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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6화 (6/134)

#6

차이엘드 공작저에서 다이앤 백작저까지 광란의 야반도주를 해온 것이 어언 일주일 전.

카일은 정말 내가 어느 가문 사람인지 몰랐던 것인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를 찾아온 불청객은 다른 것이었다.

“콜록, 콜록…… 아, 진짜……”

그렇다. 첫날밤을 보낸 몸으로 전력 질주를 한 탓에 나는 독한 감기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빙의한 책 속 세계는 의학이 21세기 지구만큼이나 발전했다는 설정이었지만, 내겐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이앤 백작저에는 의사를 부르긴커녕 병원비를 댈 만큼의 돈이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일단 내가 살던 원래 세계, 대한민국은 의료보험 제도가 굉장히 잘 갖춰져 있던 나라였으니까.

이만 원 정도면 의사에게 진료도 받고, 주사에 항생제까지 처방받은 다음, 남은 돈으로 과자도 사 먹을 수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이곳의 병원비는 소문으로만 듣던 미국의 그것보다도 비쌌다. 명망 있는 의사와 조수들을 집으로 직접 부르는 왕진 형식이라 진료비 외에도 출장비를 쥐여줘야 했다.

‘손님들이 오시면 차라도 내드려야 도리지만…… 에휴.’

명색이 백작가인데 그 정도는 가능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이앤 백작가는 가문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마저도 저당 잡힌, 그야말로 이름뿐인 상태였다.

아버지가 총기사단장이었다가 황궁에 출입할 돈이 없어 잘렸다면 말 다 한 거지.

“왜 나는 빙의를 해도 빚이 산더미 같은 백작가에…… 에휴.”

나는 내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따뜻한 물을 홀짝였다. 의지할 게 민간요법뿐이라니 욕이 절로 나왔다.

기침을 한 번 할 때마다 가슴 안쪽과 목구멍이 뜨겁게 쓰라렸다. 이대로 두면 정말 몸이 망가질 것 같았다.

아멜리아가 몰래 모아둔 용돈으로 의대 입시에서는 떨어졌지만 어쨌든 의술엔 해박하다는 돌팔이 의사를 불렀으니 내일은 조금 나아지겠지.

의자에 젖은 수건을 걸어놓고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 즈음, 아래층에서 다이앤 백작 부부의 비명이 들려왔다.

― 안돼! 오, 여보……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수지침 기능이 있는 볼펜에서 본 대로 손을 꾹꾹 지압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돈이 없어 고용인도 딱 하나만 두는 집이건만 왜인지 무척 시끄러웠다. 다이앤 백작 부부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남자들 뒤에 서서 서로의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압류 딱지야?’

붉은 방패 위의 두 마리 사자. 차이엘드 공작가의 문양이 다이앤 백작저의 구석구석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서랍, 선반, 그리고 백작저의 벽에도.

빙의 직후 은행에 가 확인해본 바에 의하면, 차이엘드 은행에 빚을 갚지 못해 압류 딱지가 붙은 게 분명했다.

나는 다급한 걸음으로 내려가 다이앤 백작 부부를 살폈다.

친구에게 연대보증을 서줘 집안을 이 꼴로 만든 장본인, 내 아버지인 페르슈 다이앤 백작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은행에서 나온 요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품에 안긴 내 어머니, 다이애나 다이앤 백작 부인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백작의 곁에는 눈알을 붙이다 만 탓에 애꾸눈이 된 곰 인형 약 삼백 마리가 허망하게 뒹굴고 있었고, 백작 부인의 품에는 오늘 끝내야 할 삯바느질 거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차이엘드 은행의 요원들은 자비 없이 압류 딱지를 붙이려 했다.

……저거 다 납품할 물건들이라 훼손되면 물어줘야 하는데.

“잠깐만요.”

나는 그들을 막아 세웠다. 물론 은행 요원들에게 잘못은 없었다.

거액의 보증을 서준 건 다이앤 백작이었고 그 거액의 돈을 빌려준 게 제국의 유일한 은행, 차이엘드 은행일 뿐이었다.

듣자 하니 백작이라는 지위 때문에 빚 상환도 꽤 미뤄줬다는 것 같던데. 은행 입장에서는 돈 될 만한 것들을 팔아서 손해를 메우는 게 당연했다.

얼른 일을 해결하고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듯한 요원들은 바쁜 티를 팍팍 내며 내게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나는 아멜리아 다이앤이 수집해둔 자료를 바탕으로 며칠간 공부한 것을 줄줄이 읊었다.

“제가 알기론 차이엘드 은행은 귀족에게 돈을 빌려줄 때, 그들의 명예와 작위를 내려주신 황제 폐하의 뜻을 고려하여 압류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이앤 백작저의 경우에는…….”

“네, 맞습니다. 압류 면제권은 집안을 부양할 수 있는 후계자가 있을 때 발동되는 권리이죠.”

하일 제국은 어쨌거나 신분제가 존재하는 사회였다. 귀족은 망해도 귀족인지라 거지꼴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후계자가 연줄을 잘 잡아 정계에 진출하거나 고위직을 맡게 되면 기울어진 가세도 금방 회복할 수 있으니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여되는 특권도 많았다.

물론 다이앤 백작 부부 사이의 2세라곤 나 하나뿐이지만.

“그래서? 평생 손에 물 한번 안 묻혀본 것처럼 보이는 백작 영애께서 일이라도 하시겠다는 건가?”

……그래.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시간이라도 벌어야지.

내가 처음 책에 빙의했을 때, 아멜리아의 책상에는 차이엘드 은행의 대출 및 연대보증 관련 약관과 신문의 구인·구직 광고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멜리아 또한 셈에 둔하긴 하지만 선한 백작 부부를 위해 자신이 나설 생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이앤 백작 부부는 빙의 직후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정성껏 돌봤다. 그랬기에 그들과 함께 짐을 지고 싶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말했다.

“제가 일을 하면 조금씩이나마 빚을 갚아 나갈 수 있으니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흠…… 한 달 내로 일을 시작했다는 증명서를 떼와야 하는데?”

“필요한 서류는 늦지 않게 제출하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씁쓸하긴 하지만 21세기 지구에서 안 해본 일이 없기도 했고, 원작의 내용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빚 변제가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필 학자금 대출을 다 갚은 시점에 빙의하게 되어 무척 억울했지만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 봐야지 어쩌겠어.

또 그 개고생을 해야 한다는 게 정말 싫지만.

내 말을 들은 요원들은 주춤하더니 남은 압류 딱지들을 가방에 고이 넣고 물러섰다. 나와 대화하던 한 명만 빼고.

그는 나 때문에 일 처리가 늦어지는 것이 무척 불만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압류 딱지 뒷면의 스티커를 뗀 그가 내게 다가와 낮게 지껄였다.

“얼마나 잘하는지 보지, 백작 영애.”

툭.

그가 내 가슴팍에 압류 딱지를 붙이곤 돌아섰다.

‘사람한테 압류 딱지를 붙일 생각을 하다니.’

나는 그를 향해 중지를 척 세워 보인 다음, 소파에 앉아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다이앤 백작 부부에게 다가갔다.

보고 또 봐도 참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제국 최고의 기사만이 오를 수 있는 총기사단장직을 최연소의 나이에 등극한 남자였다. 어머니는 왕년에 사교계를 주름잡던 백작 영애셨단다.

‘그런 대단하신 분들이 지금은 왜 이렇게 주눅이 들어 계신지. 역시 돈 때문인가.’

내 몸의 주인인 아멜리아의 일기를 훔쳐본 바에 의하면, 백작 부부는 어느 무도회의 파티에서 만나 불같은 하룻밤을 보낸 다음 한 달 후 결혼했다.

그 불같은 하룻밤의 결과가 짜잔, 내가 빙의한 아멜리아 다이앤 되시겠다.

‘총기사단장인 아버지가 장인어른께 맞아 죽을 뻔했다고 쓰여 있었지.’

열다섯만 넘어도 결혼을 하는 세계인지라 백작 부부는 이제 겨우 30대 후반이었고, 외모는 여전히 젊었지만 가난에 찌들어 영혼만은 60대였다.

지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다이앤 백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멜리아야…… 미안하구나. 내가 보증을 잘못 서서……”

무역 사업에 뛰어든다던 백작 친구를 믿고 차이엘드 은행 본점에 가 거액의 빚보증을 서줬다던가.

그만큼, 내 아버지라는 자는 사람에 대한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름뿐이긴 하지만 백작이라는 신분으로 곰돌이 눈알을 붙이시는 걸 보면 나름의 책임감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아가…… 많이 놀랐지? 이리 오렴.”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는 아버지만큼이나 무척 따스한 분이었다. 아버지를 사랑해 그가 한 잘못도 함께 견딜 만큼 사랑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두 사람의 품에 가 잠시 안겨 있다, 기침이 나와 물러났다. 이놈의 감기. 괜히 두 분께 옮길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것쯤은 괜찮다는 듯 나를 꼭 껴안았다.

“아멜. 이리 오렴. 주님께 기도드리자.”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다이앤 백작 부부의 문제점이었다.

분명 선하고 따뜻해 주님이라는 분이 보면 참 좋아하실 사람들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이들에겐 생활력이라는 것이 없었다.

천장에 물이 새는데 고용인이라곤 키 작은 피터 하나뿐이라 고칠 수 없을 때도 기도. 쥐가 백작가의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파먹었을 때도 기도.

셈에 둔하고 잇속이라곤 챙길 줄도 모르는 마냥 착한 사람들이라, 차마 이들을 두고 차이엘드 공작을 피해 야반도주를 할 수 없었다.

생활력이라곤 조금도 갖추지 못하신 것과는 별개로 부부는 외동딸인 아멜리아를 정말로 사랑했다.

아멜리아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얼른 딸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 쓰러지리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게 나았다.

나는 그들의 품에 가 다시 안겼다. 어머니가 지친 목소리로 기도를 시작했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

나는 기도에 성실히 참여하지 않았지만.

기도가 끝난 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의자로 모시고 이야기했다.

“일단 백작저의 생활 규모를 파악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한 달 생활비가 얼마 정도 드는지 파악한 다음 조금씩 갚아나가는 거죠.”

아르바이트를 여러 탕 뛰며 학자금대출을 갚느라 허리띠 졸라매는 생활에는 도가 튼 나였다. 이런 상황에는 아무리 들어오고 나가는 돈이 없더라도 자금 운용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집주인인 다이앤 백작 부부가 이 집안의 돈이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모르는데 집안의 경제 상황이 나아질 리 없다.

다행히 다이앤 백작 부부는 가계부를 쓰자거나 곰 인형 눈알 붙이기보다 돈이 될 만한 소일거리를 알아보자는 제안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아쉽긴 하지만 팔아도 상관없는 장식품 몇 가지를 팔아서 당장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게 좋겠어요. 계속 이렇게 드시면 건강 상해요. 저도 어서 일을 찾아볼게요.”

“아멜…… 네가 있어 든든하구나.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다 언제 공부한 거니?”

악의 없는 질문이었지만 뜨끔했다. 나는 아멜리아의 방에 가득 쌓여 있던 신문들을 떠올리곤 얼버무렸다.

“음…… 독학이죠, 독학. 요새 신문 읽는 데 재미를 붙여서요.”

“역시 우리 딸은…….”

둘은 한참이나 딸을 잘 키웠다며 서로를 칭찬했다. 그 흐뭇한 광경을 바라보기를 잠시, 쉴 필요를 느낀 나는 둘에게 부탁했다.

“이따 손님이 하나 오실 거예요. 누구인지는 묻지 마시고. 저를 찾을 텐데 그냥 제 방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고작 이렇게 말하는데도 목이 따끔거렸다. 제길. 무리하긴 했나 보다. 돌팔이 의사가 얼른 오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갔다.

실내용 드레스에 붙은 뻣뻣한 압류 딱지가 더럽게 안 떨어져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얇은 슈미즈를 입긴 했지만 수면용이라 햇빛 아래에 있으면 살갗이 다 비쳐 보였다.

‘아무리 돌팔이여도 노크는 하고 들어오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를 내 방에 들일지 상상도 못 한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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