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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4화 (143/150)

외전 24화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정말로 놀라운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미카엘은 황태자 궁에 있는 정소를 황궁까지 끌어와, 마티아스가 비밀 통로들을 헤매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다.

준비 기간이 극히 짧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그녀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미카엘에게 응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첫째, 그녀를 위한 일이 아닌 마티아스를 위한 일이었으므로 레티시아가 칭찬한다는 건 다소 모양새가 우스웠고.

둘째, 미카엘이 자신에게 제대로 말을 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켰기 때문에 업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미리 말을 해 줬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레티시아는 노골적으로 투덜거렸다다.

“실패할 수도 있어서. 헛된 희망을 가지게 하는 건 싫었어. 이게 너와 마티아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까. 엄청난 모험이기도 했고.”

“그래도…….”

“물론 다음부턴 다 말을 하도록 할게. 이번은…….”

미카엘이 진심으로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없었어요.”

미카엘이 레티시아에게 존대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이번은 그 나름의 미안함을 표현한 셈이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그렇다고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미카엘.”

레티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당장 내일 당신이 제위를 마티아스에게 이양한다고 해도 화를 내지 않을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말만 해요, 제발. 동떨어진 기분은 지긋지긋하니까.”

“좋은 생각인데.”

미카엘이 약간 멍한 눈으로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도 돼?”

레티시아가 코웃음을 쳤다.

“해 보세요.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

다행히 미카엘이 자신의 어리디어린 협박을 실행으로 옮기는 일은 없었다.

퍽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레티시아는 영영 미카엘을 보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아직도 레티시아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미카엘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 역시 미카엘이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티시아가 자식들을 사랑할 마음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부모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두 명이든 세 명이든 기존의 마음을 크게 부풀린 다음에 똑같이 갈라 나누어 주면 된다.

물론, 레티시아의 부모는 대놓고 자신들의 사랑을 그녀의 오빠에게만 퍼부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패딩턴을 떠올린 레티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패딩턴과 자신의 부모를 위시한 가족을 만나 보았던 건 미카엘과 결혼하기 몇 달 전.

딱히 애틋한 감정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정리를 해 두고 싶었다.

그 어떤 특혜도 기대하지 말라는 걸.

그리고 레티시아의 이름을 이용하지 말라는 걸.

하지만 레티시아는 이내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달았다.

이미 패딩턴은 황제의 측근인 레티시아 우즈의 오빠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패딩턴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레티시아가 그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딩턴이 활개를 쳐 온 것이다.

사실, 레티시아는 그동안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었다고 하는 쪽에 가까웠다.

레티시아는 이미 패딩턴에게 의절하겠다는 사실을 다소 단도입적으로 밝혔다.

그런데 자신을 이용하고 있을 줄이야.

결국 레티시아의 친부모, 친오빠의 운명은 지하 감옥에서 한 달을 보낸 다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면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풀려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패딩턴이 일자리를 잃은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소리고.

이제 그들은 한때 레티시아가 자비를 베풀어 피해 주려고 했던 비참한 운명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레티시아.”

레티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미카엘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미카엘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일은 다 끝났어요?”

“응.”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

“아뇨.”

레티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신전의 문제들은 너무나 미묘해서, 외부인이 끼어들었다간 일만 그르칠 뿐이었다.

물론 미카엘은 외부인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신전의 일에 그 누구보다도 깊은 관여를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위해서라도 그가 신전과 거리를 두는 게 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길고 지루한 서류 작업을 하는 동안, 그녀의 옆에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불길하게 느껴질 정도로 얌전하게.

결국 레티시아는 그에게 대체 뭘 원하는지 물어보고 말았다.

“아무것도.”

미카엘은 진심으로 억울한 눈치였다.

“나는 네 곁에 앉아 있을 뿐이야, 레티시아.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전부라고!”

“…그래요?”

레티시아는 그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던졌지만 미카엘이 자신을 간질인 탓에 웃고 말았다.

어린아이 같은 장난이었지만, 지금 레티시아에겐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사람의 온기였다.

“사랑해.”

미카엘이 속삭였다.

“저도요.”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양 볼을 부여잡는 걸 느꼈다.

레티시아는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겹쳐졌다.

그리고…….

“어머니!”

마티아스가 노크도 없이 방에 들이닥쳤다.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미카엘은 언제 자신에게 열렬하게 키스하고 있었냐는 듯 서둘러 몸을 일으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마티아스, 무슨 일이니?”

“리코리스가 글을 읽었어요!”

“……!”

레티시아의 머릿속에서 여태까지 그녀를 괴롭혀 왔던 골칫거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그날 밤.

레티시아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티아스는 좋은 소식을 다소 축소해서 전달했다.

리코리스는 단순히 글을 읽은 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말문이 막 트인 아이처럼,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레티시아는 단순히 리코리스를 위해서 기쁜 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일이, 미카엘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알았다.

그동안 제대로 표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레티시아는 미카엘이 리코리스가 말이 늦되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항상 똑똑한 미카엘이 유일하게 멍청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미카엘은 리코리스에게 일부러 매몰차게 대하곤 했다.

마치 자신이 리코리스와 가까워지면 리코리스의 말이 더더욱 늦되기라도 할 것처럼.

“…미카엘.”

아무래도 오늘 잠을 못 이루는 건 레티시아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미카엘이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

잠에 깊게 빠진 사람 특유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 자는 거 알아요.”

미카엘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들켰군.”

“괜찮아요. 저도 잠이 안 오던 참이었으니까.”

“…나는.”

미카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는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그들이 진작 했어야 할 대화가 이제야 시작되고 있었다.

“여태까지 리코리스가 늦된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리코리스 역시 열서넛이 될 때까지 나처럼 답답하게 살 것이라고…….”

“그게 무슨 문제예요?”

레티시아는 짐짓 밝게 대답했다.

“정 그러면 리코리스에게도 그 당시의 저 같은 아이를 한 명 찾아 주죠. 기왕이면 남자아이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잖아.”

미카엘이 음울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그는 레티시아가 아닌,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나 같은 게 아니라서.”

레티시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미카엘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훨씬, 어릴 적 그 자신의 모습을 경멸하고 증오했던 것이다.

제대로 세상과 소통할 수 없어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던.

레티시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미카엘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갑자기 어릴 때로 되돌아간 듯한 친근한 말투에 미카엘이 놀라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레티시아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도 미카엘은 어린 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의연했거든. 내가 죽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 주기도 했고…….”

“겨우 경고 한마디 한 거?”

미카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말투로 되물었다.

“아니면, 외투를 같이 입자고 한 거? 어느 쪽이든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중요한 건, 말을 제대로 할 줄 알든 모르든 미카엘은 미카엘이라는 거야.”

“…….”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은 더는 그녀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는 듯했다.

레티시아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러니까, 자신을 비하하지는 말아요.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카엘이 정말로 좋으니까.”

미카엘은 대답 대신, 그녀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레티시아는 숨을 참았다.

온화한 바다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청록색 눈이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해.”

긴 침묵 끝에 나온 미카엘의 말은 단 한 단어였다.

“사랑해, 레티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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