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7화 (7/134)

#7

꿈속에서도 열이 끓어 끙끙 앓는 소리를 낸 것 같다.

대부호 남주에게 도망쳐 파멸 앤딩을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다 병사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하아, 하아……”

나는 숨을 몰아쉬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끔찍한 꿈을 꾼 탓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지럽다. 열이 더 올랐는지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물이라도 좀 마시면 괜찮아질 것 같아 느리게 몸을 일으킨 나는 곧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카일……?”

차분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 어려 있었다. 2년 후에 대륙을 전쟁판으로 몰아넣을 인간이 보일 모습은 아니었다.

“카일? 여긴 어떻게 왔어요?”

어디 데이트라도 가는지 풍성한 장미 다발을 가져온 카일은 그것을 스툴에 대충 내려두곤 나를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감기에 걸린 건 난데 자기가 더 아프다는 얼굴이었다. 그새 집에 우환이라도 생긴 건가.

“……괜찮습니까?”

안절부절못하던 카일은 내게 제 정장 재킷을 벗어 걸쳐준 다음 시원한 물을 컵에 따라 내밀었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탓에 나는 그 물잔을 그대로 내 몸 위에 쏟고야 말았다.

“미안해요. 재킷이 젖을 것 같은데……”

목과 입가가 따가운 것을 참고 겨우 발음한 나는 그의 재킷을 벗어 탁탁 물기를 털어냈다.

하지만 왜인지 얼굴이 새빨개진 카일은 내 행동을 저지시킨 다음, 자기 옷이 젖든 말든 내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시선 처리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곤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내가 지그시 눈을 마주하자, 카일은 제 눈만큼이나 붉어진 얼굴 위로 마른세수를 하곤 말했다.

“이러려고 저를 방에 들이셨습니까?”

“이러려고요?”

“환자는 쉬어야지, 무리하면 안 됩니다. 나을 때까지 어디 안 갈 테니 자중하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뭘 했다고……”

“……유혹하고 있지 않습니까.”

카일의 시선을 따라 찬찬히 내 몸을 바라본 나는 3초 후에 입을 작게 벌렸다.

압류 딱지가 붙은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침대에 바로 뛰어든 게 그제야 기억났다. 드레스 안에 입는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물에 젖어 안이 다 비쳐 보였다.

……비치기만 한 건 아니다. 아예 살갗에 달라붙어서 더 자극적이었다.

나는 카일의 재킷으로 꽁꽁 몸을 감싸고 사과했다.

“미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아프셨던 겁니까? 다이앤 백작 부부에게 진작부터 감기 기운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아, 그게……”

나는 카일의 눈을 보며 잠깐 고민했다.

파멸 남주는 성정이 참으로 냉혹했다. 따라서, 이미 한 차례 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했다간 끝장일지도 모른다. 파멸 엔딩을 피하려면 여우같이 구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목욕하려고 옷을 벗는데 갑자기 기침이 나서……”

아무래도 나는 거짓말에 재능이 없나 보다. 미치지 않고서야 감기 기운이 있어 쉬려고 야반도주를 했다는 말을 믿을까.

“설마, 제게 감기를 옮길까 봐 떠나신 겁니까?”

응? 믿는다고?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누나가 저를 버리고 떠난 줄 알았습니다.”

카일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내 진심에 더 가까웠다. 나는 영영 그와 엮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사근사근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 옆자리에 앉아 물었다.

“많이 아픕니까?”

“조금…….”

체감상 병사하기 직전입니다.

카일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 다음 이마에 길게 입을 맞췄다.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에야 깜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

물론 카일은 내 행동에 시무룩해졌다.

“……제가 싫습니까?”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추욱 처진 목소리로 말하지 마! 심장 아프다고!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 가련함까지 장착하니 내 심장은 그야말로 아작이 났다.

그러나 상대는 파멸 남주. 물건 대하듯 갑자기 쳐내는 행동은 독일 테니 어느 정도 친밀감을 유지하며 왜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지를 은근슬쩍 티 내는 게 현명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이런 건 정식으로 교제하는 연인들끼리 하는 거예요, 카일.”

“흠…… 그렇습니까.”

반박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카일은 다시 사르르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내 드레스를 주워주었다.

“의사를 불렀습니다. 옷을……”

뒤집혀 있던 드레스를 다시 뒤집던 그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졌다. 가슴께에 붙어 있는 압류 딱지 때문이었다.

부득 이를 간 카일이 바로 목소리를 냈다.

“하일드. 이게 무슨 일이지?”

항상 그림자처럼 카일을 따라다니는 하일드 집사장이 압류 딱지를 보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곧장 누가 저지른 짓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찾아내서 어떻게 할까요?”

“죽……, 아니. 잘라.”

내 눈치를 본 카일이 말을 고쳤다.

깍듯이 예를 갖춘 하일드가 퇴장하자마자 차이엘드의 고용인이 나를 위한 드레스를 가져왔다.

편하면서도 따뜻해 환자가 입기 제격이었다. 질감도 보드랍고 품도 넉넉했다. 모든 드레스가 그렇듯 혼자 입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카일에게 부탁했다.

“저, 카일…… 아까 나간 고용인, 다시 불러주실 수 있나요? 혼자 입긴 좀 힘들 것 같아서.”

“제가 있지 않습니까. 누나.”

“고맙지만, 여자 옷이라 카일보다는……”

“어차피 벗기는 것 반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거라면 해봤고.”

어째 떨어져 있던 일주일 동안 눈빛이 많이 바뀐 것 같았다. 마치 참고 또 참았는데, 또, 또 참으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어깨끈을 만지작거리던 카일이 지극히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젖은 원피스 위에 새 옷을 입으실 겁니까? 젖을 텐데.”

“……카일. 사심 채우지 말고, 저기 가서 벽 보고 서 있어요.”

카일은 제가 돕지 못해 무척 아쉬운 얼굴을 하곤,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누나.”

***

옷을 갈아입자마자, 내 방에는 다이앤 백작 부부와 죽은 사람도 살릴 것처럼 보이는 나이 지긋한 의료진들이 들어왔다.

모두 도통 속을 모르겠는 카일이 불러모은 사람들이었다.

카일은 자신이 부른 모두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곤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칭찬해달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래. 적어도 돌팔이 의사에게 진료받는 것보다야 나은 상황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카일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요.”

“아멜. 감사를 말로만 표하실 겁니까?”

그럼요? 하고 물으려던 내게, 카일은 친히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해주었다.

대체 일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원작에서도 여주인공을 향한 애정결핍이 드러났던 것 같긴 한데, 이렇게 대놓고 애정을 갈구하지는 않았다.

“……안 돼요. 사람들 보는데 뽀뽀를 어떻게 해요?”

내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니 카일은 조금 아쉬운 얼굴을 하곤 되물었다.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대답할 틈도 없이 카일이 내 뺨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얼굴을 거두는 내내 무척 아쉬운 표정을 보이기까지.

……누가 나한테 꿀이라도 발라놨나? 왜 이렇게 닿고 싶어 안달을 내지?

카일이 입을 맞출 때 고개를 돌리고 있던 의료진들은 그의 턱짓 하나에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다이앤 백작 영애. 저는 공국, 아니, 하일 제국 최고의 병원, 차이엘드 병원의 병원장 폴 레미안이라고 합니다.”

감기 진료받는데 무슨 병원장이 오시나.

그 외에도 카일이 부른 의료진들은 그야말로 제국 최고였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내 상태를 파악하기 시작했고, 나는 흰 가운을 입은 자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다이앤 백작 부부의 얼굴을 바라봤다.

두 분 모두, 딱 ‘대체 우리 아멜이 어쩌다가 차이엘드 공작과 엮인 거지?’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게요. 저도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잠시 후, 진료를 마친 의료진은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병원장은 마치 내가 불치병이라도 앓고 있다는 듯 무게를 잡았다.

웬일로 얌전히 자리를 피해주었던 카일이 팔짱을 끼고 돌아와 병원장을 향해 턱짓했다. 기다렸다는 듯 차이엘드 병원의 병원장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영애의 상태는 심각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 말을 들은 다이앤 백작 부부가 놀란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병원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최고 수준의 진료를 받으며 가장 좋은 곳에서 쉬어야만 나을 수 있겠습니다. 다이앤 백작저 같은 곳 말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이곳에 있다간 없는 병도 생기리라.

어머니는 머리카락을, 아버지는 각막을 팔아서라도 내 요양비를 벌어보겠다고 소리쳤다.

모두가 심각한 가운데, 카일만 능글맞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병원장. 어디서 쉬어야 좋겠습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의료진이 상주하고 대륙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차이엘드 공작저 같은 곳이겠지요.”

‘……응?’

그렇다. 차이엘드 병원의 병원장 역시 카일리안 차이엘드를 제 인생의 빛으로 섬기는 자였다. 그들이 누구 편이겠는가!

병원장은 공작저에 들어가 쉬면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는 듯 아부를 떨어댔고, 순진한 다이앤 백작 부부는 그 사실을 덜컥 믿었다.

화룡점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웃어 보이곤 말하는 카일이었다.

“하지만 백작 영애쯤 되시는 분이 남의 집에 머무르시긴 좀 거북하실 테고.”

웃겨. 자기가 언제부터 날 백작 영애라고 불렀다고!

내가 도끼눈을 하고 보자, 카일은 다 계획했다는 듯 엷은 웃음을 띤 채로 내게 장미꽃을 내밀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저와 정식으로 교제하는 방법뿐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