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원작 소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에서,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능히 얻을 줄 아는 남자였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라는 호칭, 대륙 최고의 대부호라는 명예를 포함한 모든 것. 심지어 그에게 다가온 파멸조차 그 스스로가 원했기에 얻은 것이었다.
이 세계에 그가 가지지 못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 대상이 내가 될 줄이야.
카일은 제가 내민 장미꽃을 바라보기만 할 뿐, 받지 않는 나를 보며 생글생글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곤 손을 까딱이는 것으로 입이 떡 벌어지는 보물들을 내 발치에 내려두었다. 상자들은 모두 보물을 훔쳐 나르는 해적선에나 있을 법한 생김새였다.
무슨 놈의 세공이 테두리마다 이렇게 화려하게 들어가 있는지.
안에는 대륙에 있는 황금들을 다 쓸어담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많은 금붙이들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연이어 들어온 궤짝들에는 어마어마한 현금다발과 달걀보다 더 큰 보석들이 담겨 광채를 발했다.
이 궤짝들을 내다 팔기만 하면 다이앤 백작가의 급한 불은 어느 정도 끌 수 있으리라.
“저는 누나가 좋아하는 모든 걸 줄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 원한다면 더 드릴 수 있고.”
어휴 감사…… 가 아니지.
마성의 목소리에서 겨우 헤어나온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2년 후면 카일은 원작의 여주, 운명의 사랑인 바네사를 만난다. 둘 사이에 내가 끼어들 틈 같은 건 없으리라.
나는 무척 억울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카일리안. 제가 돈 때문에 당신을 만난 줄 알아요?”
“……일전에 그렇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맞다. 내가 그렇게 말했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카일은 잠시 후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설마, 돈 때문이 아닌데 제게 그렇게 둘러대신 겁니까?”
“아니에요. 백 퍼센트, 아니, 천 퍼센트 돈 때문이었어요.”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미치겠네. 말빨을 못 따라가겠다.
어지럼증을 느끼고 있던 나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다이앤 백작, 우리 아빠였다. 그는 무척 단호하고 기품 있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멜리아. 돈 때문이라니. 아비가 연대보증으로 진 빚 때문에 네가 원치 않는 선택을 할 필요는 없다.”
다이앤 백작은 내 말을 듣고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하긴, 딸이 빚 갚으려고 돈 많은 남자의 구애를 거절하지 못하겠다면 어느 아버지의 가슴이 미어지지 않으랴.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위로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여우 같은 남주가 목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이앤 백작. 그날 밤엔 영애가 먼저……”
“카, 카일! 그만두지 못해요? 내가 당신을 호텔로 끌고 간 걸 아버지께 말할 셈…… 헙.”
나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이놈의 혀 때문에 제 명에 못 살지.
목표를 달성한 카일은 픽 웃으며 다이앤 백작을 바라봤다.
아버지는 그저 ‘크흠, 크흠……’ 하는 헛기침만 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긴, 이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명실상부 제국, 아니, 대륙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젊고, 능력 있고, 집안과 재산이 빵빵한 데다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게다가, 딸이 그 남자를 먼저 원했고, 그 남자 또한 딸을 원한다고 하니 남은 건 꽃길만 걷는 일뿐이었다.
……차라리 카일이 2년 후에 전쟁을 일으키리란 사실을 몰랐으면 좋으련만.
파멸 예정 남주는 내게 다가와 눈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매혹하는 악마가 웃으면 이런 모습일까.
속에선 열불이 치솟고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묻고 싶지만, 오뚝한 콧대와 날렵한 턱선을 보니 화가 가라앉았다.
나는 카일에게 적어도 의료진을 물린 다음 다시 얘기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셔츠와 넥타이를 조심히, 아주 조심히 쥐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스르륵―
“아니, 와…… 진짜 억울하네. 무슨 놈의 옷이 손만 닿았는데도 벗겨져요?”
이걸 단추라고 단 거야?!
내가 억울하다는 듯 카일의 얼굴과 순식간에 드러난 복근을 번갈아 보자, 다이앤 백작 부부는 눈물을 찍어 닦으며 말했다.
“짐을 꾸려 놓으마, 아멜. 준비되면 내려오렴.”
“교제를 축하한다, 딸.”
아니, 엄마, 아빠. 그게 아니에요.
다이앤 백작 부부는 순식간에 자리를 비워주었다. 의료진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방에 단둘이 남게 되자, 카일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둔 다음 진지하게 말했다.
“제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정식으로 교제하겠다고 하십시오.”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아까 병원장에게 들었습니다. 리노 바이러스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급성 바이러스 형 비인두염이라고 합니다. 제국의 질병 분류 코드 J00.0에 해당하는 질환. 얼른 치료하지 않으면……”
“네?!”
뭐야, 나 그냥 감기 아니었어?
어쩐지, 감기치고는 너무 아프다 했다. 급성 뭐시기일 줄이야.
갑자기 머리가 더 아픈 것도 같았다. 병원장의 말대로, 다이앤 백작저에 더 머물렀다간 병이 낫긴커녕 심해질 듯했다.
‘……파멸 엔딩이고 뭐고, 여기서 병으로 죽으면 말짱 도루묵 아냐.’
그래. 적당히 연애하는 척하다가, 남주가 나한테 정 털리게 해서 헤어지면 되잖아. 잘 때 침을 흘린다거나, 예의 없게 식사를 한다거나. 방법은 많았다.
한참 고민한 끝에, 나는 카일이 여전히 내밀고 있는 꽃을 받아들었다.
“……해요. 정식 교제.”
카일은 보는 내 가슴이 다 뛸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내 뺨에 입을 맞춘 다음,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참고로, 누나가 걸린 병은 다른 말로 ‘감기’라고도 합니다.”
“……뭐라고요?!”
“얼른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바깥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뻔뻔하게 말한 카일은 나를 번쩍 안아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
다이앤 백작 부부는 흰 손수건을 흔들어 보이며 ‘잘 지내렴.’ 따위의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엄마, 아빠! 딸이 팔려가는데 한가하게 작별 인사나 할 거예요?!’
하는 말이 혀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냈다간 죄책감만 들게 할 것 같아 행복한 척 손을 흔들었다.
마차에 나를 앉힌 카일은 무척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낯간지러워 고개를 돌렸는데, 그의 손이 조심스레 내 얼굴을 감싸 쥐곤 자길 보게 했다.
“어딜 보십니까.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했으면 나만 봐야지.”
……아. 얼굴 보니 또 화가 풀리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그에게 온갖 불만을 늘어놓기로 작정하곤 입을 뗐다.
“아까, 그 옷은 뭐예요? 전 정말 손만 댔다고요. 설마, 벗기기 쉬운 옷이라도 만들어 입은 거예요?”
“물론. 누나가 좋아하는 건 다 드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휴, 감사…… 가 아니지.
“큼, 큼. 다음부턴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사람들 많은 데서 그게 무슨.”
“알겠습니다. 단둘이 있을 때는 괜찮은 겁니까?”
“단둘이 있을 때도 안 돼요.”
“그런 명령은 듣기 싫은데.”
……방금 뭐였지?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은데.
내가 놀라 눈을 깜빡이자, 카일은 다시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냈다.
“공작저까진 꽤 남았으니 주무십시오. 저번처럼 제 다리를 베고 누워도 되고.”
대체 이 남주에게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랑 떨어져 있는 동안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걸까?
아무튼, 내가 해야 할 일은 남주가 내게 정을 털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해서 나는 팔짱을 끼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진상을 떨기 시작했다.
“후회할 거예요, 카일. 제가 집착이 얼마나 심한지 모르시죠?”
“……저한테 집착해줄 겁니까?”
“일거수일투족 사사건건 다 신경 쓸 거예요.”
“…….”
“당신이 뭘 하는지, 누굴 만나고 뭘 먹는지 다 알아내려고 안달을 낼 거라고요.”
“그렇게 할 거면 그냥 온종일 제 곁에 있는 게 더 편할 텐데. 고용인들에게 그리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전혀 행복해할 일이 아님에도 카일은 웃고 있었다. 이제껏 보이던 애교스러운 웃음과 그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추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욕망을 꾹꾹 누르는 듯한 얼굴을 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일주일 전, 떠나시기 전에 분명 제게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씻고 나온다면서.”
“아……”
그래. 튀려고 그런 핑계를 댔던 건 생각난다. 하지만 인제 와서 그 말은 왜? 설마…….
“오래 기다렸으니 작은 상으로는 만족 못 할 것 같습니다, 누나.”
***
며칠 후. 조용하기로는 공동묘지를 방불케 하던 차이엘드 공작저가 오늘따라 소란스러웠다.
공작의 살기에 눌려 무음 모드를 자처하던 새들이 아름답게 지저귀기 시작했고 웬 나비와 작은 짐승들이 정원을 활보했다.
고용인들의 얼굴에도 표정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음성이 들려왔다.
자리에 앉아 오늘 자 보고서를 검토하던 카일은 봄볕이 스며든 듯한 변화의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감기가 다 나았다고 했지.’
감기가 옮는다는 핑계를 대고 독방을 고수하며 아무도 만나지 않던 아멜리아의 증상이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했다.
병원장을 비롯한 최고의 의료진과 몸에 좋다는 것들을 잔뜩 준비시킨 보람이 있었다.
아직 미미한 열감기 증상이 남아 있다는 핑계를 대며 아멜리아는 여전히 카일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공작저의 이곳저곳을 몰래 산책했다.
언제부턴가 카일의 시선이 온통 그녀를 향해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카일은 아멜을 낫게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정원을 거닐고 있는 그녀에게 어제는 무얼 했고 그제는 무얼 했는지 묻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일드. 잠깐 정원에 다녀오겠습니다.”
딱딱한 투로 말하는 주군에게 하일드 집사장이 찰나 동안 굳은 얼굴을 내비쳤다. 평소 표정을 잘 숨기는 그가 할 실수는 아니었다.
“뭡니까.”
“아닙니다, 전하.”
“하일드. 제게 할 말이 있습니까?”
“그것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내키는 대로.”
카일은 하일드를 신뢰했다. 그는 흔치 않게 문무를 겸비한 남자였고, 차이엘드 공작저의 집안일을 오래 도맡아 사리에도 밝았다.
주인의 의문이 담긴 시선을 받던 하일드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공작 전하. 사랑은 밀당입니다. 밀고 당기기! 지금처럼 누나 님께 24시간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사랑.
카일은 두 글자가 주는 말랑말랑한 기분에 입술을 맞물었다. 온몸이 모닥불 옆의 양초처럼 녹을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 당겼으면 당겼지 왜 밀어낸단 말인가.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고, 받을 수 있을 때 냉큼 받는 것이 익숙한 생활을 오래 해온 터라 그의 조언이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하일드의 눈빛은 공작저의 1년 치 예산을 짤 때보다 더 진지했다.
“하일드. 꼭 밀어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마치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면모를 보여야지요. 사랑도 세상의 모든 재화와 마찬가지로 희소할 때 값어치가 커집니다.”
카일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무심한 말투로 공작저가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면 되는 겁니까?”
“그것이…… 무심한 말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일드. 조언 고맙습니다.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오겠습니다. 무심하게.”
‘밀어내기’를 잘못 이해한 카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일드 집사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그를 막아냈다.
“전하. 송구하오나 ‘밀어내기’에 대해 몇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밀고 당기기 특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