 줄기 빛으로만 느껴졌지만, 지금 와서 객관적으로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저 안쓰러운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하기야, 나도 별반 다를 건 없었나.’

미카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자기연민에 빠질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면 죽었어야 할 두 아이가 모여 어찌어찌 제국의 황제와 황후가 되었다.

가히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왜, 가장 비천한 평민도 겪는 아이의 탄생은 이렇게 두렵기만 하는 걸까.

미카엘은 자신을 그만 속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았다.

너무나 잘.

암살 위협이나, 레티시아의 건강 같은 이젠 모든 대비가 되어 있는 문제들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가, 도저히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카엘은 레티시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레티시아의 가족 역시 쓰레기 그 자체였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꼿꼿하게 자란 레티시아를 보면 분명 아이 역시 잘 키워낼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선…….

솔직히, 미카엘은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

‘배운 게 있어야지.’

미카엘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레티시아는 나쁜 부모의 전형이라도 겪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 어떤 부모도 겪은 적이 없었다. 아니, 가족 자체를 겪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키운다는 말인가.

사실 바로 그 점이 미카엘이 피임약을 먹어오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었다.

평생토록 해결이 불가능할 테니까.

옹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갓난아기 시절에 생겨나버린 거대한 크라바스를, 어떻게 지금 와서 메운다는 말인가?

미카엘의 쓰디쓴 한숨이 침실 안을 가득 메웠다.

사실 그는 레티시아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하지만 입덧 때문에 빵 한 조각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슨 염치로 그의 치부를 털어놓는다는 말인가.

그가 그저 레티시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때였다.

“……미카엘.”

레티시아가 눈을 떠서, 잠에 반쯤 취한 채 웅얼거렸다.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슨, 필요한 게 있어?”

“……꿈을 꿨어요.”

미카엘은 바싹 긴장했다.

레티시아는 예언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신관들이 예지몽을 꾸는 건 없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우리…… 아이가요.”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미카엘은 긴장을 풀고 레티시아를 향해 억지로 미소지었다.

“진짜, 진짜 귀여웠어요.”

“그랬어?”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사랑스러웠다고요. 그리고, 미카엘도 나왔는데…… 진짜, 좋은 아빠였어요.”

갑자기, 목이 꽉 멨다.

미카엘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레티시아의 이어진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런데…… 저는 좋은 엄마가 아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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