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0화 (10/134)

#10

목 바로 아래의 단추부터 툭, 툭 카일의 손이 내려갔다. 나는 그의 양손을 기도하듯 꼭 붙잡아 그의 맨살이 더 드러나는 것을 저지했다.

……아이고, 남주야. 이런 도발적인 행동은 어디서 배워온 거니. 몸으로 말해요 아니라고!

카일과 눈을 마주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더 빠르게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왜 당연하다는 듯이 더 속도를 내는 건데! 카일은 자기 손을 덥석 붙잡아 막은 내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물었다.

“왜 막습니까, 누나.”

“잠깐, 잠깐만요. 제가 언제 카일이 벗는 걸 좋아했다고!”

“첫 만남 이후로 쭉.”

“대답 들으려고 한 질문 아니거든요!”

정곡을 찔린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혔다. 그래, 물론 보기 좋은 몸이긴 했다.

근육이 과하게 붙은 몸은 징그럽고 살이 과하게 붙은 몸은 둔해 보이기 마련인데, 카일의 몸은 그야말로 황금비율을 맞춘 듯 완벽했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불끈거리는 몸에 매혹당할 것 같아 얼굴을 바라보면 이쪽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감 뚜렷한 이목구비 중에서도 특히 눈. 눈웃음을 지을 때면 아이돌처럼 달콤하고 상큼하게 빛나는 붉은 눈에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남주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뭐 이리 완벽하냐.’

내가 어지간히도 시선을 떼지 못했는지, 카일이 말했다.

“지금도 빤히 보고 있는 것 같은데.”

“꼭 좋아해야만 빤히 보나요? 인간은 미(美)적으로 완벽한 걸 보면 시선이 끌리게 되어 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뻔뻔하게 굴었다.

그러자 카일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며 물었다.

“제가 잘생겼습니까?”

이 어이없는 질문에 내 이성보다 감성이 툭 튀어나왔다.

“하…… 그야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죠. 국보 1호로 지정한 다음 지폐에 찍어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해야 할 미모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앞면엔 얼굴 뒷면엔 복근 찍었으면 좋겠고요. 측면에 위조 방지 홀로그램으로 콧날이랑 턱선이 잘 드러나는 옆모습 하나 박았으면 해요. 살랑살랑 흔들면 화가 풀리는 마법의 돈…… 헙.”

주책맞게 나불거린 나는 이번에도 입을 틀어막았다. 카일은 큭큭 웃음을 삼키다 조용히 속삭였다.

“지폐에 찍을 생각 하지 마시고 혼자만 보십시오. 아예 갖고 싶다고 말해주면 더 좋고.”

“제가 카일을 갖고 싶어 할 것 같아요?”

장난스레 건넨 농담에 카일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던 나는 문득 원작에서 카일이 처음으로 여주인공에게 속마음을 터놓는 장면을 떠올렸다.

“아무도 괴물 공작 같은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돈이 중요할 뿐이지. 그러니 돈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건 완전히 친구 앞에서 친구네 부모님 욕한 꼴이잖아!’

아픈 곳을 건드려도 제대로 건드린 셈이었다. 아무리 내가 파멸을 피하고 싶어 카일과 거리를 두려 한다지만 이건 아니었다. 한 인간의 가장 아픈 부분을 후벼 파다니. 나는 황급히 말을 더했다.

“장난해요? 누구라도 갖고 싶어 할 거예요.”

“……사교계를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사교계를 아느냐, 모르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카일은 거울도 안 보고 살아요? 늙은 여우 같은 귀족들이라면 모를까, 어린 영애들이라면 한 번 웃어주는 걸로 삼 일을 앓게 할 수 있을걸요?”

“…….”

“카일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도 분명 있어요. 이렇게 예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는 상반신을 반쯤 돌려 거울을 가리켰다. 그러나 다시 돌아봤을 때, 카일은 거울에 관심을 보이는 대신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꽃망울이 톡톡 터지는 듯한 미소였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고액지폐에 카일 얼굴을 찍자는 얘기였어요.”

“제가 갖고 싶습니까?”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한 나는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자책골에 가까운 변명을 시작했다.

“저, 저는 어린 영애가 아니죠. 카일도 알잖아요? 제가 귀족 영애들의 결혼 적령기를 한참 넘긴 나이라는 거.”

“그런 건 차이엘드에 별로 문제가 안 되니 됐고. 전 좋아하는 걸 보면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절 독차지하고 싶습니까?”

“저는 욕심이 없는 편이라……”

“그렇습니까. 저는 누나를 독점하고 싶은데.”

훅 치고 들어오다니. 심장에 해로웠다. 순간이나마 부정맥의 기운을 느낀 것도 같다. 카일은 당황한 내 모습을 눈에 담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나를 찬찬히 관찰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카일?”

“인간은 미(美)적으로 완벽한 걸 보면 시선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새 배워서 써먹는 것 좀 보게. 이 얼굴에, 이 목소리로 달콤한 말을 늘어놓으면 누구라도 넘어가지 않고 못 배기리라.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라는 캐릭터는 차이엘드 가(家)의 후계자 경쟁에서 살아남은 남자였다.

돈을 불리는 데 필요한 두뇌는 물론이고, 사람을 포섭하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도 능했다.

특히 카일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그를 조련한 다음, 제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데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나는 당하지 않을 거지만.’

결의를 다지고 보니 카일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을 꾹꾹 눌러 참는 얼굴이었다.

“……제게 하실 말이라도?”

“하던 거 마저 할까 해서.”

“몸으로 말하는 건 그만두세요. 누가 보면 제가 그런 취향인 줄 알겠어요.”

카일은 이해했다는 듯 사르르 웃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원하시지 않으니 참겠습니다.”

영특한 것 좀 보게.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면서 사랑한다고 하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쐐기를 박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요. 그런 건 천천히 해야 하는 거라고요. 우리가 정식으로 교제하기 시작한 건 겨우 2주 전이니 지금은 너무 일러요.”

“그럼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부터 할 수 있는 겁니까?”

“글쎄요…… 10년 후?”

분명 장난스레 뱉은 말이었는데도 카일은 눈을 빛냈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계약 사항을 들었을 때처럼.

그러다 ‘방금 당신이 한 말에는 이런 뜻도 있습니다’하고 확인시켜주듯 내게 다정히 말했다.

“10년 후에도 곁에 있어 주신다는 말로 알겠습니다.”

……당했다. 이렇게 당하는 거구나.

10년 후면 이미 전쟁이 터지고도 한참 후. 그때 난 이미 튀고 카일의 곁에 없을 거다.

나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큼, 큼…… 사실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죠. 사람 사이의 관계에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게 있겠어요?”

이대로 대화를 이어나갔다간 우월한 말빨에 휘말릴 게 뻔하다.

해서, 나는 그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얼굴을 뵈어 반가웠어요, 카일. 제 감기가 옮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베풀어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주무실 겁니까?”

“밤이 늦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무언가 끈적한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카일은 순순히 수긍하곤 물러났다. 나는 목욕을 마치고 술까지 한잔해 노곤한 몸으로 그의 퇴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움직임은 곧 멈추었다.

성큼성큼 걸어서. 딱 세 발자국. 그것이 카일이 물러난 전부였다.

‘……뭐지? 왜 안 나가지? 뭘 기다리는 거야?’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카일은 호화로운 옷장에 걸려 있던 얇은 원피스를 꺼내 내밀었다.

잘 때의 편의를 위한 얇은 흰색 천이 살랑거리는 디자인이었는데, 무슨 옷감으로 만들었는지 살갗에 스칠 때마다 나쁜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옷을 받아들었다. 원래는 샤워 가운을 입고 대충 자려고 했지만, 굳이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일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깨달음을 얻은 듯 작게 입을 벌렸다.

“제가 보고 있으면 부끄럽습니까?”

“……네?”

“옷을 드려도 안 갈아입으시길래.”

“그야, 카일이 나가면 천천히 갈아입으면 되니까요.”

“밖에서 기다리면 됩니까?”

응? 기다린다고? 뭘?

“방으로 안 돌아가세요?”

“주무실 준비를 덜 하지 않았습니까. 아…….”

왜 또 이래. 나는 네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을 할 때마다 겁난다, 남주야.

“혹시, 그 상태로 주무시고 싶은 겁니까?”

나는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풀 수 있는 샤워 가운의 허리 매듭을 보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옷은 들고 있다 천천히 갈아입을…… 꺅!”

나름 침착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던 카일이 못 참겠다는 듯 나와 내가 들고 있던 옷을 들어 올렸다. 그것도 안정적이기 짝이 없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카일은 내가 무겁지 않은지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왔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먼지 한 점 없는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오르자 아까까지만 해도 코빼기도 안 보이던 여자 고용인들이 벽 뒤에 숨어 힐끔힐끔 내 쪽을 엿보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순정 만화 속 그렇고 그런 장면이라도 본 듯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아니, 지금 그런 장면이…… 맞나?

“카일, 카일!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남기고 간 쪽지에 우리가 맞지 않는다고 쓰지 않았습니까. 맞는지 안 맞는지는 많이 맞춰본 다음 판단하셔야 할 텐데.”

맞춰본다고? 아니, 이 야심한 밤에 맞춰본다면…….

“지금 어디 가는 건데요?”

“당연히 제 방.”

……방금 말이 좀 짧았던 것 같은데.

나는 정신을 부여잡고 버둥거렸지만 팔심이 워낙 좋아 흔들리지조차 않았다. 오히려 카일은 나를 놓치지 않으려 꼭 껴안았다.

‘어후, 몸이 최고…… 이게 아니지.’

“카일, 난 내가 머물던 곳이 아니면 안 잘 거예요.”

“애초에 재울 생각 없었습니다, 누나.”

눈을 마주했을 때, 카일의 눈에서는 무언가가 끓는 느낌이 났다.

아니, 끓다 못해 녹아드는 느낌이랄까.

내가 마른침을 삼키자, 카일이 제 방문을 열면서 말했다.

“제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만 참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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