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한동안 멍하니 카일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고 가라고? 공작저가 넓으면 넓었지, 자기 방이 넓은 건 왜 어필하지?
차이엘드의 문장이 박힌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향하는 내내, 이 남주가 내게 왜 이러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반했나?’
아니지. 상대는 2년 후, 대륙을 전쟁으로 몰아넣을 냉혈한 대부호였다. 카일은 차이엘드의 재산과 권력을 노리고 하룻밤을 보내자며 달려든 여자들을 수없이 내치고 냉대했다.
제국의 노른자 땅을 모두 가지고 있는 특급 공작가의 수장이기에 혼담도 수없이 들어왔지만 모두 뒷전이었다.
애당초 ‘그녀’의 도움을 받아 공작 자리에 오른 것이 트라우마인지라 여주인공이 등장하기 전까지 여성을 기피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반하거나 사랑에 빠질 위인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
‘첫날밤이 너무 강렬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젯밤의 내가 너무 완벽했다거나 하는 어이없는 이유만 떠올랐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신세계였던 걸까.
‘그래. 그럴 수 있어. 우울할 때 우연히 마주한 누나가 끝내주게 예쁜 데다 말도 안 나오게 섹시하기까지 했으면…….’
무심결에 미간을 찌푸린 내게 카일이 불쑥 물었다.
“아픕니까?”
“아……”
사실 아프긴 엄청나게 아팠다. 아무리 마차가 좋고 카일이 덮어준 담요와 재킷까지 있다지만 첫날밤을 보내느라 얻은 사랑의 고통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쓸린 살갗이 화끈거렸고, 허리와 허벅지는 마차가 크게 흔들릴 때면 경련하듯 후들거렸다. 근육통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하지만 카일에게 티 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 동정심이라도 느끼고 나한테 다가오면 어떡해.
나는 괜찮은 척 입을 열었다.
“왜 제가 아프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카일은 대답 대신 내 자세를 눈에 담았다. 허리와 하반신이 욱신거려 무심결에 그의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도 가슴에 얼굴을 기댄 내 자세를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허락도 받지 않고 기대서요.”
“상관없으니 편한 자세로 쉬십시오. 제가 아프게 만든 거니까.”
카일은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곤 나를 자기 허벅지를 베고 눕게 했다. 옆에 놓인 수많은 쿠션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위대한 차이엘드 공작가의 마차는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도 남을 만큼 넓었기에,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대로 누웠다.
……아, 좋다. 사람 허벅지가 이렇게 탄탄할 수 있다니.
기왕 누운 김에 최대한 편한 자세와 각도를 찾아 몸을 뒤척거렸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카일이 곤란하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너무 움직이시진 마시고. 저를 자극하는 게 목적이라면 계속해도 좋지만.”
“네?”
“공작저에 도착하기까진 아직 시간이 꽤 있습니다. 제 마차이니, 안에서 무엇을 하든 상관없고.”
능글맞은 목소리와 눈웃음. 나는 벌떡 일어나 정자세로 마차 좌석에 앉았다.
***
공작저의 정문을 통과하고도 마차는 한참이나 움직였다. 그 이유를 궁금해하던 나는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정문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리겠다.’
공작저는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책에 묘사되었던 황궁보다 훨씬 규모가 커서, 말이 공작저이지 사실상 거대한 도시를 연상시켰다.
중심이 되는 축을 따라 본궁과 산책로, 분수대와 정문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별궁과 정원 등등의 시설이 좌우대칭으로 설계된 곳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공작저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차이엘드의 소유라는 것은 확실했다.
내가 빙의한 아멜리아 다이앤이 사는 백작저는 공작저의 별궁보다 작은데. 과연 대부호 집안은 남달랐다.
밤에 몰래 도망가려고 했는데 이러다 공작저에서 길을 잃는 건 아닌가 싶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카일이 눈을 맞추곤 물었다.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저택이라면 며칠을 묵어도 안 질리겠어요.”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는 아차 싶었다. ‘며칠’이라는 단어를 들은 카일이 눈을 반짝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말을 철회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예쁘게.
“방금 분명 ‘며칠’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오래 머무르면 불편하실 거예요.”
“불편하긴 누가.”
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시선을 옮겼다.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로봇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각 잡힌 자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책에 묘사된 대로 그들은 카일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책에서 카일은 공작저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
어지간히 환멸을 느낀 것인지 사람과 교류하는 일 자체가 적었던 걸로 기억한다. 카일이 여자 주인공을 데려왔을 때 수하들이 얼마나 놀랐던가.
“누나, 이쪽입니다.”
“우와…… 음?”
카일을 따라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선 나는 다소 당황스러운 광경을 마주했다.
홀에서 카일리안 차이엘드 공작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카일이 내 어깨를 감싸 안는 것을 보고 놀라 들고 있던 서류철을 떨어트렸다.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우리 남주님 바쁘신 분이었지.
제국은 물론, 대륙, 그 이상의 경제를 주무르는 사람이 시간을 한가하게 보낼 리 없었다.
실제로, 소설에 나온 그는 하루 4시간 30분 수면을 칼 같이 지키고, 아침엔 커피와 함께 8종이 넘는 신문을 읽는다.
그 뒤엔 체력 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보고를 듣는다고 했다.
‘……어쩐지. 어젯밤에 지치지를 않더라.’
나와 카일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던 인사들은 재빨리 정신을 부여잡고 떨어트린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문을 기점으로 양옆에 줄 맞춰 서서 카일에게 보고할 준비를 마쳤다. 바쁜 것 같아 나는 슬쩍 물러섰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 바쁘신 듯하니 소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카일은 나를 놔주긴커녕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누가 보고 있든, 자신이 무얼 하든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 서린 행동이었다.
“어딜 가시려고.”
……이거 행선지를 묻는 거겠지? ‘어딜 감히 가려고’가 아니라?
나는 슬슬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바쁘신 것 같아서요.”
“바쁘지 않습니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말을 마친 카일은 내 손을 이끌고 푹신한 소파에 가 앉았다. 그리곤 다시 싸늘하고 군더더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한 사람당 30초 드리겠습니다. 약식으로 보고하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류철을 들고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베테랑 전문가들은 그래프와 사진, 보도 자료를 척척 보여주며 릴레이 보고를 이어나갔다.
“전하. 일전에 꼭 투자해주십사 하고 돌아갔던 메리필드 무역회사가 사업 계획서를 보내왔습니다. 주요 수입품은 켈트만 족의 특산품이며, 예상 규모는……”
이런 식으로 전문가 하나가 속사포 랩을 쏴대면 카일은 그 글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은 다음 담백하게 답했다.
“검토하지. 집무실에 자료를 정리해 두도록. 다음.”
“위대하신 차이엘드 공작 전하. 마리아 구호소에서 기부금을……”
“보내. 다음.”
지금의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내게 보이던 강아지 같은 모습도, 소설에서 읽었던 미친 냉혈한도 아니었다.
대부호, 그 자체.
대학 5년, 경제학과 무역학을 전공한 내겐 지금 카일의 모습이 마치 신처럼 보였다.
그가 보고를 듣는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여러 곳으로 움직였다.
은행, 학교, 의회, 황실을 장악한 차이엘드는 돈이라는 생명수를 곳곳에 공급하는 중심 펌프, 심장과도 같았다.
나라면 이런 가문의 주인이라는 압박감을 절대 견디지 못했으리라.
역시 소설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카일은 나와 사는 세상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존경과 감탄을 담아 바라보자, 카일은 방금 전과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일은 끝났는데. 아쉽습니까?”
“아쉽긴, 누가……”
“빤히 보시던데.”
“큼, 큼.”
그래. 솔직히, 일하는 게 과할 정도로 섹시하긴 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흐트러짐 없이 판단하고 말하나.
넥타이를 슬쩍 만지면서 냉철하게 대답할 땐 머리가 살짝 아픈 것도 같았다.
상대가 2년 후에 나라는 물론 대륙까지 깔끔히 말아먹을 파멸 남주, 게다가 원작의 여주인공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 몇 번을 되뇌고서야 어지럼증이 겨우 가라앉았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일은 또 사르르 눈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공작저에 온 느낌은 어떻습니까.”
제 인생 망했구나, 싶죠.
“좋은 곳이네요. 넓고. 따뜻하고.”
가구가 많이 없고, 고용인들은 죄다 입에 재갈이라도 문 듯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아서 휑하긴 했다.
하지만 내 집, 다이앤 백작저는 천장 곳곳에서 물이 새고, 운이 나쁜 밤에는 쥐와 함께 잠자리에 드는 곳이었다.
……이게 다 아버지라는 작자, 다이앤 백작이 사업을 하겠다는 친구에게 보증을 잘못 서준 탓이라지.
아무튼, 그에 비하면 공작저는 그야말로 천국에나 있을 법한 꿈의 공간이었다. 별 다섯 개가 붙은 호텔도 이것보다 호화롭지는 않으리라.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카일은 나를 일으키며 제안했다.
“며칠 동안 머물게 될 제 방을 둘러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짜로요?”
“아까 분명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며칠 동안…….”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어디 방에 머문다고요?”
“당연히 제 방.”
카일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어젠 누나가 저를 방으로 끌고 갔으니 오늘은 제 차례입니다.”
내가 어제 저지른 일을 들먹이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살살 저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카일, 그건 좀……”
“다른 방이 없습니다.”
그가 뻔뻔하게 답했다. 방이 없긴. 고등학교 하나가 통째로 수학여행 와도 1인 1실 줄 수 있을 만큼 많더만.
“아까 오면서 봤는데 빈방이 엄청 많던걸요? 호텔인 줄 알았잖아요.”
“빈방?”
카일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전문가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차이엘드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 급히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휴, 빈방이라니…… 차이엘드에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아가씨, 혼자는 위험합니다. 공작 전하와 꼭 붙어 계십시오.”
“천년만년 이곳에 머물다 가십시오!”
그렇다. 이들은 카일리안 차이엘드라는 자의 능력을 빛 삼아 제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들이었다.
거액의 돈을 움직이는 자들답게 눈치라는 것이 고도로 발달했으며, 따라서 내 편을 들어줄 리는 없었다.
……어떡하지. 도망쳐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