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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6화 (145/150)

외전 26화

레티시아가 눈을 뜨기도 전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낡고 딱딱한 침대 대신, 보드라운 이불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엔 레티시아는 자신이 여전히 꿈을 꾸는 줄로만 알았다.

몸에 닿는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과 두꺼운 베개의 감촉은 레티시아가 무시하기엔 너무나 생생했지만, 꿈 속에선 그 무엇이든 가능했으니까.

심지어 폭풍우 속에서 단 한 번 만났던 바로 그 소년을 다시 만나는 것조차도.

하지만 꿈이라면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런 포근함과 온기 속에 파묻혀 있는 게 아니라.

더군다나 레티시아의 방에는 난로가 없었다.

어젯밤 젖은 옷을 제대로 벗지도 못한 채 울면서 잠들었으니, 꿈이라고 해도 추운 게 정상인 듯했다.

‘…….’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졌을 때, 레티시아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인 건 태어나서 처음 보는 휘황찬란한 천장이었다.

‘예쁘다…….’

레티시아는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지 생각하기도 앞서, 천장을 보면서 멍하니 감탄했다.

천장엔 꽃들이 유려한 솜씨로 그려져 있었는데, 금박과 은박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해 질 녘 햇살에 반짝반짝 빛났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티시아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

순간, 방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지?’

분명 집이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이렇게 화려한 방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마을 전체에서 이런 방이 있을 만한 집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부자더라도 양탄자마저 금실로 수놓을 정도로 호화로운 사치를 부리지는 않았다.

‘……귀족?’

레티시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에게 귀족이라 하면 단 한 가지 이미지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카엘.

그리고 미카엘을 데려가던 무서운 사람들.

‘브로치 때문에 끌려온 걸까.’

하지만 레티시아는 곧 그 생각을 지워냈다.

만약 브로치를 훔쳤다는 의심을 받고 끌려왔다면 레티시아는 차디찬 감옥에 있을 것이다.

이런 호화로운 침실이 아니라.

미카엘이 그녀를 보고 싶어서 불렀다는 가능성은 레티시아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미카엘은 아무런 힘이 없는 꼬마 아이일 뿐이었다.

어쩌면 이미 레티시아를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때, 문이 열렸다.

레티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어온 사람은 무척 지체 높은 귀족 부인으로 보였는데, 그녀를 향해 공손하게 눈을 내리깔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황후 폐하.”

레티시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후라니?

이 사람이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레티시아의 혼란도 잠시.

귀족 부인은 고개를 들어 레티시아를 바라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

“……아무리 레티시아의 어린 모습을 몰랐다 하더라도 비명을 지르다니.”

미카엘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레티시아를 일 년 동안이나 보필한 주제에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른 시녀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가 없었을 겁니다.”

호르헤 경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시녀로선 황후 폐하 대신, 어린 암살자가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카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덕분에 레티시아는 완전히 겁을 집어먹어버렸다.

간신히 레티시아의 경계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지만, 아이가 받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관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지?”

미카엘은 대놓고 짜증을 내었다.

“한 시간쯤 뒤에 온다던데…….”

“그래, 그자가 오면 뭐든 해결이 좀 되겠지.”

다행히 어린 레티시아는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고,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미카엘은 그녀를 위해 평소 레티시아가 좋아하던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오라 명했다.

그는 레티시아 옆에 끝까지 남아 있고 싶었지만 자신이 쳐다보고 있으면 레티시아가 단 한 입도 삼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결국 자리를 피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카엘이 할 수 있는 건, 대신관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다행히 한 시간은 기다리기에 불가능한 시간은 아니었고,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폐하, 대신관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당장 황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

잠시 후.

미카엘은 대신관과 함께 레티시아의 침실에 발을 들였다.

차려진 음식들을 거의 다 먹어치우고 빈 접시만 남겨둔 레티시아는 놀란 토끼눈이 되었는데, 다행히 미카엘과 조금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굶주려 보이지는 않았다.

미카엘은 그 사실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티시아가 금세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잠시라도 불행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오.”

대신관이 나지막한 신음을 냈다.

놀랐다는 신호였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군요.”

“이런 경우를 본 적 있나?”

“없습니다.”

대신관은 레티시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기억은 있습니까?”

“없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뭔가 짚이는 게 있군.”

미카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 대신관이 그 자신이 아는 사실들을 모두 털어놓지 않는다면, 자신은 이 노인네를 지하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그런 건 아닙니다.”

대신관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신성력의 흐름을 봤을 때…… 황후 폐하께서는 이제 더는 성녀님이 아닌 듯합니다.”

“……!”

미카엘의 입이 벌어졌다.

사실, 그는 가끔 레티시아가 신성력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랐다.

그녀의 신성력을 누구보다도 이용해왔던 자신이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갈수록 레티시아에게 지워지는 의무들은 미카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해결 방법은 있나?”

“……지금으로선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딘가 초연해 보이는 말투에 화가 저절로 치솟았다.

“똑바로 대답해.”

대신관은 잠시 미카엘의 얼굴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는 눈을 문지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그 어떤 문헌에도 보고되지 않았고요. 더군다나 각성 이전으로 되돌아가신 걸 보면, 몸과 기억이 완전히 예전의 시간에 갇혔다고밖에…….”

미카엘은 이를 악물었다.

어린 레티시아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함께 버티고 싸워왔던 시간들은 레티시아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렸을 것이다.

더 심각하게는 그를 만나기 전의 레티시아일수도 있다.

미카엘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그렇다면 미카엘은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제 겨우 열 서넛 된 어린 소녀에게, 이 모르는 남자가 너의 남편이며 너는 제국의 황후라고 한다면 겁을 먹기밖에 더 하겠는가?

“……제가, 기억을 엄청 많이 잃은 건가요?”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록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겁에 질린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미카엘은 그 사실에 위안을 얻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역시 그렇네요.”

레티시아는 생각에 곰곰이 잠긴 얼굴이었다.

“무려 황후 폐하의 하녀가 되었는데…… 다 잊어버리다니. 제 자신이 원망스러워요.”

대신관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미카엘은 그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데, 고마워 해야할만 한 일이었다.

“당분간은 쉬려무나.”

대신관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을 할 생각도 하지 말고. 그런 건…… 여기 계시는 분이 용납하지 않을 것 같으니.”

레티시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황후 폐하의 기사님이신가요?”

미카엘은 잠시 침묵한 뒤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뭐, 그 비슷한 거.”

“와……!”

레티시아가 감탄했다.

미카엘은 작은 레티시아의 일거수일투족에도 자신이 반응하고 기뻐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레티시아에게 푹 쉬라고 당부한 다음, 잠시 방을 나왔다.

논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대신관이 즉각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너는 그냥 황후라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말해준다면…… 저 아이는 의무에 짓눌릴 거야. 그런 걸 보고 있을 순 없지.”

“제 생각은 다릅니다.”

대신관이 반박했다.

“진실을 숨긴다면 문제만 더 커질 뿐입니다.”

“결정은 내가 한다.”

“하지만 성녀님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내리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미카엘은 시선을 떨어트렸다.

자신 역시 숨기는 게 상황만 더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가장 크게 걸리는 문제점이 있었다.

“……나를 만나기도 전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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