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7화
“레티시아 님, 우유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네.”
레티시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훨씬 신분이 높아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극존칭을 쓰면서 말을 걸어오다니.
황후의 하녀가 이렇게나 대우받는 신분일 줄 꿈에도 몰랐다.
이 아가씨는 그녀를 단지 ‘로티’라고 부르라고 소개했지만, 레티시아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딜 보나 레티시아는 물론 레티시아의 가족 전체를 비참하게 만들고도 남을 힘을 가진 아가씨였으니까.
“그럼 우유 한 잔과, 치즈를 넣고 구운 오믈렛 어떠세요? 그리고 신선한 샐러드 정도로.”
“저, 식사는… 아까 했는데요.”
레티시아는 황후의 기사와 함께했던 과분할 정도로 풍성했던 식사를 생각하면서 우물쭈물 말했다.
아마 이틀은 먹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내일 아침 식사 메뉴를 여쭤보고 있는 거랍니다, 레티시아 님.”
“……!”
레티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제 보니 이 아가씨의 직업은 요리사인 모양이었다.
레티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같이 먹지 않나요?”
“기억을 잃어버리셨으니까, 되찾을 때까지는 레티시아 님께서 혼자 지내시는 게 더 나을 듯해서요.”
만약 레티시아가 조금만 덜 혼란스러웠더라면 귀족 영애 출신 시녀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짚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레티시아는 세상을 잘 몰랐을 뿐이지, 멍청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레티시아는 기억이 되돌아오는 데에 기존의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과 지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내기에는 너무나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리고 황후 폐하의 기사님께서 레티시아 님과 함께 있기를 요청하셨어요. 어떻게 하시겠나요?”
“…왜죠?”
그동안 굳어 있던 레티시아의 머리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만났던 위험해 보일 정도로 잘생긴 황후의 기사가 자신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
아니, 함께 있기를 요청한다.
이 사실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레티시아는 무지하지 않았다.
“제가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요?”
“그럴 리가 있나요.”
결국 레티시아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로티 님’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아가씨가 쿡쿡 웃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냐는 듯이.
하지만 레티시아는 아직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 왜 저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시는 거죠? 마치, 저를…….”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레티시아는 차마 뒷얘기는 할 수 없었지만 로티는 충분히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들은 듯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레티시아 님은 아무것도 잘못하신 게 없으니까. 그… 기사님은.”
로티는 ‘기사님’이라는 말이 굉장히 부적절한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그저 레티시아 님이 걱정되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요? 왜요?”
조금 전엔 걱정에 찬 질문이었다면, 이번에는 순순히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황후의 기사면 레티시아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위치에 도달한 기사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걱정하다니.
“…제법 친하셨거든요, 두 분.”
“……!”
레티시아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질렸다.
그렇게 높은 사람과 자신이 제법 친밀한 관계였고, 자신이 바보 같은 기억 상실증 때문에 다 잊어버렸다면…….
레티시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실은 걱정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티에게 물어선, 아무것도 알 수 없겠지.’
레티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호화로운 방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예쁜 옷들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 기사님만 괜찮으시다면요.”
그래서 그날 저녁, 레티시아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기사와 함께 우유를 마시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는, 레티시아는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자신을 ‘미카엘 경’이라고 소개한 기사는 생소한 향이 나는 차를 마셨다.
“불편한 점은 없어?”
“…네.”
레티시아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사실 가장 불편한 건 바로 기사의 존재였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꺼낼 수 있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질문을 꺼냈다.
“저… 황후 폐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어쨌든 하녀라는데, 모시는 주인의 이름도 몰라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미카엘 경은 마치 사레가 들린 것처럼 콜록거렸다.
그는 레티시아가 미안해질 정도로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내가 부를 수가 없는 이름이야.”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높은 사람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규칙이 있는 귀족 가문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듯했다.
레티시아의 가족들은 당연히 귀족들의 관습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언젠가 레티시아가 귀족 가문의 하녀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관습들을 머릿속에 주입했다.
비록 그로부터 별로 머지않은 시기에 벼락을 맞고 전생을 떠올리게 된 레티시아는 관습들이 상당히 바보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것 또한 지금의 레티시아에게는 아직 닥쳐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었다.
“죄송해요.”
레티시아가 사과했다.
“죄송하기는…….”
미카엘 경이 이마를 짚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마치 툭 건드리면 무너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돌벽을 혼자 지탱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레티시아.”
“네.”
레티시아는 열심히 대답했다.
미카엘 경은 자신의 이름에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대의 느낌도 나지 않았고.
그래서 레티시아는 벌써 그가 마음에 들었고, 어쩌면 자신과 그가 제법 친했었다는 로티의 말이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기에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이것 하나는 알아 둬. 너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미안해할 게 없어. 그러니까 제발, 사과는 하지 마. 알겠지?”
레티시아는 대답 대신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레티시아에게 사과란 것은, 숨 쉬는 것보다도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큼 많이 했으니까.
그만큼 그녀가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황후의 하녀로서 자신은 제법 잘 해냈던 모양이었다.
‘내가 여기에선 무척 일을 잘했던 모양이야. 그러니 이런 기사님과도 친해지고.’
레티시아는 조금 전부터 자신을 짓누르던 쓸데없는 걱정은 지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저, 기사님.”
“미카엘… 경이라고 부르라니까.”
미카엘 경이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띠며 투덜거렸다.
“죄송해요.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또 그 말 한다.”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까, 기사님이라고 부를래요. 괜찮죠?”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거야.”
미카엘은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 환한 미소에, 레티시아는 잠시 넋을 놓고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레티시아는 인정했다.
자신은 이런 미모를 지닌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을에서 제일 잘났다는 로버트도 이렇게까지 잘생기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미카엘과 닮았을까…….
‘어?’
레티시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이 기사님의 이름도 미카엘이었다.
“기사님.”
레티시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
“제가… 아는 귀족 소년이 있거든요. 그런데 성은 몰라요.”
“……!”
미카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레티시아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사과하려고 했지만, 사과하지 말라고 연거푸 말했던 미카엘 경이 생각나 입을 다물었다.
“혹시 아세요? 기사님처럼 금발에, 푸르고… 예쁜 눈에, 진짜 잘생겼거든요. 그리고…….”
레티시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름도 미카엘이었어요. 그, 혹시 친척이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
침묵이 흘렀다.
레티시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카엘이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지.”
그의 입에서 레티시아가 기다리던 말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 알고 있어.”
“잘 지내나요?”
레티시아는 여전히 미카엘 경의 달라진 분위기에 겁을 먹었지만 미카엘의 소식을 알고 싶다는 열망이 그보다 앞서갔다.
“잘 지낸단다.”
미소 짓는 미카엘의 한쪽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만난 여자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던데……. 그게 너였구나.”
“미카엘은 제대로 말을 못 했는데, 설마……!”
레티시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지금은 말을 잘하는 건가요?”
“그래.”
미카엘의 목소리는 이제 불안정하지 않았다.
“몰라볼 정도로 잘하지. 다 네 덕분이야, 레티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