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9화
외전 6. 어쩌면, 미래
“레티시아, 정말 이번 봉급이 이 정도밖에 안 되더냐?”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얼굴조차 보지 않은 지 제법 세월이 지난 어머니가 자신을 다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어머니.”
유순한 목소리가 레티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우리 딸이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지?”
“그럼요.”
레티시아는 미소 지었다.
티 한 점 없는 미소였다.
“집이 이렇게 어려우니까… 저도 도와야죠.”
“고맙다, 레티시아.”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덕분에 네 오빠도 문관 아카데미를 졸업할 수 있었어. 곧 네게도 밝은 날이 올 게다. 네 오빠가 어디 우릴 잊어버릴 사람이더냐?”
“아니죠.”
레티시아가 다시 한번, 유순하게 대답했다.
“그래. 한번 안아 보자… 우리 딸.”
레티시아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빨래는 다 했니?”
언제 따뜻했냐는 듯 어머니의 엄한 목소리가 레티시아의 귀에 꽂혔다.
‘왜?’
레티시아는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는 자신에게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빨랫감이 가득 든 통을 움켜쥐었다.
새삼스럽게 그녀 자신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
레티시아는 기겁했다.
자신의 손은 어린 시절, 하녀를 그만두었던 이후로 이렇게 거칠어진 적이 없었다.
손이 잔뜩 부르텄다가 아문 자국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무튀튀한 흉터 사이엔 핏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화상 자국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무, 무슨…….’
빨래는 무슨, 당장 이 집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몸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찬물에 거침없이 손을 집어넣어 빨래를 시작했다.
‘……!’
엄습하는 고통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참 동안 빨랫감을 치댄 다음에야 레티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어릴 적 떠났던 방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낡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꿈이구나.
레티시아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 이건 꿈이다.
과거처럼 보이지만 어머니의 모습과 자신의 손으로 유추했을 때, 이건 오히려 미래였다.
‘내가, 집을 떠나지 않았을 경우의 미래야.’
레티시아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기만 했다.
차라리 답답함에 겨워 소리를 지르거나 미친 사람처럼 집 안을 방방 뛰어다니기라도 하였으면 이 정도로 비참하게 느껴지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레티시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텅 빈 눈으로 허공만 바라볼 뿐.
서서히 그녀의 시선이 방바닥으로 내려갔다.
‘…아하.’
레티시아는 이내 곧 자신이 무엇을 할 생각인지 깨달았다.
낡은 장판 사이에는 물건을 숨길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 밑으로 손을 넣어, 작은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어렸던 미카엘이 준, 브로치였다.
‘…….’
레티시아는 자신이 그동안 그가 준 브로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미카엘이 정말로 그녀의 것이 되었으니, 굳이 그가 준 브로치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레티시아는 달랐다.
미카엘을 다시 만날 수 없었던 그녀에겐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기할 수 있는 브로치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중한 보물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예전의 추억을 곱씹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보 같기는.’
레티시아는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이 될 수도 있었던 미래를.
한 번도 부모의 말을 의심하여 집에서 뛰쳐나올 용기를 내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티시아는 알았다.
만약, 벼락을 맞았던 그 행운이 아니었다면 자신 역시 끝끝내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을.
전생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기적적인 일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평생 이곳에 매여 있었으리라는 걸.
그래서 레티시아는 도저히 자신을 비난할 수가 없었다.
“…미카엘.”
미약한 목소리가 자신에게서 새어 나왔다.
레티시아가 지금 미카엘을 부르는 것처럼 사랑스럽다는 어조도, 그보다 더 전에 미카엘을 불렀던 수줍어하는 어조도 아니었다.
그저 회한에 찬 목소리였다.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습의 자신은…….
미카엘이 죽고 난 이후일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미카엘의 신분을 눈치채고는,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걸 끝끝내 후회했을지도 모른다고.
“괜찮아.”
레티시아는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 버렸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지금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자신도 아니었다.
“뭐, 뭐야!”
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난 자신을 보니 단순히 레티시아에게만 들린 목소리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기회야.’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사실을.
“미안. 하지만 꼭 알아야 할 게 있어. 넌 여태까지 속고만 산 거야. 이 집을 탈출해. 그 브로치를 팔면 어느 정도 돈이 나올 테니까, 새롭게 사는 거야. 하나도 늦지 않았어.”
레티시아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말을 해 주어야 하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 자신은, 그런 말을 해 주기에는 이미 충분히 충격을 받아 보였다.
그래서 레티시아는 가만히 있기로 결심했다.
“…말도, 안 돼.”
자신의 입에서 허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뭐야.”
레티시아는 빙긋 웃었다.
정말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나는… 너야.”
그 말을 끝으로, 레티시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다 꿈이었구나.’
레티시아는 마치 꿈속의 자신이 그랬듯,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꿈속의 자신처럼 아무것도 원하는 것도 없는 허무한 모습이 아니었다.
레티시아의 눈은 욕망으로 불타올랐다.
그녀는, 지금 이 행복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
“황제 폐하, 이미 반란군이 수도까지 진입했습니다.”
미카엘은 이마를 짚었다.
‘또 이 꿈인가.’
레티시아와 달리, 그는 레티시아를 만나지 않았을 경우의 꿈을 꾸는 일에 익숙했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부터 꾸어 왔을 지도 모른다.
이 꿈 속의 그는, 멸망해 가는 제국의 황제였다.
그 곁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레티시아조차도…….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반란군의 수장에게 얌전히 목을 내주었다.
달아나려는 시도는 하지도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할 수도 있겠지만, 겨우 꿈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싶지 않았다.
‘꿈속의 레티시아라도 있으면 모를까…….’
미카엘은 코웃음을 쳤다.
“폐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
그가 무심한 어조로 황좌의 팔받침을 두드렸다.
곧 저 문을 통해서 반란군의 수장이 들어올 것이다.
“…레티시아?”
미카엘은 눈을 깜박였다.
그가 아는 레티시아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모습의 레티시아.
황제의 비서로서 귀한 대우를 받아 온 게 아닌, 고생을 많이 한 듯한 모습의 레티시아가 문을 열고 들어온 탓이었다.
“…기억하는구나.”
레티시아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내 기억 역시… 틀리지 않았고.”
미카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티시아는 그 어린 날 이후, 한 번도 자신에게 말을 놓은 적이 없었다.
하물며 황제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자신에게 반말이라니.
이제 미카엘은 이 꿈이 자신의 욕망을 보여 주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어쨌든,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꿈속이든 아니든, 레티시아를 지키는 것.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시간이 없어.”
레티시아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어서, 나를 따라서…….”
“도망쳐야 할 건 너야, 레티시아.”
그는 레티시아를 문밖으로 몰아냈지만, 꿈속의 레티시아 역시 실제 레티시아만큼이나 집요했다.
“나는 너를 살리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
“…그것참, 미안하게 됐네. 나는 그냥 여기서 죽을 생각이거든.”
“왜?”
레티시아가 부르짖었다.
미카엘은 잠시 침묵했다.
과연, 꿈속의 인물에 불과한 사람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아도 될까?
뭐 어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꿈이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네가 없으니까.”
“……!”
레티시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금안만큼은 미카엘이 잘 아는 눈과 똑 닮아, 순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여기 있잖아.”
레티시아가 힘주어 말했다.
“여기, 내가, 있다고.”
그녀는 미카엘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어린 시절, 그를 지켜 주려던 레티시아처럼.
“그러니 같이 여길 빠져나가자. 함께 살아남는 거야.”
미카엘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인지, 지금 레티시아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레티시아가 미소 지었다.
억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듯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