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화 (1/134)

#1

전날 쥐어뜯은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들어온다. 비가 오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곧 부슬부슬 물소리도 들린다.

나는 숙취로 인한 두통과 원인 모를 통증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아무래도 몸이 성한 것 같지 않았다.

제일 먼저 허리가 뻐근했다. 그다음은 다리의 근육통. 무언가를 붙잡으려 안달을 냈는지 팔도 욱신거렸고, 가슴께는 따끔거리기까지.

‘마차에 치였는데 술을 너무 마셔서 기억도 못 하나?’

나는 고개를 내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곤 그대로 굳어버렸다.

붉은 꽃잎을 갈무리해다가 온몸에 흩뿌려둔 것 같은 흔적들이 상반신에 가득했다. 이건 분명 누군가가 살갗을 입에 물고 빨아들인 자국들이었다.

드레스를 입어도 맨살이 드러나는 팔이나 목 언저리에 있다면 어디 쓸렸겠거니, 하고 넘어갔을 터.

하지만 흔적은 놀라울 정도로 온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었다. 자세히 살피려 허리를 숙이자 몸이 반으로 찢어지는 느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 맞다…… 나 어제 남자랑 잤구나.’

그제야 생각났다. 내가 어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책에 빙의한 게 억울해서 술이나 퍼마시려고 했던 건 기억하는데…….’

대학 4년, 휴학까지 5년 동안 꼬박꼬박 빌려다 쓴 학자금대출을 일주일 전에 겨우 다 갚았다. 그러니 통장에 딱 삼만 원이 남았고.

집에 들어온 나는 빚을 청산한 것을 소박하게 기념하려 치킨을 시켰다.

그리고 애매하게 남은 돈으로 사서 대충 읽은 소설책이 바로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

요약하자면 상처투성이 외톨이인 세계관 최강 부자 남주가 파멸 후 사랑에 빠져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며 사랑하는 내용이다.

인생에 여자는 고사하고 제 편이 없던 외톨이 남자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안절부절못하고 돈지랄을 일삼는 게 꽤 재미있었다.

닭 다리 뜯으면서 책장 넘길 때는 몰랐다. 내가 그 소설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엑스트라에 빙의할 줄은.

생맥주까지 쭉 들이켠 다음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책 속의 무너져가는 다이앤 백작가의 외동딸 아멜리아 다이앤이 되어 있었다.

‘하필 빙의를 해도 보증 잘못 서 줘서 쫄딱 망한 기사단장 집안에!’

불행 중 다행인 사실 하나. 아멜리아는 무척 예뻤다.

카페라테처럼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물결 지듯 허리까지 흘렀고, 눈동자는 늦가을의 들판처럼 탐스러운 녹갈색이었다.

전체적으로 색이 옅고 피부까지 창백해 그녀가 갖춘 전투 능력과 별개로 무척 가녀린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몸매는 들어갈 덴 훅 들어가고 나올 덴 훅 나온, 그야말로 끝장.

아멜리아의 몸에 빙의한 사실을 겨우 받아들인 나는 이른 아침부터 다이앤 백작 부부를 모시고 은행에 들렀다.

대체 이 백작가에 얼마나 많은 빚이 있나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이앤 백작저의 빚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말로는 앞으로 힘내서 갚으면 희망이 있다고 하긴 했지만…….

‘그걸 다 갚으려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숨만 쉬면서 평생 일해야겠지.’

웃으며 집으로 돌아간 나는 어젯밤, 나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다이앤 백작저에서 몰래 빠져나와 맥주로 혼란을 잠재우려 했다.

그렇게 잔을 비우고 비웠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후…… 술이 문제지, 술이.”

일단 이불로 몸을 감싸고 조심조심 일어났다. 그러자 술을 마시고 간밤에 무슨 일을 어떻게, 얼마나 저질렀는지가 얼핏 기억났다.

남자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던 순간의 간질거리는 감각, 짐승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단단한 어깨와 등.

그리고, 내가 했던 말.

“당신이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는 거 듣고 싶다. 한 번만 해주면 안 돼요?”

이런 말을 한 걸 보니 어제의 나는 확실히 술에 취해 있던 것 같다. 하룻밤 상대와 마주치면 무척 민망할 것 같아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방탕한 황제가 지배하는 이곳, 하일 제국은 개방적인 편이라 귀족이라 해도 성인끼리 하룻밤을 보낸 일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냥 가긴 좀 그러니 쪽지나 남기고 갈까.’

메모를 남기려 해도 남자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하룻밤 상대에 대한 무언가 정보가 있을까 하여 방을 둘러보니 무언가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남성복 재킷에 금색 실로 새겨진 문양이 어쩐지 익숙했다.

붉은 방패 위로 앞발을 든 짐승 두 마리가 대칭으로 들어간 문양. 위협적인 발톱을 지닌 왕관을 쓴 맹수들.

“…….”

나는 못 본 척 그것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똑똑히 본 후였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표지에도 흐릿하게 새겨져 있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가문, 차이엘드 공작가의 문양을.

‘이게 왜 여기 있어?’

나른하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소설 속 등장인물 중, 차이엘드 공작가의 문양을 지니고 있을 남자는 단 하나.

벌컥!

그럴 리 없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던 나는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두른 채로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를 보고 절로 탄식했다.

“아…….”

누가 봐도 그 남자였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남자 주인공.

햇빛에 닿아도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카일리안 차이엘드.

책에 묘사된 대로 골반에 세로로 길게 남은 흉터가 그가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일어났습니까, 누나.”

그가 사근사근 다가와 뻣뻣하게 굳은 나를 일으켰다. 정확히는 일으키려 했으나 내가 일어나지 못하자 안아 올려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곤 이불을 덮어준 다음, 무척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누나라고?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돈만 바라보다 비뚤어진 냉혈 대부호였다. 게다가, 공작 전하쯤 되시는 인물이 ‘누나’라는 호칭을 쓰다니.

‘어후…… 최고다.’

물론 듣긴 엄청 좋았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정도이니.

하지만 내가 본 카일리안은 고작 하룻밤 사이에 사랑에 빠져 상대를 누나라고 부를 캐릭터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과거의 접점이 있다면 모를까.

“왜 갑자기 굳은 얼굴을 합니까. 많이 아픕니까?”

그렇게 말한 카일리안이 내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정말 걱정되는 듯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서.

“괜찮습니다.”

나는 최대한 딱딱하고 공손하게 대답하곤 이불을 끌어 콧등까지 덮었다.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원작 소설의 여주가 아닌 나는 카일리안 차이엘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휙휙 책장을 넘기며 읽었음에도 똑똑히 기억한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에서의 그의 모습을.

카일리안은 대부호 차이엘드 가의 끔찍한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큰 심리적 결핍을 얻었다.

가문의 돈을 지킬 가장 강한 아들 하나만을 살려둔다는 논리에 따라, 선대 공작은 형제들이 서로에게 음모를 꾸미고 독을 타도록 종용했다.

그 경쟁에서 ‘그 방법’을 사용해 네 명의 형을 제치고 살아남은 것이 막내아들, 카일리안 차이엘드.

그래서일까? 그는 점점 냉소적으로 자랐다.

사람들은 그가 물려받게 될 막대한 돈을 숭배해 그를 신으로 대했지, 결코 인간 대 인간으로 사귀려 하지 않았다.

경멸과 질시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낭떠러지에 몸을 던졌지만 신도 그를 버린 것인지 카일리안은 죽지 않았다.

사람들은 멀쩡히 살아난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혐오했고, 겉으로는 그의 재력을 찬양하면서 ‘괴물 공작’이라는 이명으로 부르곤 했다.

그런 상황이 그를 벼랑으로 몰았다.

원작의 그는 결국 미쳐버렸고, 제국은 물론 대륙과 세계를 지배할 만큼의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켰다.

제 딴엔 그렇게 숭배했던 돈에 당해보라는 의미였겠지만 그의 음모로 시작된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심지어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 있던 제국들도 통제력을 상실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이런 남자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파멸의 길을 걷게 된 남주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건 원작 여주가 할 일이지, 반장선거도 못 나가는 깡다구를 가진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끙끙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다음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젠 즐거웠습니다. 날이 밝았으니 시간 빼앗지 않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껴 전쟁을 일으키는 인물이니만큼 너무 딱딱하게 굴거나 매정하게 가버리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친밀함을 연출한 것뿐인데 무슨 이유인지 그는 사르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능청을 떨었다.

“이상하다. 어젠 계속 좋다고 했는데.”

“……제가 당신이 좋다고 했다고요?”

“뭐, 저도 좋다고 했고. 제가 하는 것도 좋다고 했습니다. 특히 거칠게 움직……”

“그, 그만!”

나는 카일리안을 재빨리 저지했다. 낯이 뜨거워 얼른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나를 보낼 생각이 없는 듯 눈을 맞춰왔다.

그래. 어쨌든 남주는 남주.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다. 아마 이 책 속 세계에서 제일 잘생겼겠지.

씨를 발라낸 석류를 설탕과 고아 만든 듯 눈빛은 상큼하면서도 달콤했다. 그 눈동자에 나만 담겨 있는 걸 보는 순간 가슴이 저릿해질 만큼.

정색하면 무척 날카로울 눈매지만 무슨 생각인지 내 앞에선 눈웃음만 쳤다.

콧대와 턱선은 화면발 잘 받기로 유명한 남자배우들의 그것처럼 곧고 가늘었다.

그런데 또 목울대는 툭 튀어나와 남성미를 과시했다.

몸은 또 어떤가. 화보에나 나오던 남성 모델들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탄탄한 근육질. 무슨 놈의 남자 몸이 이렇게 청순하면서 섹시할 수가 있나.

‘앞으로 엮일 일도 없는데 조금만 더 보다 갈까.’

슬쩍 시선을 옮기자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어제처럼 저를 봐주시는 겁니까.”

카일리안이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한참 동안 그의 몸과 얼굴을 눈에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큼, 큼……”

“왜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습니까. 누나.”

“저기.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끝마다 누나, 누나 하시는 이유가……”

카일리안은 ‘네가 어제 술 마시고 이런 만행까지 저질렀다’라고 상기시켜주듯 답했다.

“당신이 듣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스물셋이면 한창 좋을 때라고 말하면서.”

스물셋…… 그래. 좋을 때긴 하지.

하지만 내가 떠올린 건 원작,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에 언급되는 카일리안의 나이였다.

그가 여러 나라와 자신을 파멸에 치닫게 한 것이 스물다섯. 원작의 여자 주인공을 만난 것이 스물다섯에서 스물여섯 넘어가는 생일 즈음이라고 했다.

남주인 그는 원작 여주를 제 인생의 ‘선물’이라고 독백했으니까.

즉, 앞으로 파멸 엔딩까지 2년 정도가 남았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얼른 튀자.’

이 파멸의 씨앗과 엮였다간, 아멜리아 다이앤 백작 영애의 몸에 빙의한 내 두 번째 생도 끝장이었다.

돈으로 무력을 일으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을 시작한 장본인과 함께한다면 지옥에도 내 자리는 없을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다이앤 백작가에는 빚이 산더미 같은데 이런 최악의 남주와 엮이기까지 할 수는 없었다.

“어제 처음 뵈었는데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확실합니까? 우리가 어제 처음 본 사이라는 거.”

“네?”

“저는 아닌데.”

놀리는 듯한 음성에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자 카일리안은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아까, 어제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취해서……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네요.”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인지 카일리안의 얼굴이 조금씩 뚱해졌다.

나는 카일리안이 날 더 이상 붙잡지 않도록, 정이 털릴 만한 한마디를 내뱉기로 했다.

……보복이 두렵긴 하지만 지옥에도 못 들어가는 것보다야 나으리라.

“공작 전하께 고백할 게 있습니다.”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을 겨우 다잡고 그가 제일 싫어하는 말을 입 밖에 냈다.

“죄송합니다. 사실, 전 돈 때문에 공작 전하께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카일리안 차이엘드잖아요. 차이엘드. 세계에서 제일 돈 많은 집안.”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음에도 카일리안은 바짝 다가와 얼굴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를 만들어낼 뿐이었다.

“……돈 보고 당신 좋아한 거라니까요?”

“그렇습니까? 전 돈 엄청 많은데. 그럼 저를 엄청 좋아한다는 소리입니까?”

“음? 그거 말고 다른 생각은 안 드세요? 괘씸하다던가……”

“돈을 좋아하신다니 더 벌어야겠다.”

잠깐 눈을 맞춘 카일리안이 내 허리를 팔로 감았다.

“그리고 지금 누나가 엄청 섹시하다.”

“……!”

“돈 다음으론 제 어디가 좋습니까? 어젠 얼굴이랑 몸도 좋아하셨던 것 같은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파멸 남주는 내 귓불을 잠깐 입에 머금어 핥고는 말했다.

“어제도 시작은 이렇게 했는데. 기억 안 나면 조금 더 해도 됩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