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1화 (11/134)

#11

나를 안고 계단을 올라 제 방까지 왔음에도 카일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줄곧 원해오던 것을 드디어 얻을 수 있어 기쁘다는 얼굴이었다.

……세상에. 혈기왕성한 연하 남주가 몸이 달아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다니.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혀로 축이는 건 또 왜 이렇게 섹시해.

카일은 자기를 바라보는 나와 눈을 맞추다 시선을 피했다. 그 다음으론 나를 푹신하기 짝이 없는 침대 위에 내려두었다.

“누나, 잠시만.”

내가 풍기는 술 냄새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남주는 취한 듯 마른 침을 삼키다 재킷을 벗었다.

공작저에 들어선 이후로 시종일관 차분하던 모습과는 달리 다급한 손길이었다.

펄럭―

재킷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려졌다. 그러자 흰 셔츠에 갇힌 듯한 카일의 상체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

……어후야. 움직일 때마다 근육 드러나는 것 좀 봐라. 팔뚝은 아주 그냥 터질 것 같네. 무슨 놈의 셔츠 차림이 이렇게 바람직한가.

“…….”

순간적으로 파멸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 이리 와 옆에 누우라고 말할 뻔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카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방 안을 둘러봤다.

“……”

그러자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뭐랄까. 카일리안의 방을 처음 본 내 소감은 ‘넓다’가 아니라 ‘휑하다’였다.

공간 자체가 넓은 탓도 있겠지만, 가구나 장식품이 제법 있는데도 어딘가 싸늘한 인상이었다.

방이 다이앤 백작저의 한 층보다 넓고 쾌적한데도.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창밖으로 어둠과 조화를 이루는 화려한 야경이 펼쳐져 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면 차이엘드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 군락을 이룬다.

그런데 왜일까? 침대에 눕는 순간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바로 앞에 카일리안 차이엘드라는 사람이 있는데도 말이다.

쓸쓸함. 고독함. 그리고 외로움.

차이엘드 공작이라는 직위를 물려받은 후, 아니, 그 전부터 카일은 이런 기분을 느끼며 잠들었던 걸까?

‘……안 돼. 함부로 남을 동정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티 내지 말자.’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먼 잠옷 원피스만 만지작거릴 때, 카일이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저를 동정하시는 겁니까?”

“…….”

기분 나빠하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카일은 무릎걸음으로 침대에 올라와 내 얼굴선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동정도 정이니 다 제게 주십시오.”

“네?”

“아멜리아. 당신을 원합니다. 몸과 마음, 사사로운 정까지. 당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모두 다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

“…….”

“그리고 전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이쿠. 이 위험한 대사는 뭘까.

나는 미약에 홀린 듯, 잡아먹을 듯 나를 보는 카일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동정도 정이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그가 조금은 가엾게 느껴졌다.

게다가, 말은 당장이라도 덮칠 것처럼 해 놓고 허락을 기다릴 건 또 뭔가. 귀엽게.

카일의 매서운 눈이 무섭긴 했지만, 본능적으로 여기서 밀리면 앞으로도 쭉 주도권 잡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라도 카일을 저지시킬 방안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할 수 있어. 어렸을 때 게임기로 애완동물 많이 길러 봤잖아. ’

카일은 사람이지만, 동물을 길들이는 방법은 사람이든, 맹수든, 햄스터든 다 비슷하니.

나는 잠옷 원피스를 들어 올리며 나른하고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일. 잠깐 뒤돌아 있어요. 옷 갈아입게.”

“……!”

“뒤돌아보면 뛰쳐나갈 거예요.”

물론 당신이라면 내가 못 뛰쳐나가게 막을 수도 있겠지만.

카일은 순순히 뒤돌았다. 나는 재빨리 샤워 가운을 벗어 던지고 잠옷용 원피스를 입었다. 디자인이 생각보다 더 야했다.

쥐뿔도 없는 내가 다 가진 남주를 조련하려면,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쥐고 흔드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게 뭐겠어? 바로 나지.’

나는 머리를 손으로 빗어 섹시하게 흩트린 다음,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그를 불렀다.

“카일.”

“…….”

눈빛이 맛이 갔네. 어머, 이렇게 빨리 올라탈 줄이야.

나는 넥타이와 셔츠를 마저 벗어 카펫 위로 던져버리는 남주를 겨우 진정시키곤 말했다.

“우리가 사귈 때 지킬 규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눈 맞을 때마다 입 맞추고 껴안으면 긴장감이 없잖아요?”

“규칙이 없는 쪽이 더 나은 것 같은데.”

목소리 달라지는 것 좀 보게. 섹시하긴 한데, 좀 무서웠다.

나는 손끝으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려 카일을 눕게 했다. 그리곤 날렵한 턱선을 찬찬히 쓰다듬다 툭 내뱉었다.

“누나가 키스해줄까?”

“……!”

“물론 규칙을 똑바로 정하면…… 읍.”

아닌 게 아니라, 카일은 꽤 목말라 있었다.

판단을 내릴 때면 그토록 냉철하던 그가 규칙이고 뭐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듯 다급하게 입술을 맞물었다.

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다음, 제 입안으로 빨아들여 찬찬히 핥다 혀를 미끄러트렸다.

입술을 꼭 다물고 있자, 얼른 더 허락해달라는 듯 으르렁대는 게 무척 관능적이었다.

“누나. 조금만 더 허락해주면 안 됩니까?”

카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을 반쯤 벌린 나는 그의 키스에 응하며 새카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차분한 편인 그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내릴 때마다 키스가 더 격해졌다.

숨이 점점 가빴지만, 카일은 더 집요히 말캉한 살결을 탐할 뿐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밭은 숨을 몰아쉬려 할 때야 카일은 길게 늘어지는 타액을 손등으로 훔쳤다.

“……더 하고 싶은데.”

“하아…… 카일, 잠깐만.”

남자 주인공 버프를 받은 카일의 키스는 기분이 좋다 못해 황홀했다. 몸이 붕 떴다 가라앉는 기분.

겨우 달아오른 것을 진정시킨 나는 카일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아채 다시 제 몸쪽으로 끌어다 놓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는 그를 가라앉히려 토닥거렸으나 어째 가라앉긴커녕 더 애타 하는 것 같아 관두었다.

……그래. 지금 하려던 건 이게 아니지.

“카일. 앞으로 뭔가를 할 땐 허락을 받고, 제가 셋을 센 다음 해줬으면 좋겠어요.”

“싫습니다.”

순간 단호해서 할 말을 잃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떡하지? 싫으면 누나랑 연애 못 하는데.”

“……아멜리아. 당신 진짜 사람 미치게 해.”

남주야. 말투에 일관성을 가져 줬으면 좋겠구나. 누나 심장이 가루가 되는 줄 알았잖니.

탄탄한 상반신 드러내 놓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그런 말을 하면 자꾸 본분을 잊게 된단다.

내가 감히 대 차이엘드의 공작에게 이런 딜을 하고 있다는 게 웃기지도 않지만, 아무튼 나는 파멸 남주와 더 가까워질 생각이 없다.

몸으로 쌓은 정도 무시 못 한다는데, 이 이상 살갗 비볐다가 정말 정들라.

“……셋은 왜 세는 겁니까?”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카일이 물었다.

당연히 무차별적인 스킨쉽을 막으려는 뜻이었지만, 그대로 말했다간 카일의 정색을 마주하게 될까 봐 겁났다.

“당연히 긴장감 때문이죠. 연애할 때는 긴장감이 제일 중요하댔어요.”

“……긴장감?”

그딴 건 개나 줘버리라는 말투로 말하지 말고!

나는 연애경험이 전무한 남주에게 마치 ‘긴장감’이야말로 연애의 꽃이라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네. 긴장감.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기대하는 거죠. 재미있잖아요? 두근거리고.”

“두근거리는 걸 원하신다면 다른 격한 방법도 많습니다.”

“음…… 일상에서 두근거리고 싶어요.”

빚더미 백작 영애가 이만큼이나 바라는 게 많으면 순순히 내치고 다른 여자 알아보는 게 순리이건만.

왜인지 카일은 진지하게 내 제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제 혀를 짓씹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건 내가 못 본 척하면 되는 거다.

“언제까지 고민할 거예요, 카일?”

“쓰다듬어 주시면 머리가 빨리 돌아갈 것 같은데.”

시커먼 속이 훤히 보였지만, 나는 순순히 손길을 내주었다. 조각 같은 얼굴을 쓰다듬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한참 후, 나른한 손길을 느낀 카일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마음에 안 들지만, 셋 셀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니까.”

“고마워요.”

오케이.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났다.

천하의 차이엘드 공작이 한번 뱉은 말을 손바닥 뒤집듯 번복하지는 않으리라.

내가 여유를 부리려는 찰나, 카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요구사항을 덧붙였다.

“……키스 정도는 셋 안 세고 하면 안 됩니까?”

“안 돼요. 그게 두근거림의 꽃인데.”

“그럼 껴안는 건?”

“그 정도는 뭐……”

대답을 뱉은 순간 아차 싶었다. 카일은 처음부터 허락 없는 키스가 아니라, 허락 없는 포옹을 원하고 있었다.

씩 올라가는 입꼬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제길. 큰 걸 원하는 척하면서 그 절반인 본론만 가져가다니. 과연 대부호다운 협상력이었다.

목적에 충실한 팔이 내게 뻗쳐왔다. 나는 단단한 품에 안긴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품에 안고도 모자란지 카일은 또다시 불만스러운 것을 말했다.

“그런데, 왜 셋을 세는 건 누나입니까?”

“제가 뭔가를 원할 땐 카일이 세는 거예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카일도 그 사실을 아는지 뚱한 얼굴을 했다.

이제 남은 건 규칙이 실전에서도 잘 통하는지 확인하는 연습뿐이었다. 나는 제법 뿌듯함을 느끼며 카일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 말했다.

“우선 연습부터 할까요?”

“……유예기간도 없이 바로 시작하는 겁니까?”

그럼, 당연하지. 네가 지금 뭘 하고 싶은지 아는데.

나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연습이니까 가볍게. 어떤 행동으로 예를 들어볼래요?”

“지금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묻는 겁니까?”

카일이 금방이라도 덮칠 듯 눈을 어둡게 빛내다가, 제 몸으로 나를 반쯤 가두곤 말을 이었다.

“안고 싶습니다. 울기 직전까지 짓궂게 괴롭힌 다음, 제 이름 부르라고 하고 싶고.”

이런 미친.

“누나. 이렇게 말하면 되는 겁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