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화
“엄마!”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꿈이구나.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은 금색 고수머리에 반짝이는 금안이었다.
레티시아는 내심 아쉬웠다.
‘눈도 미카엘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미카엘의 눈은 정말 독보적으로 아름다웠으니까.
“---, 무슨 일이니?”
레티시아의 입에서 나온 소년의 이름은 무척 이질적으로 들렸다.
“이거 보세요.”
소년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만 한 꽃잎을 들어 올렸다.
새하얀 목련이었다.
“예쁘네.”
레티시아의 칭찬에 소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엄마처럼 예뻐요.”
레티시아는 칭찬을 해 주기 위해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칭찬이 아닌 질책이었다.
“알겠으니 어서 돌아가거라. 내 기억에 따르면 오늘 검술 수업이 있었을 텐데…….”
“죄, 죄송해요.”
소년은 의기소침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돌로레스 경은 너무… 무서워서요.”
“황태자가 기사를 무서워해서 되겠어?”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기에 레티시아는 알았다. 자신이 무척 화가 난 상태라는 걸.
“몇 번이나 말했어?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검술을 제대로 연마해야 한다고.”
“…….”
“그런데 돌로레스 경에게서 들으니, 넌 아직 제대로 검을 쥐지도 못한다는구나.”
“…죄, 죄송해요.”
“---.”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 그으…….”
“말은 중요하지 않아. 오직 행동만이 진심을 알려 주지.”
레티시아는 자신의 아들을 완전히 울리고 난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여전히, 짜증이 그녀를 지배하는 중이었다.
레티시아는 아직도 그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는 듯한 아들을 따끔하게 가르쳐 주기로 했다.
“사람을 불러야겠다. 네 스스로는 갈 생각이 없는 듯하니, 돌로레스 경에게 너를 데려갈 사람을.”
“…엄마!”
소년은 울부짖었지만, 레티시아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저 나이쯤 되면, 이제 남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충분히 알 나이였다.
그런데도 아직 이렇게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다니.
여태까지 키우고 재운 보람이 하나도 없는 아이였다.
“레티시아, ---?”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미카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요.”
레티시아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돌아가 주시죠, 황제 폐하?”
“그러지 말고.”
미카엘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
“아빠……!”
소년은 팔을 위로 올린 채 동동거렸다. 안아 달라는 무언의 시위가 분명했다.
미카엘은 웃으며 소년을 품에 안아 올렸다.
“그래, 이번엔 무엇이 문젤까?”
“…저는 검술이 싫어요.”
“그럴 수 있지.”
미카엘이 천천히 대답했다.
“하지만, 검술이 싫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왤까?”
“…우리 아들은 그냥 검술이 배우기 싫은 거예요, 미카엘.”
레티시아는 정말로 자신의 아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에 자신이 그와 같은 기회가 생겼다면 너무나 기뻐하면서 검술을 배웠을 것이다.
심지어 소년이 거부하는 교육은 검술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종류의 무술 훈련을 거부했기에, 레티시아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러다가 암살자라도 홀로 상대해야 할 때가 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레티시아는 이제 신성력으로 웬만한 공격들은 방어할 수 있었다.
반면 아들은 전혀 그녀의 신성력을 타고나지 못했고.
출산 당시에는 그 사실이 기뻤지만, 지금으로선 신성력이라도 있어야 했던 것 같다며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정말로 그럴까?”
미카엘은 아들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끼운 채 이리저리 흔들었다.
소년은 꺄르르 웃었다.
“정말? 정말로 별로 이유가 없이 싫은 거야?”
“아, 아니에요!”
도리질을 치는 아들의 입가에는 아직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럼 이유를 들어 볼 수 있겠지.”
“돌로레스 경은, 자꾸만 저를 때려요. 그래서 싫어요.”
“뭐라고?”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레티시아의 반응에 조금 겁을 먹은 듯했지만, 미카엘이 안심시켜 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자 용기를 얻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검을 잘못 쥐거나, 잘못 휘두르면… 검집으로 때려요. 그래서 싫어요.”
“…….”
레티시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돌로레스에게 검술 훈련만 맡긴 게 아니었다.
돌로레스 경은 황태자의 모든 무술, 체력적 훈련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아이를 때렸다면…….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자괴감이 깊숙이 밀려들어 왔다.
그동안 자신은 아이의 이야기 한 번 제대로 안 들어보고 대체 무얼 했다는 말인가.
여태까지 돌로레스 경에게 모든 걸 맡긴 채, 당연히 훈련을 받기 싫어하는 아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내 왔다.
그런데 그런 아이의 문제를 평소엔 황궁에 잘 있지도 않는 미카엘이 단숨에 해결해 버렸다.
눈물이 느껴졌다.
소년이 그녀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소년의, 마티아스의 따듯한 손이 그녀의 눈가를 만졌다.
“울지 마세요.”
“…….”
레티시아가 미안하다고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순간, 그녀는 꿈이 아닌 줄 알았다.
여전히 눈앞에 미카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토기와 불유쾌감이 찾아왔고, 레티시아는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깨어났다.
“…미카엘.”
미카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슨, 필요한 게 있어?”
레티시아는 잠시 망설였다. 미카엘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만약, 평상시의 레티시아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괜한 걱정을 안겨 줄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왜인지 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직감은 썩 잘 맞는 편이었고.
“…꿈을 꿨어요. 우리… 아이가요.”
레티시아는 발음을 똑바로 하려고 애썼지만 말들은 잇새로 흘러가 버렸다.
“진짜, 진짜 귀여웠어요.”
“그랬어?”
“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사랑스러웠다고요. 그리고, 미카엘도 나왔는데… 진짜, 좋은 아빠였어요.”
갑자기, 목이 꽉 멨다.
꿈속에서 자신이 아이에게 했던 폭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꿈이 끝나 갈 무렵에야 이름도 간신히 떠올린, 마티아스에게 했던 말들이……!
“그런데… 저는 좋은 엄마가 아니더라고요.”
레티시아는 고해성사를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두려워요.”
“그냥, 꿈일 뿐이야.”
미카엘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전혀 신경 쓸 게 없어.”
“전… 예지몽이라고 생각해요.”
레티시아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 순간, 레티시아는 자신이 진실을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예지력은 없지만, 어쩌면 이 아이에게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미인 자신에게 미래의 모습을 보내 주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냥 꿈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 꿈을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경고로.
“어쨌든 미카엘은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다 보고 왔으니까. 엄청 좋은 아빠던데? 부러울 정도였어요.”
“…….”
미카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그의 눈이 딱딱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미카엘.”
“…….”
“내 말이… 안 믿어지는 거예요?”
미카엘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정말 꿈의 내용을 다 알려 줄 때였다.
“들어봐요, 미카엘. 우리 아들이 나를 향해 목련꽃을 들고 달려왔는데…….”
긴 이야기를 마치자, 미카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지몽은 아닌 것 같군.”
“왜요!”
“내가 그럴 리가 없으니까. 너도 그럴 리도 없고.”
레티시아는 항의하려고 했으나, 미카엘의 말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무엇보다도… 너는 훌륭한 엄마가 될 거야, 레티시아.”
“…….”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청록빛 눈은 오직 그녀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만 빛나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 둬요. 우리 아들 이름은 마티아스고, 미카엘처럼 금발에 나처럼 금안을 가졌어요.”
“이런, 딸을 가지고 싶었는데.”
미카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레티시아는 피식 웃었다.
미카엘은 이럴 때조차도 농담을 하는 남자였다.
잠시 후, 레티시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미카엘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예지가… 맞겠지.’
미카엘은 예지에 관한 조사를 개인적으로 해 오고 있었다.
레티시아의 말은 예지의 모든 조건에 해당하였고.
하지만 그는 일단은 이 사실을 레티시아에게마저도 숨기고 싶었다.
레티시아는 이미 짐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아마도 예지 속의 그런 모습 역시, 무거운 부담과 압박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마티아스.’
미카엘은 속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자신이 좋은 아빠가 되었다는 레티시아의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그 이름의 아이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