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젯밤에도 이랬을까? 카일리안은 지독히 능숙했다.
귓불을 찬찬히 맛보는 동안 손끝으로 내 반대편 귓가를 어루만졌고, 내 몸이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허리를 받쳐 안기까지 했다.
……돈 때문에 사람에게 환멸을 느껴 외톨이의 길을 선택한 남자라지만, 이런 일에 능한 건 남주의 기본 덕목이라는 것일까.
잠깐 영 앤 리치 남주의 입술을 느끼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멈춰 세웠다.
“하아…… 잠, 잠깐만요.”
“싫습니까?”
행동을 뚝 멈추고 마주해오는 눈빛이 꼭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 같았다.
“아니, 싫은 건 아닌…… 게 아니라……”
무심결에 당신의 키스는 끝내주며 ‘튀어야 한다.’라는 본분을 잠시 잊고 하던 일을 끝까지 쭈―욱 하고 싶을 정도라고 말할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이러면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당신이 파멸 예정 남주여서, 하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로맨스 소설에서 흔히 쓰이는 변명을 해댔다.
“이런 건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예요.”
내 말을 들은 카일리안은 흥미롭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제 먼저 올라탄 건 누나였는데.”
“…….”
카일리안이 눈을 지그시 맞춘 채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자 머릿속에 흐릿하게나마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카일리안이 내가 술을 마시고 있던 허름한 술집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가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앉아도 됩니까.”
그가 비어 있던 내 옆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초연한 목소리였다.
차분하면서도 세상 다 살았다는 듯 미련이 없어 섬뜩하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공작 전하가 호위도 없이 허름한 술집에 들어온 것부터가 이상했다.
‘……설마.’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스물세 살, 형들의 기일에 환멸을 느끼며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지기로 한다.
그 직전에 평소에 안 하던 일을 몇 가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령, 평생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술집에 들어가 와인이 아닌 술을 마셔본다거나.
‘그럼 내가 어제 카일을 만났던 술집이 그 술집인가? 이 남자는 어제 뛰어내리려고 했고?’
탁상에 놓인 달력을 슬쩍 확인해 보았다. 예상한 대로 남자 주인공이 돌발행동을 한 건 어제가 형들의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돌발행동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내가 빙의한 건 본격적으로 원작이 시작되기 이전의 시점이었고,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원래대로라면 어제 벼랑에서 뛰어내렸어야 했다.
“…….”
내가 심각한 얼굴을 오래 하고 있었는지 자잘한 입맞춤을 이어가던 카일리안이 뺨을 쓰다듬으며 농담을 던졌다.
“절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 책임을 지셔야지, 누나.”
“……제가 끌고 왔어요?”
“네. 사람들에게 제일 가까운 호텔이 어디냐고 물어가면서.”
‘내가 미쳐! 왜 이렇게 급하게 군 거야?’
회피대상 1위인 원작 남주를 꼬드긴 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누군가의 극단적인 선택을 막은 건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이 경우에는 상황이 복잡했다.
원래 상처뿐인 외톨이 남자 주인공을 위로하고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은 원작의 여자 주인공 역할이다.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타인에게 이끌리고 으레 사랑에 빠지기 마련이니.
‘내가 여주인공 역할을 가로챈 건가?’
그렇다면 곤란했다. 이 소설도 소설인지라 이런저런 악역과 갈등들이 판을 치는데 그 이야기들에 휘말릴 생각은 없었다.
일단 내가 어제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를 떠올릴 필요가 있었다.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으니 물어보는 수밖에.
“제가 당신을 호텔로 데려온 다음…… 엔요?”
“술을 더 마시고 싶다고 해서 사 왔고. 누나가 저를 위로해줬습니다. 어젠 기분이 별로였는데.”
카일리안은 이 대목에서 무척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꽃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남주만 아니었어도 진작 내꺼 하자고 목놓아 외쳤을 만큼 훌륭한 미모가 빛을 발했다.
“그리고요?”
“그리고……”
카일리안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덮고 있던 이불 위로 손을 움직였다. 허리부터 골반, 허벅지까지를 유연하게 쓸어내린 다음, 그가 못 참겠단 얼굴을 했다.
“누나가 저를 사랑해줬고.”
“……네?”
“이렇게.”
그가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나와 그의 코끝이 스쳤다. 그리고 입술에 닿아오는 말캉한 감각.
순식간에 파멸 남주에게 입술을 내준 나는 번뜩 몸을 뒤로 뺐다.
“……싫습니까?”
“아니, 그게……”
어제 일을 재연하려고 하실 줄이야.
물론 싫진 않았다. 나는 욕망에 충실한 편이니까. 하지만 미래를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예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어젠 누나가 먼저 올라탔다니까.”
젠장, 할 말이 없다. 내가 다시는 맥주를 마시나 봐라.
내가 필사적으로 파멸 남주와 엮이지 않을 묘책을 찾아 헤맬 때, 카일리안은 무언가를 알아낸 듯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혹시 방금……”
밀어낸 걸 눈치챘나?
“저를 사랑한다는 말을 돌려서 하신 겁니까?”
“……네?”
멀뚱히 눈을 깜짝이자, 카일리안은 붉어진 얼굴로 내 시선을 피한 채로 대답했다.
“이런 건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제 먼저 시작한 건 누나였고. 그럼 저를……”
“그, 그만!”
삼단논법 공격에 당한 나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일 제국은 물론 세계를 주무르는 공작 전하의 말을 자르는 게 겁났지만, 지옥에도 내 자리 없는 것보다야 나으리라.
“제가 당신을 사, 사…… 아무튼,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아니었습니까.”
카일리안은 아쉬운 듯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순간 귀여워서 ‘아니긴 뭐가 아니야!’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시선을 피하려 눈을 질끈 감은 것이 문제였을까. 곧 카일리안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 숨을 머금었다.
혀로 내 아랫입술을 찬찬히 훑다 조금만 더 허락해 달라는 듯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맥이 턱 풀렸다.
‘어휴, 참.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흐릿하게 부정하기를 잠시. 정신을 차리니 나는 남주의 탄탄한 등을 더듬고 있었다. 카일리안의 나긋한 키스를 점점 내 취향대로 몰아세우기까지.
각도를 바꿔 가며 모든 것을 삼킬 기세로 입술을 빨아들이던 카일리안이 문득 멈칫하며 물었다.
“해도 됩니까?”
상황이 너무 적나라해서 ‘뭘요?’하고 물을 수도 없었다.
내가 무심결에 그런 건 왜 물어보냐는 얼굴을 했는지, 카일리안은 이유를 설명했다.
“허락받고 싶습니다. 누나도 원했으면 좋겠고.”
“아……”
원해 미치겠다는 듯한 그의 얼굴에 머릿속의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잘 생각해보니 지옥에도 못 들어가는 삶, 그렇게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유황불? 뜨끈하게 몸 좀 지진다고 생각하지 뭐.
이런 미모를 지닌 남주에게 평생 누나 소리 들으면 그곳이 어디든 천국이 아니겠는가.
‘……아니지. 누나 소리 듣는 건 잠깐일지도 몰라.’
카일리안에게는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여자 주인공, 바네사 메이브란테가 있다.
둘은 신이 직접 누에고치 길러 뽑은 다음 염색까지 한 단단한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을 테니 내가 낄 틈은 없을 게 뻔하다.
그럼 나는 여주인공에게 밀려 카일리안의 구여친이 된 다음, 좋았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혼자 눈물을 삼키겠지.
‘절대 안 돼. 이 남자랑 엮일 수는 없어.’
내가 안 된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방의 문이 열렸다. 체크아웃 시간이 지난 건지, 호텔의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이다.
“요즘 젊은것들이란.”
당황한 내가 언제 흘러내려 갔는지도 모르겠는 옷을 추스르려 하자 카일리안은 이불로 내 몸을 조심히 가렸다.
그리곤 침입자를 바라봤는데, 순간 카일리안의 표정과 말투는 완전 딴판이 되었다.
“뭡니까.”
보는 사람이 절로 굳을 정도로 차가웠고, 방금까지 내게 보였던 사근사근한 목소리 대신 살기만 가득했다.
위협적인 그의 말투와 태도에 호텔 직원은 굳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카일리안은 그 반응이 거슬린다는 듯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일드. 거기에 있습니까.”
하일드라는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일드 웨일. 차이엘드 가문의 집사장이면서 주인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사람.
곧 하얀 수염을 정갈하게 정돈한 나이 지긋한 노인이 나타나 호텔의 직원을 저 멀리로 보내버렸다.
그래. 이 할아버지가 하일드 웨일. 차분하고 지적인 노인처럼 보이지만 전직 기사단장이라던가.
제 주인이 제법 야릇한 모양으로 나를 품고 있음에도 프로 중의 프로 집사인 하일드 집사장은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제 불찰입니다.”
하일드가 말했다. 카일리안 또한 그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까 그 남자, 없애버리십시오.”
……응?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전하.”
“네?”
너무 놀란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야 말았다.
그래, 물론 카일리안이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건 알고 있었다. 파리 목숨으로 여겨주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카일리안에게 사람이란 그저 돈에 움직이는 존재이니, 사실상 밟고 올라갈 타일이나 계단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인도주의적이지 않은 처분은 21세기의 윤리관을 학습한 내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놈이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라셨습니까?”
카일리안이 다시 강아지처럼 풀어진 말투와 표정을 했다. 없애버리라는 말을 한 사람이 맞나 싶다. 나는 용기를 짜내 물었다.
“없애버린다는 건…… 아까 그 남자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음…… 그게…… 왜요?”
이러다 나까지 없애버리라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하지만 카일리안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답했다.
“불쑥 나타난 게 마음에 안 듭니다.”
“그게 다예요?”
“……누나의 흐트러진 모습을 봤을 것 아닙니까.”
카일리안은 진심으로 짜증 난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나 때문에 죽은 걸 알면 그 남자의 원혼이 꿈에 찾아올까 겁난다.
나는 사람 하나 살리자는 마음으로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미소까지 머금었다.
“카일리안. 그냥 놔두면 안 될까요?”
물론 노크도 안 하고 벌컥 문부터 연 주제에 비아냥거린 건 잘못이지만, 죽을 정도의 잘못은 아니었다.
“……지금 그 남자 편을 드는 겁니까?”
우리 남주님께선 살기가 폴폴 넘쳐 눈빛으로 연쇄살인도 거뜬히 가능할 듯한 얼굴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카일리안을 조심히 쓰다듬으며 필살의 아양을 떨었다.
“카일이 저를 위해 참을 수 있는지가 궁금해요.”
“…….”
그래.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비굴해도 어쩔 수 없다. 일단 살고 봐야지.
나는 없는 섹시함을 탈탈 짜내 말했다.
“다 가진 공작 전하께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저를 위해 참아주시면 제가 작은 상 정도는 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카일리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눈짓만으로 없애버리라던 명을 철회했다. 그리곤 얼른 칭찬한 다음 상을 내려달라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 엄청나게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아서 심장이 아프네. 이런 캐릭터 아니면서 왜 이렇게 순종적으로 나오시나.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상’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나는 하일드 집사님을 힐끗 바라봤다.
금방 내 의중을 읽어낸 카일리안은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하일드. 먹을 걸 가져다주십시오. 달고 부드러운 것들로. 우유는 따뜻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이 말투, 이 표정이다. 내가 읽었던 책의 카일리안은! 온정이라곤 1g도 없는 냉혈한!
하지만 하일드가 문을 꼭 닫고 나가자마자 카일리안은 내게 바짝 다가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이제 상을 주실 차례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