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8화
순간, 레티시아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 덕일 리가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그럴 리 없어요.”
“아니야.”
놀랍게도 미카엘 경이 머리를 내저었다.
“난… 그 아이로부터, 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단다.”
“이야기를요?”
레티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미카엘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미카엘 경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못 믿겠니?”
“…아뇨.”
레티시아는 자신이 최대한 빨리 반응했다고 생각했지만, 미카엘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망설임이 숨어 있었다.
미카엘 경이 쿡, 하고 작은 웃음을 내뱉었다.
“네가 자기를 구해 줬다고 하던데.”
“그 반대예요!”
레티시아는 흥분하며 소리쳤다.
“오히려, 미카엘이 저를 구해 줬어요. 미카엘이 아니었다면 전 아마…….”
레티시아의 말이 뚝 그쳤다.
소녀의 머릿속에 미카엘과의 옛 추억을 나누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브로치!’
브로치를 소중하게 보관하던 낡은 주머니가 달린 지저분한 옷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다고 귀중해 보이는 브로치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카엘은 레티시아가 무언가 고민거리를 안고 끙끙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어보나마나 분명 사소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레티시아에게는 무척이나 심각한 문제일 것이고.
그래서 미카엘은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한참 침묵이 흐른 끝에,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 범위를 완전히 벗어났고.
“…브로치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레티시아가 마치 그들 말곤 그 누구도 들어선 안 된다는 듯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미카엘이 선물해 준 브로치예요. 제가 훔친 게 아니고요.”
“아.”
미카엘이 작게 신음했다.
“그 브로치 말이지. 나도 들었어.”
“정말인가요?”
레티시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추궁부터 당할 줄 알았는데, 미카엘이 미리 미카엘 ‘경’에게 말을 해 두었다니.
“잃어버린 게 아닐까? 그렇게 귀중한 물건이라면 시녀들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 같은데.”
“제가 그걸 잃어버렸을 리가 없어요.”
레티시아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팔았을 리도 없고요. 전, 그걸 평생 팔지 않겠다고 맹세했거든요.”
여태까지 주눅이 들어서 어리게만 보이던 소녀의 강단 있는 모습에 미카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잘 아는 레티시아였다.
“그… 어디 숨겨 놓았지 싶은데. 못 찾겠어요.”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레티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나중에 찾아보려고요.”
미카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조차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브로치의 행방이 머릿속에 조금씩 떠오른 탓이었다.
브로치는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언젠가, 레티시아가 지하 감옥에서 잃어버렸다.
그 효능을 다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브로치였다.
하지만 지금의 레티시아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기억은 점차 떠오를 테니까.”
“그럴까요?”
레티시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간절했다.
왠지, 미카엘은 그 이유를 굳이 이 어린 소녀에게 묻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레티시아는 갑자기 마법처럼 바뀐 이 생활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쫓겨난다면, 그녀에게 남은 건 비정한 가족뿐이었으니까.
“당연하지.”
미카엘이 미소를 지었다.
“넌… 내 은인, 아니 내 사촌 동생의 은인이니까.”
“사촌 동생이었네요!”
레티시아의 눈이 커졌다.
“그럼 정말 잘 아시겠네요. 혹시, 미카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미카엘은 아차 싶어 혀를 깨물 뻔했다.
‘바보 같기는.’
그는 자신을 자책했다.
당연히 어린 그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레티시아는 그 어린 날 만났던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할 것이다.
“어… 요양 중이야, 국경 지대에서. 그래서 만날 수는 없겠구나.”
“요양 중이라고요?”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많이 아픈가요?”
“아니.”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자신은 이렇게 갈수록 악수를 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요양이라니.
차라리 뭐, 바쁘다고 할 걸 그랬다. 장례식이라도 치른다고 바쁘다고 하면 그것도 제법 말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 그냥 체력이 많이 약해서 그래. 그래서 훈련 겸……. 국경 지대에, 좋은 훈련 교관들이 많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레티시아는 대충 납득한 듯했다.
미카엘은 어린 레티시아의 무지함에 애써 감사했다.
“그럼, 편지를 써도 될까요?”
“편지?”
미카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네.”
레티시아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붙여 주신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그럼.”
미카엘은 가슴이 술렁거리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레티시아는 이렇게 어렸을 때조차도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렸던 자신의 세상에 들어온 유일한 빛이 레티시아였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지. 이 어린애를 두고, 무슨…….’
미카엘은 애써 마음을 잠재운 다음, 종이와 잉크를 가져다주었다.
아무리 레티시아가 사랑스럽다 한들 지금은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레티시아는 한참을 고민한 다음에야 펜을 들었다.
“…미카엘은 뭘 좋아하나요?”
미카엘은 잠시 생각한 다음에야 레티시아가 그 자신이 아닌, 레티시아가 아는 ‘미카엘’에 대해 묻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그는 망설였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의 그는 호불호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래서 어렸던 자신에게 ‘좋다’는 거의 과일과 동의어였는데, 과일은 극히 특별한 날에나 허락되는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과일을 좋아해.”
“그럴 줄 알았어요.”
레티시아가 쿡쿡 웃었다.
“다른 거는요? 책은 좋아하나요?”
“좋아할 거야.”
“검술은요?”
“어… 좋아할지도.”
“또 뭘 좋아해요?”
레티시아의 반짝이는 눈에, 미카엘은 그만 진실을 내뱉고 말았다.
“널 좋아해, 레티시아.”
“……!”
레티시아의 반응은 볼만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분홍빛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홍조는 레티시아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라앉지 않고 그녀의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너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떨까? 미카엘도 그걸 보고 싶어 할 것 같은데.”
레티시아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깃펜을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미카엘은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레티시아에게 자신이 개인적인 편지를 훔쳐보는 무례한 인간으로 느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실, 레티시아에게서 편지를 건네받는 그 순간 수신인으로서 정정당당하게 뜯어 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겠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레티시아는 지친 기색을 보이며 편지를 완성했다.
소녀는 조심스러운, 그러나 꼼꼼한 손길로 편지 봉투에 편지를 집어넣고 봉했다.
“꼭 전해 주셔요.”
“그럼.”
미카엘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는 주머니 속에 편지를 집어넣었다.
지금 당장 티가 나게 뜯어 볼 생각은 없었다.
레티시아는 이미 충분히 긴장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기회는 곧 찾아왔다.
레티시아가 많이 지친 모양인지 하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레티시아에게 푹 쉬라고 일러 준 다음, 침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편지를 볼 때였다.
미카엘에게.
그 글씨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레티시아의 글씨였다. 자신에게 글씨를 가르쳐 주던, 그 어린 레티시아의 글씨.
미카엘은 한참 동안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모든 철자를 외울 때까지.
심지어 실수로 잉크를 흘려 생긴 자국까지 그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어린 레티시아는 자신의 미숙한 글솜씨에 대한 사죄로 시작했다.
그다음은 미카엘에 대한 걱정이었고.
곳곳에서 미카엘이 ‘좋아한다는’ 것들에 대한 세심한 언급도 엿보였다.
미카엘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에 대한 기쁨과 축하도 잊지 않았다.
사실, 그 부분이 제일 길었다.
하지만 레티시아는 끝까지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야.’
미카엘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의 레티시아에게 행복한 일이라곤…….
글쎄, 어렸던 자신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닐까.
미카엘은 편지를 조심스레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발걸음을 옮겼다.
편지에 쓸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한 적이 없다면,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다.
미카엘은 오늘 하루가 무척 길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