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요양을 핑계로 아멜리아 다이앤을 공작저에 들인 지 어언 사흘. 카일은 정원을 몰래 힐긋거릴 때마다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는군.’
분명 집사의 조언대로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는 건 자신이건만, 아멜은 놀라울 정도로 제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작저의 잘 가꿔진 생울타리나 장미정원, 대리석 분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구경하면서 말이다.
불호령은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주인에게 무심한 태도로 일관할 것을 제안했던 하일드에게 떨어졌다.
“하일드. 정말 밀고 당기기가 특효인 것 맞습니까.”
“그러합니다, 전하.”
“그런데 왜……”
카일은 뒷말을 삼켰다. 제 입으로 제 상태를 말하면 너무도 비참한 기분이 될 것 같다.
아멜이 산책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벌떡 일어나 창문가에 서서 시선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눈길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 새카만 옷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재킷을 벗고 볕 아래서는 눈부실 정도인 흰 셔츠 차림으로 창문을 기웃거려도 하녀들의 시선만 받을 뿐, 아멜은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내 눈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 같은데.”
하일드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설명을 요구하는 주인을 보며 조금은 놀랐다.
차이엘드 공작들은 대대로 무능력한 것에 치를 떤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눈앞의 차이엘드 공작은 단 한 번도 흥분이나 분노의 기색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처럼 분노와 망연자실함을 드러낸다면 재빨리 누그러뜨리는 것이 현명했다.
“전하. 누나 님께서 공작저를 편안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좋은 조짐입니다.”
“……편안해한다고?”
카일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졌다. 그는 태어난 직후부터 이곳을 편안하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서열을 정리하고 싶어 안달 난 짐승들이 우아한 척 점잔을 빼는 곳이 차이엘드 공작저였다.
그런데 편안하다니.
“공작저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억지로 끌려온 사람이 보일 반응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아멜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제집처럼 거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나아졌다. 카일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줄도 모르고 작게 명했다.
“그래도 제가 있는 걸 잊어버리면 안 되니, 종이와 펜을 가져오십시오.”
***
인정할 건 인정하자. 차이엘드 공작저는 최고였다.
말이 공작저지 이 안에 있을 건 다 있었다. 마치 21세기 대한민국의 초호화 아파트처럼.
몸을 덥히고 노곤한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사우나나 헤엄을 쳐도 충분할 만큼 넓은 욕조. 찬 바람을 쐬지 않고 기분전환을 하기 딱 좋은 유리 온실까지.
게다가 무슨 놈의 요리가 이렇게 맛있는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요리를 만든 주방장님을 불러달라고 해 놓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다.
초호화 시설. 초특급 요리.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기에 내 감기는 1주일, 아니, 나흘 만에 완전히 떨어졌다.
물론 꾀병을 부려 공작저 입성 2주 후인 오늘에야 완치 판정을 받아냈지만.
그동안은 감기가 옮는다, 몸이 좋지 않다, 하는 핑계로 카일을 피할 수 있었다.
카일 또한 공작저를 싸돌아다니는 나를 그대로 풀어주었다. 마치 내가 이미 자기 어장 안에 들어와 있으니 안심한 것처럼.
아니면 나와 만난 지 3주나 되었으니, 아예 흥미가 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한두 번쯤은 내가 머무는 방에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단 한 번도 제 발로 나를 찾아오지 않은 걸 보면.
‘……좋은 조짐. 이대로만 가자.’
공작저 곳곳에 놓인 끝내주게 비싼 책들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 나는 잠들기 전, 뜨끈한 물로 목욕을 하려 책상에서 일어났다.
방에는 다이앤 백작저의 내 방만한 커다란 욕조가 붙어 있었다. 그곳에서 온갖 꽃잎들이 띄워진 물에 몸을 담그면 왕비라도 된 기분이었다.
곧장 욕실로 가 물을 받으려 했건만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목욕하고 싶은데, 목욕물을 준비해주시겠어요?”
“네, 누나 님.”
뭐든 내 스스로 하는 것이 몸에 밴 탓에 고용인을 부리는 일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들과 대화를 트게 된 건 카일 때문이었다.
한집에 있으면서도 카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하녀들을 시켜 내게 쪽지를 보내왔다. 대부분 오늘 기분을 묻거나 무얼 하고 있냐는 내용이었다.
하긴, 자기 집에 웬 감기 걸린 여자가 나돌아다니고 있다니 궁금하긴 하겠지.
“누나 님.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따로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요?”
“음…… 공작 전하께서 보내신 것들을 다시 읽고 싶어요.”
“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나는 그동안 카일이 보낸 편지들을 하나씩 다시 읽어보았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춥거나 더우면 언제든 얘기하십시오. 공작저의 모든 것은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아멜.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감기가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식사에 신경 쓰도록 주방에 일러두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누나. 감기가 얼른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숨이 나온다, 한숨이.’
글자만 읽으면 달콤하기 짝이 없다. 세상에 뭐 이런 스윗한 남정네가 다 있나 싶다.
내가 이 수많은 쪽지들을 받고 느낀 건, 카일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미친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카일이 돈에 환멸을 느껴 전쟁을 일으킨 건, 그가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돈만 보고 자신을 사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 예를 들자면, 원작에 나오는 황태자 같은 사람.’
지금의 카일은 아직 남들이 자신의 돈 때문에 자신을 곁에 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미치지 않은 것이리라.
하긴. 나 같아도, 다른 사람들이 ‘아멜리아 다이앤’이라는 내 정체성 대신 다른 것을 보고 접근한다면 화가 날 것 같긴 했다.
‘……근데 왜 돈 보고 접근했다고 말한 난 살려둔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앞으로 2년 후면 카일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그랬다. 하지만 나는 21세기 지구에 살다 책에 빙의된 몸이니, 미래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반장 선거도 못 나가는 깡다구를 가진 내가 무슨.’
카일리안 차이엘드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이 그와 사랑에 빠지기를 기도하는 게 옳았다.
‘아…… 어렵다.’
물에서 나와 몸의 물기를 닦고 가운을 걸치자니 목욕 후의 한 잔이 절실했다.
워낙 고풍스러운 성이라 맥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콜은 분명 존재했다.
공작저의 곳곳에는 유리병에 담긴 갈색 양주와 잔이 놓인 테이블이 있었는데, 잘 생각해 보니 내 방 근처에도 하나가 있었다.
늦은 밤이라 고용인을 제외한 손님들은 다 가신 후고, 내 방 근처의 고용인들은 왜인지 죄다 여자였다.
‘……오케이. 딱 한 잔만 하고 오자.’
머리를 대충 털어 말린 다음 복도로 향한 나는 양주 테이블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원목 테이블에 금빛으로 찰랑이는 양주가 한 병. 누구든 따라 마실 수 있도록 준비된 두꺼운 글라스들.
재빨리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은 나는 묘한 희열을 느끼며 두 번째 잔을 가득 채워 방으로 향했다.
고용인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빙빙 돌아오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귀환은 성공적이었다.
아니, 성공적일 뻔했다.
문을 열기 직전,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나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카일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는지 빠른 걸음을 하다 나를 발견하고 멈추었다.
술을 마신 건 난데 그의 얼굴이 더 불그스름해져 있었고, 카일은 애틋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나. 보고 싶었습니다.”
“아……”
2주 동안 안 찾아왔으면서 보고 싶었다니. 어딘가 역설적이었다.
하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애타는 얼굴을 하는 걸 보니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와 들고 있던 술잔을 슬쩍 내려두며 농담을 건넸다.
“감기 옮기 싫어서 안 찾아온 거, 맞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제가 제 몸 걱정하느라 찾아오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이 저돌적인 연하남 좀 보게. 놀리고 싶네.
“카일, 지금 나한테 화내요?”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근데, 안 찾아온 이유가 있어요? 솔직히 하루쯤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떠냐. 일명 질척거리기 작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상대가 트집을 잡고 질척거리면 자연스레 거부감이 든다나.
내가 씩 웃으며 대답을 재촉하자, 카일은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누나가 아프고, 가까이 있으면 참기 힘드니까……”
카일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해서일까. 나는 짓궂게 놀리고 싶었다.
“뭘 참기 힘든데요?”
“……하고 싶은 걸 참기 힘듭니다.”
“잘 안 들리는걸요?”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말하고 싶다고? 뭘?
나는 카일을 지그시 바라봤다. 부끄러운 듯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모습이었다. 흰 피부가 불콰하게 달아오른 것이 참 예뻤다.
대체 뭘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가슴을 졸이고 있는 걸까. 혹시, 우리 남주님이 남모를 이상 취향이라도 가지고 있나?
“카일,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
내가 물었다. 그러자 카일은 발밑이 와르르 무너진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가, 찬찬히 입을 뗐다.
“누나가 떠나 있던 1주, 그리고 감기에 걸렸던 2주 동안 계속 생각해봤습니다.”
그래. 위대한 차이엘드 공작가에 나, 아멜리아 다이앤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고 싶겠지.
충분히 이해하는 사안이었다. 사람은 끼리끼리 뭉쳐야 행복하다는 건 대한민국에서 살 때 충분히 배웠으니.
내가 얼른 더 말하라는 듯 눈을 마주하자, 카일이 말을 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흥미인 줄 알았습니다. 누나가 특이하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알겠습니다. 저는 누나를 사랑합……”
“악!”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질러 남주의 사랑 고백을 차단했다.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니! 이건 내가 들을 말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카일. 말하지 마세요.”
“……왜입니까.”
“그게, 듣기 좀……”
온전한 사랑 고백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그에게 빠질까 봐 겁났다. 어떻게 안 빠질까. 이렇게 훌륭한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내가 격하게 고개를 젓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카일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누나. 제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듣기 싫다는 것, 맞습니까?”
그렇지! 그거야. 네가 사랑할 건 내가 아니라고.
하지만 카일은 바짝 다가와 내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곤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말 말고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겠습니다. 누나가 더 좋아하는 방법으로.”
말을 마친 카일이 넥타이를 사선으로 잡아당겨 끌러내곤, 셔츠 단추를 툭 툭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