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공작저를 구경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니 하늘이 어느덧 캄캄했다. 운치를 이유로 다리가 욱신거릴 때까지 산책도 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카일의 방에 들어가지 않은 나는 미리 계획한 대로 두통과 더위를 호소하며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댔다.
예상대로 카일은 나를 걱정했다.
“괜찮습니까?”
“산책을 했더니 열이 올라서 이러나…… 혹시, 잠시 씻을 수 있을까요?”
능청스레 묻자 카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곤 당연히 그래도 된다는 듯 여자 고용인을 불러 내 목욕을 돕도록 명했다.
일이 계획한 대로 척척 이뤄지는 중이었다. 나는 머리를 위로 쓸어넘기며 카일에게 말했다.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카일은 순순히 물러났다. 사람 여럿 속이는 게 미안하지만, 이젠 공작저에서 탈출할 때였다.
욕실에 들어서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물과 그 위를 떠다니는 꽃잎들, 벽에 걸린 야릇한 슬립들이 보였다.
책의 묘사가 떠올랐다. 언젠가 생길지 모르는 공작 부인을 위해 공작저의 고용인들이 야금야금 준비해둔 것들이리라.
‘고용인들은 카일을 꽤나 사랑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하긴. 주인이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대하는데 어느 고용인이 살갑게 다가갈 수 있을까. 나는 물에 들어가려는 척 치맛단을 매만지다 고용인에게 부탁했다.
“혹시 향유 같은 게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차이엘드 공작저에는 주인을 모시기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향유를 가져다주시겠어요? 공작님이 좋아하시는 향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를 거니 많이 갖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누나 님.”
누나 님이라니. 설마…… 카일이 나를 그렇게 부르니까 내 성이 ‘누나’라고 생각한 건가?
뭐, 그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누나’라는 호칭을 쓰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들을 때마다 절로 웃음이 나긴 하지만.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여 고용인을 배웅한 나는 잠시 눈치를 보다, 급히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빛의 속도로 옷을 꿰어 입은 다음 신발을 신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내가 있던 손님용 욕실은 1층이었고, 전직 기사단장의 딸인 아멜리아의 몸이라면 이 정도는 가뿐히 넘어갈 수 있었다.
곧바로 창문을 연 나는 탁자 위의 펜과 메모지를 보고 멈칫했다.
‘……그래. 맛있는 거 많이 줬으니 감사했다고 쪽지 정도는 남기는 게 예의지.’
나는 재빨리 글씨를 갈겨쓴 다음 창문을 넘었다.
이걸로 파멸 예정 대부호 남주와는 영원히 안녕이었다.
***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굳은 얼굴로 집무실에 앉아 일주일 전 들은 고용인의 보고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잠시 향유를 가지러 간 사이 아가씨께서…… 죽여주시옵소서.”
카일은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대체 왜…….’
첫날밤을 함께 보낸 아멜리아가 도망간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것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쪽지 하나만을 달랑 남긴 채로.
[공작 전하, 이렇게 떠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전하와 저는 사는 세상이 다릅니다. 우리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불순한 의도를 품고 접근한 것에 대해 늦게나마 사과드립니다. 전하께 진실한 사랑이 찾아오기를 먼 곳에서 기원하겠습니다.]
카일은 심각하게 비뚤거리는 아멜의 필체를 보고 또 봤다. ‘진실한 사랑’이라니. 매정하게 떠나 놓고 할 말인가?
“……”
카일은 냉소적인 눈을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리를 비우자 굽이치듯 흐르던 아멜리아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떠올라 정신이 아찔했다. 오묘한 빛깔의 녹갈색 눈동자는 또 어떠한가. 멍하니 보고 있으면 나쁜 생각이 절로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도망갔다니.
‘먼저 호텔로 끌고 간 게 누군데.’
카일은 아직도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걸음으로 호텔에 자신을 이끌고 간 아멜은 술에 취해 풀린 발음으로 온갖 말들을 쏟아냈다.
“아…… 아무리 봐도 너무 잘생겼어. 당신이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는 거 듣고 싶다. 한 번만 해주면 안 돼요? 평생 못 잊을 텐데.”
얼굴을 지분거리며 미친 듯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한 그녀에게 카일은 그저 피식 웃어보였다.
“다이앤 영애, 이만 주무십시오. 취한 정도를 보니 내일이면 기억도 못 할 것 같은데. 게다가 영애가 스물네 살이긴 하지만 저보다 생일이 겨우 한 달 빠르지 않습니까.”
알고 있는 것을 똑똑히 말하자 아멜리아는 풀린 발음으로 추궁했다.
“방금 처음 봤으면서 그런 건 어떻게 알아요?”
“……그러는 영애는 방금 처음 본 남자를 호텔로 데려옵니까?”
쏘아붙이자 아멜리아는 보조개가 깊게 패도록 씩 웃었다. 아주 엉큼하고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알았으니까 이리 와서 누워 봐요. 누나 믿지?”
단추를 툭툭 풀며 믿냐고 물어보다니.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카일은 그녀의 손길에 몸을 내맡기며 자문했다. 왜 이 여자를 따라왔을까?
분명 눈앞의 아멜리아 다이앤은 고액의 빚더미에 앉은 가문의 영애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특별한 치장을 하지 않아도 오묘한 녹갈색 눈동자와 웃을 때마다 움푹 패는 보조개가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하룻밤을 보내는 건 카일의 취미가 아니었다. 괴물 공작이라는 멸시 어린 호칭을 감당하기에도 벅찬데 이 여자 저 여자를 상대한다는 추문까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그녀를 따라 호텔에 들어선 이유는 단 하나.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가.’
카일은 어린 시절 후계자 수업을 위해 차이엘드 가문의 은행에 갔다가 다이앤 백작 부부와 그들의 외동딸, 아멜리아를 봤던 일을 떠올렸다.
분명 다이앤 백작이 보증을 잘못 서 줘서 가문의 재산은 물론이고 황제에게 하사받은 영지까지 모두 저당 잡힌 상황이라고 했다.
그들은 제국의 유일한 은행인 차이엘드 은행의 건물에 와 보증인이므로 빚을 대신 갚아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친우의 사업 실패로 일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다이앤 백작가의 세 사람은 안도하며 서로를 따스하게 껴안았다.
“미안하구려, 여보. 내가 보증을 잘못 서 줘서…….”
“사람이 다친 게 아니라 겨우 돈이 없어진 거잖아요? 우리 아멜도 건강하고. 가족이 있으니 함께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어린 카일은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는 다이앤 가족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부러움이나 질투를 느끼지 못하도록 교육받은 몸인지라 그때는 가슴속의 뜨거운 응어리가 그저 그들을 가소롭게 여기는 마음인 줄 알았다.
얼마 전, 성장한 아멜리아와 여전히 사랑이 넘치는 다이앤 백작 부부를 마주한 것도 순전한 우연이었다.
카일은 황실의 자금 문제로 차이엘드 은행에 잠깐 들렀고, 아멜리아는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뜬금없이 은행에 들러 자신들의 빚이 얼마인지 보고 싶다고 청했다.
변제하지 못한 거액의 빚을 확인한 아멜리아는 절망했다. 그리고 10년 전의 어느 날처럼 다이앤 백작 부부를 포근히 껴안았다.
“괜찮아요. 어떻게든 갚을 수 있을 거예요.”
“아멜리아야…….”
“액수가 좀 크긴 하지만 차근차근 해결하면 돼요. 일단 우리 가족은 모두 건강하잖아요? 다 잃은 건 아니에요.”
기억 속의 장면보다 훌쩍 자란 아멜리아가 그렇게 말하곤 가족을 챙기는 순간 카일은 깨달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다이앤 가족을 보며 자신이 느낀 뜨거운 감정은 한없는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슬픔이었다는 것을.
햇빛으로 만든 듯한 따뜻하고 안락한 울타리가 서로를 아끼는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카일은 무심결에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직 각축전에서 살아남은 한 명의 아들만을 후계자로 인정하는 차이엘드 공작가에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따스한 무언가.
허름한 술집에서 다시 만난 아멜리아 다이앤이 내민 손을 뿌리칠 수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우연히 재회한 그녀가 자신의 세계로 이끌어주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나를 당신의 세계로 데려가 달라는 어리석고도 간절한 바람.
‘……다짜고짜 호텔로 끌고 갈 줄은 몰랐지만.’
조금 빠르긴 해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회상을 마친 카일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게 아멜을 떠올리고 떠올렸는데도 아직 바깥은 캄캄한 밤이었다. 다이앤 백작저에 지금 찾아갈 수는 없었다.
‘……보고 싶다.’
갑자기 어딘가로 훅 빠져든 기분.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그녀가 공작저에서 도망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옳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맺고 끊을 수 있는 장난이 아니었다.
누나라는 생전 써본 적 없던 호칭을 사용하면 빙긋 웃는 모습에 이미 중독된 것인지도 몰랐다.
밤에 보았던 엉큼하고 야릇한 웃음이나 낮에 보았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 누나, 하고 부르면 보이던 다채로운 얼굴들이 각인된 듯 시시각각 떠올랐다.
그 이유는 아멜리아 다이앤을 가까이 두고 천천히 생각해봐야 알 듯했다.
쪽지에 쓰인 ‘우린 맞지 않는다’는 말이 거슬렸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가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게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안 맞는 건? 차차 맞춰가면 된다.
카일은 손깍지를 낀 채로 말했다.
“하일드. 거기 있나.”
곧, 그의 유능한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주인의 명을 기다렸다. 열린 문의 뒤로 복도에 걸린 차이엘드의 문장이 보였다.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두 마리의 사자. 맹수. 원하는 건 모든 가질 수 있다는 힘의 상징.
도망을 계획하고 계셨거든, 네발 달린 짐승은 피하셨어야지, 누나.
비릿하게 웃은 카일이 찬찬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아멜리아는 무얼 하고 있을까.”
“그것이…… 아프신 듯합니다.”
“뭐?”
하일드의 말에 카일이 얼굴을 구기며 놀랐다. 더 말해보라는 압박이었다.
“일주일 전, 공작저에서 다이앤 백작저까지 뛰어가시지 않으셨습니까.”
“…….”
아프다니. 일주일 동안 연락 하나 없었던 게 아파서였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가 아플 때 자신이 해야 할 건 하나였다.
“내일, 다이앤 백작저로 간다.”
“무엇을 준비할까요, 전하.”
“몸에 좋은 것과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 모두 다.”
“좋아하는 것들이라면……”
하일드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카일은 찬찬히 아멜의 취향을 곱씹었다.
돈 좋아한다고 했으니 금괴와 보석을 넉넉히 챙겨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내일, 내 옷을 벗기 쉬운 것으로 준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