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1화 完
공포와 경악 속에 헤매는 레티시아의 눈을 보면서, 미카엘은 한숨을 삼켰다.
레티시아의 반응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반응도 역시.
제대로 된 설명 하나 생각해 내지 못하고 어버버하는 꼴이라니.
“…그럼, 미카엘이…….”
“알아봐 주다니 기쁘네.”
미카엘은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다지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만약 레티시아가 자신을 좀 더 잘 알게 된 이후로 어려졌다면, 설득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레티시아에게 자신은 산속에서 만난 이상한 소년일 뿐이다.
절대 이성으로는 보이지 않을.
“못 믿겠어요.”
레티시아가 선언하듯 말했다.
미카엘은 한숨을 삼켰다.
레티시아는 이 모든 게 그냥 질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미카엘 역시, 직접 레티시아의 상황을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믿지 못했을 테니까.
‘…어쩔 수 없네.’
미카엘은 놀란 나머지 바닥에 반쯤 주저앉은 레티시아를 일으켜 세웠다.
레티시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미카엘을 올려다보았다.
“보여 줄 게 있어.”
미카엘은 자신이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면 믿지 않았다.
그간 함께 지내 온 시간들은, 레티시아 역시 미카엘과 비슷한 성정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다행히 레티시아는 미카엘을 순순히 따라왔다.
분명 길거리에서는 상당히 피곤해 보였는데, 지금은 경악에 겨워 피곤해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작은 방에 들어섰다.
레티시아의 작은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미카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방을 고른 건, 바로 레티시아였다. 초상화들을 보관하기 위하여.
공개용 초상화 한 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미카엘과 달리, 레티시아는 초상화를 무척 좋아했다.
단지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들은 공적인 초상화가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전통적인 궁정 화가가 아닌, 예술에 대한 자부심에 불타오르는 젊은 화가들을 불러 모아 다양한 화풍을 그리도록 만들었다.
그녀가 특별히 아끼는 초상화들을 모아 두는 방이, 바로 이곳이었다.
“너야.”
미카엘은 가장 큰 초상화를 가리켰다. 얇고 간소한 드레스 차림의 붉은 머리 여자가 정원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레티시아는 황후의 정식 예복을 입은 초상화가 아닌, 이 초상화를 무척 좋아했다.
사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초상화는 책을 읽고 있는 미카엘의 초상화였지만…….
지금 이 어린 레티시아가 굳이 알 필요는 없는 사실이었다.
“…….”
레티시아가 입을 앙다물었다.
미카엘은 알았다.
레티시아는 분명, 눈앞의 이 그림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그림들을 다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 초상화들엔 단순히 미카엘과 레티시아의 모습만이 담겨 있는 게 아니었다.
레티시아는 미카엘과 그녀가 다양하게 일상을 보내는 모습들을 그림으로 남겨 놓고 싶어 했다.
‘남는 건 그림뿐이야.’
레티시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해, 미카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정말로 남는 건 그림뿐이었다.
그와 레티시아의 지난 역사를 증명할 것들이…….
지금의 레티시아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공문서를 보더라도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할 지경이리라.
하지만 수십 장의 그림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말이네요.”
레티시아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제가… 제가…….”
그녀는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쓸어 보았다.
미카엘은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어차피 레티시아가 고용한 화가들이 그린, 레티시아의 초상화다.
그녀가 설령 이 그림들에 불을 지른다고 해도 미카엘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레티시아가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
레티시아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림 속 여자를 못 알아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자라난다면 그림 속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닥과 가까운 곳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장이 레티시아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사실 그림이라기엔 뭣한, 스케치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 스케치 속 레티시아는…….
바로 지금의 그녀 자신이었다.
기분이 나쁠 정도로 기묘하게 닮았지만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림 속 빨간 머리칼의 황후가 아니라, 바로 레티시아가 아는 그녀 자신.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레티시아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책상 위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절대 화가의 솜씨라 할 수 없는, 어설픈 모습이었지만 레티시아는 깨달았다.
이건 그녀 자신이다.
어쩌면…….
미카엘이 그렸을.
레티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미카엘의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변화무쌍한 눈이 그녀의 눈을 그대로 맞받아쳤다.
‘달라.’
레티시아는 이 눈이, 자신이 기억하는 바로 그 눈과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했다.
레티시아가 아는 미카엘의 눈은 순수했다.
이 남자처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감정들이 일렁이지도 않았고.
하지만 레티시아는 직감했다.
이 남자는, 바로 그 소년이었다.
레티시아는 마지막 남은 용기를 쥐어짜 입 밖으로 머릿속에 맴도는 한마디를 꺼냈다.
“…정말 너구나.”
침묵이 흘렀다.
미카엘과 레티시아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서로를 주시하기만 했다.
레티시아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미카엘은 떠오르는 말들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를 못했기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둘의 균형이 깨진 건 레티시아로부터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미카엘의 머리칼을 건드렸다.
기억하고 있던 바로 그 찬란한 빛 그대로였다.
하지만 침묵을 깨트린 건, 미카엘이었다.
“레티시아.”
그는 마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리고 말을 할 수 있으면서도 숨겨야만 했던 그 옛날처럼 레티시아의 이름만을 중얼거렸다.
“레티시아…….”
“미카엘.”
레티시아가 미소지었다.
“진짜… 많이 컸네. 몰라본 것 정도는, 용서해 줄 거지?”
“……!”
미카엘은 레티시아를 와락 껴안았다. 레티시아의 여린 몸이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이맛살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도리어 미카엘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떠나지 말아 줘.”
미카엘은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말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내고야 말았다.
레티시아가 눈을 깜박였다.
“내가 왜 너를 떠나?”
그녀는 무척 어리둥절한 얼굴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분명, 미카엘은 자신이 황후라고 말했다.
황후가 왜 미카엘을 떠난다는…….
레티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카엘이 황제가 되었을 리가 없었다! 그가 그 자신을 소개할 때도 황후의 기사라고 했지, 황제라고는 하지 않았다.
“설마…….”
레티시아는 그만 자신의 입을 가리고 말았다.
대체 미래의 자신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무려 황후나 되는 자리에 올라선 것도 모자라, 미카엘을 정부로 두다니.
미래가 되면 생각이 달라질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의 레티시아에겐 황제와 미카엘에게 모두 못할 짓이었다.
“…그, 미안.”
레티시아는 진지하게 사과했다.
“나는… 불륜은 싫어서.”
“…푸흡!”
약간의 침묵 끝에 미카엘에게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레티시아로부터 몸을 떼어 내서, 배를 휘어잡듯 웃었다.
“미카엘?”
레티시아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자신의 이별 선언에,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다행히도 미카엘은 레티시아의 착각을 금방 바로잡아 주었다.
“…그래, 내가 기사라고 소개하긴 했지. 당연히 거짓말이었어.”
그는 밝게 웃었다.
“나야. 내가 네 남편이야.”
미카엘은 일부러 황제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황제로서의 미카엘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미카엘을 사랑했기 때문에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
레티시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녀는 입만 뻐끔거린 채, 미카엘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미카엘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뒤로 쓸어넘겨 주었다.
“…놀라는 것도 당연해. 그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네가, 정말로 많은 일들을 했었고.”
미카엘은 하고픈 말을 다 담아 내지 못했다. 지금의 레티시아, 겨우 열서넛쯤 된 어린 소녀에겐 너무나 벅찬 말들이었기에.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줘. 나는… 널 사랑해. 어떤 모습이든 간에. 그리고 무엇을 원하든 간에…….”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레티시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기묘한 기시감이 찾아왔다.
더는 미카엘이 낯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레티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미카엘을 살폈다.
눈앞의 이 젊은 청년은…….
레티시아보다 꽤 오랜 세월 그녀를 속여 왔으며 일국의 황제로서 수없이 손을 더럽힌 남자였다.
그리고 그 행보마다 레티시아 자신이 있었다.
“…레티시아?”
미카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새하얀 빛이 시야를 덮긴 전, 레티시아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어떻게 내가 잊을 수가 있었을까.’
***
“레티시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레티시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파.”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두통이 밀려왔다.
“기억은?”
미카엘이 다급하게 물었다.
“기억……? 아.”
자신이 잠시 어려진 데다가, 기억까지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낸 레티시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려진 자신이 보인 추태를 생각하니 그냥 기억을 되찾지 않은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다, 기억났어요.”
“다행이네.”
미카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망토를 벗어 레티시아를 덮어 주었다.
레티시아가 의아한 듯이 그를 쳐다보자, 미카엘이 조금 당혹스러운 듯 알려주었다.
“옷이 많이 짧아졌어.”
“…….”
레티시아는 미카엘의 망토를 단단히 붙들었다.
황후 궁의 사용인들 앞에서 더 이상의 추태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기억이 없던 자신이 보고 있던 초상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생의 사진과 같은 것들을 남기고 싶어서, 화가들을 고용해 남긴 그림들이었다.
미카엘과 그녀의 모든 추억이 담겨 있는.
“네 말이 맞았어. 남는 건… 정말 그림뿐이더라.”
레티시아는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카엘의 말에 미소 지었다.
단순히 이 그림들이 기억이 없는 자신을 설득시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앞으로 이 방과 같은 방들이 여러 개 생길 것이다.
미카엘과 함께할 추억으로 가득 찬.
그리고 레티시아가 신성력의 부작용으로 몇 번이고 기억을 잃든, 이 방들에서 지나간 시간들을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해요.”
미카엘은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레티시아가 원하는 바로 그 대답을 되돌려 주었다.
“나도 사랑해, 레티시아.”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