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 알았어요. 무슨 상이 받고 싶어요?”
내가 했지만 괜한 물음이긴 했다. 아까 하던 거 마저 하자는 대답이 나오겠지. 그러나 카일리안은 나를 찬찬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까, 왜 그렇게 불렀습니까?”
“그렇게?”
나는 내가 뱉은 말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내가 남주를 뭐라고 불렀더라?
“카일이 저를 위해 참을 수 있는지가 궁금해요.”
“아…… ‘카일’이요?”
카일리안은 엷은 미소를 머금곤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카일’이라는 애칭은 원작의 여주, 바네사가 카일리안을 부르는 애칭이니 만족스러울 법도 했다.
카일리안은 달콤한 목소리로 내게 부탁했다.
“누나.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주시면 안 됩니까?”
앞으로 볼 일 없을 것 같은데. 내가 피할 거니까. 하지만 심장이 덜컥 멎을 정도로 예쁘게 웃는 카일리안의 앞에서 그런 매정한 소리를 하기란 불가능했다.
“애칭으로요? 그렇게 할게요.”
“……애칭입니까?”
“보통 이름 줄여 부르는 걸 그렇게 말하지 않나요?”
나는 어색하게 되물었다. 책 속 세계에서 보통 쓰는 말이기에 그런 줄 알았건만. 애칭이라는 말에 다른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설마. ‘애칭’이라는 단어에 ‘사랑 애(愛)’ 자가 들어가서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천하의 차이엘드 공작이 원하는 상이 겨우 ‘카일’이라는 애칭이라는 게 무척 소박하다고 생각되었다.
제국의 유일한 은행도, 학교도, 의회도, 심지어 황가도 손안에 쥐고 있는 차이엘드의 젊은 수장은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돈지랄을 밥 먹듯 해댔으니까.
사랑해 마지않는 여주인공에게 예쁨 받기 위해서라면 연못도 파고 집도 짓고 하는 남자가 카일리안 차이엘드였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냥…… 카일이 원하는 상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뭘 원한다고 생각하셨길래.”
“그야 당연히 저랑 하던 거 마저…… 헙.”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남주의 잘난 얼굴이란 게 참 무섭다. 미모로 홀려 본심을 술술 말하게 하다니.
카일은 픽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제가 원한다는 건 자각하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아하하, 그런데 왜……”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왜 하던 거 마저 하자고 하는 대신, 카일이라는 애칭을 상으로 받은 거냐고.
나는 물음을 삼켰지만, 눈치 빠른 대부호 남주는 곧장 내 궁금증을 알아챘다.
“왜 애칭을 참는 것에 대한 상으로 달라고 했는지 궁금하다는 얼굴인데.”
“…….”
카일이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으며 말을 이었다.
“참으면 상을 주신다고 했으니, 더 참으면 다른 상도 주실 것 아닙니까.”
그새 그런 큰 그림을 그리셨을 줄이야. 내가 당황해서 뻣뻣하게 굳자 카일은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역시 농담하신 거죠?”
“……농담 아닌 것도 같고.”
“네?”
내가 ‘그게 무슨 뜻인가요, 남주님’이라는 질문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불안해할 때, 정중한 노크가 들려왔다.
하일드 집사님이 호화로운 브런치만을 방에 들여놓은 다음, 깔끔하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폴폴 풍기는 빵과 두툼한 햄, 먹음직스러운 계란 요리에 홍차가 곁들여진 모습이었다.
입에 침이 고였다. 배가 고프긴 엄청 고팠다. 격렬한 시간을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카일이 권하는 대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나는 이 끝내주는 브런치를 먹어도 되냐는 뜻으로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파멸 예정 남주가 얼굴을 확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역시 식사는 나중에 하는 게 좋습니까?”
내 눈빛이 어땠는진 모르겠지만, 카일은 내 의도와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셈이었다. 나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네? 아니, 아니에요. 밥 먹어요. 먼저 드세요.”
카일은 아쉬운 티를 잠깐 내다 식사를 시작했다.
무슨 놈의 남자가 밥을 이렇게 멋들어지게 먹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차를 마실 때면 꼭 어디 호텔의 조식 광고를 보는 듯했다.
나는 내 몫의 요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를 힐끔힐끔 훔쳐봤다. 말끔히 씻고 하일드 집사장이 가져다준 새 옷을 입은 지금 모습은 확실히 어제 봤던 것보다 멀끔했다.
구김살 하나 없는 흰 셔츠가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을 감쌌다. 무심한 얼굴로 식사에 집중하는 게 오히려 더 시선을 끌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일부러 따라 하려고 해도 못 할 것 같은 귀족적인 아우라가 그를 감쌌다. 그는 정장을 입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 기분이었다.
어제, 내가 맥주를 마시던 술집에서 본 카일은 나름의 변장이라는 것을 해 머리 모양과 옷차림이 조금 달랐다. 짚이는 것이 있어 슬쩍 묻기로 했다.
“공작 전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애칭.”
“큼, 카일. 어제랑은 느낌이 다르시네요?”
“어제 옷이 더 취향에 맞습니까?”
맨살이 제일 취향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 있는데 카일이 먼저 대답했다.
“……어제는 기일이라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상한 대로였다. 어제는 카일리안과 피를 나눈 형제들이 죽은 기일이었다.
형들의 기일은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가문 재산의 계승권을 두고 벌어진 기나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날이기도 했다.
가문에 없는 사람 취급당하던 ‘그녀’와 손을 잡고 형들을 몰아낸 그가 아닌가.
문득 원작 소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에 나온 카일리안의 심리 묘사가 떠올랐다.
차이엘드 공작이라는 자리를 온전히 물려받은 지 오 년이 넘었는데도, 그는 기일이면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꿈의 내용은 왜 자기를 죽였냐는 형들의 원망. 그리고 저주.
‘자기들도 카일을 죽이려고 했으면서.’
괴물 공작 소리를 견디지 못한 카일은 기일인 어제, 극단적인 마음을 먹고 술집에 들른 게 틀림없었다.
……나는 왜 하필 그 술집에서 맥주를 마셔서 남주와 엮인 것인가.
‘아니야. 사람 목숨 하나 구했다고 생각하자.’
아마 어제의 카일은 심란해서, 내 행동 하나하나를 크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인간이 나한테 이렇게 사근사근 굴 이유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아멜리아와 카일 사이의 접점이 있다면 모를까.
게다가 카일은 처음 제 편이 되어준 여자 주인공에게 집착이 상당했다. 그러니 이 이상 엮이기 전에 정을 털고 거리를 두는 게 맞았다.
‘남자 주인공만 아니었어도 안 놔주는 건데.’
내가 무심결에 한숨을 내쉬자, 카일리안은 곧장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피곤합니까?”
“조금요.”
웃으며 대답한 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사실 너무 피곤해서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요즘 왜 이러는지 도통 피로감이 안 가시네요. 몸이 정말 안 좋아요. 어디 으슥한 곳으로 요양이라도 다녀와야 할까 봐요.”
그러니 내가 갑자기 튀어도 아프겠거니 하고 나를 찾지 말거라, 남주야.
카일리안은 내 속도 모르고 마냥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더니 하일드 집사님을 불러 무언가를 명했다.
“약을 가져오라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아니에요.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쉬면 나을 거예요. 먼저 내려가 봐도 될까요?”
“그러십시오. 아프면 쉬어야 하니.”
진작 이렇게 말할걸!
나는 옳다구나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카일은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대신 나를 번쩍 안아 들어 호텔의 1층까지 성큼성큼 내려갔다.
‘어휴, 우리 남주님 팔뚝이…… 이게 아니지.’
곧, 나는 이게 마차인지 바퀴가 달린 호텔인지 모를 만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차이엘드 가문의 마차에 올라타게 되었다.
당연하다는 듯 카일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물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순간 나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내 이름이 ‘아멜리아’라는 것만 카일에게 흘렸지, 내가 다이앤 백작저에 사는 다이앤 영애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듯했다.
아멜리아라는 이름은 흔하니 이름으로 찾기도 어려울 터. 이대로 내가 내 이름의 성과 어디 사는지를 불지 않으면 도망갈 시간은 벌 수 있을 듯했다.
“앞으로 쭉 가서 내려주시면 바로 앞이에요.”
내가 말하자 카일은 어딘가 웃음을 참는 얼굴을 하다가 곧장 그리로 마차를 몰도록 했다.
문제는 내가 이 책에 빙의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터라 길을 잘 모른다는 것.
“……여기 사십니까?”
카일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으로 쭉 가니 나오는 것은 광활한 당근 텃밭뿐이었다.
제길. 진작 길 좀 외워둘걸.
“오른쪽으로 꺾은 다음 리버로드에서 왼쪽이에요.”
나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적당한 집 아무 곳에나 들어가면 카일은 그곳이 내 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도착한 곳 또한 사람이 살 만한 비주얼은 아니었다.
“예전에 이곳에 사셨습니까?”
카일이 눈 앞에 펼쳐진 재개발 구역, 즉 반쯤 헐린 집들을 보며 물었다.
“아, 아니…… 그게……”
나는 이번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방향을 지시했다.
신에게 버림받기라도 한 것인지 이동할 때마다 민가는커녕 노숙도 못 할 장소들이 나오는 게 문제였지만.
“아멜.”
카일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하긴. 이런 일이 다섯 번쯤 반복되었으니 아무리 나를 곱게 보던 카일이라도 내가 거처를 숨기고 싶어 둘러대고 있다는 것은 알아챘겠지.
하지만 카일은 이번에도 내 예상을 깼다.
“혹시, 저와 함께 차이엘드 공작저에 가고 싶어서 둘러대시는 겁니까?”
거긴 당신 집인데 제가 왜……?
“진작 말하지 그랬습니까.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오해’ 쪽이 내 원래 의도에 가까웠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떻게 둘러댈지를 골똘히 생각할 때, 카일이 마부에게 말했다.
“차이엘드 공작저로 가주십시오.”
망했다. 벗어나긴커녕 남주의 소굴에 더 깊이 들어가다니.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면 많이 아플까? 그래도 파멸 엔딩보다는 낫지 않을까?’
아멜리아는 어찌 되었든 총기사단장의 딸이니 신체 조건이 좋았다. 검도 척척 다루는 몸이니 흙바닥에 조금 뒹군다고 해도 뼈가 부러지는 정도이지 죽지는 않으리라.
내가 무엇을 진지하게 고민하는지도 모르고 카일은 내게 제 재킷을 벗어주며 속삭였다.
“공작저에는 사람이 없으니 늦게까지 머물다 가셔도 됩니다.”
“아, 그건 좀……”
난 분명 곤란함을 팍팍 티 냈건만. 카일은 이번에도 내 반응을 잘못 해석하고 볼을 붉혔다.
“물론 원하신다면 주무시고 가셔도 됩니다. 제 방은 넓으니.”
무척 기대하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