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래, 이건 연습이다. 이건 연습이다.
예상보다 많이 직설적이긴 하지만, 아무튼 카일이 나를 원할 거라곤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잘했다고 말하듯 고개를 끄덕이곤 아슬아슬한 목소리를 냈다.
“이제 셋까지 센 다음 하는 거예요. 알았죠?”
카일은 내가 말했던 ‘긴장감’이라는 것을 느끼는지 얼굴에 점점 여유가 없어졌다.
나는 놀리듯 베개를 베고,
“하나.”
장난스레 눈을 감은 다음,
“둘……”
그대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셋’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카일은 살기라는 것을 풀풀 풍기기 시작했다.
‘……슬슬 보복이 두려운데. 너무 가지고 놀았나?’
내가 한쪽 눈을 뜨고 슬쩍 눈치를 보자, 카일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찬찬히 곱씹기 시작했다.
뭐겠니. 너 지금 낚인 거야.
“……‘셋’은 안 할 겁니까?”
“미안, 카일. 오늘은 피곤해요.”
내가 능청을 떨며 눈을 감자 카일은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내 옆에 누웠다.
마주 보고 누워 있으니 그의 잘난 외모가 한층 더 부각 되어 보였다.
내 등 뒤의 창문에서 퍼져 나오는 달빛이 죄다 이 남자의 후광으로 쓰이는 것 같다.
“눈빛은 누나도 원하는 것 같은데.”
뜨끔한 나는 시선 처리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술도 드셨습니까?”
차마 목욕 끝나고 생각나서 한잔했다고는 말 못 하겠다.
나는 작전을 바꿔 ‘정말 미안해 죽겠어, 자기’하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눈썹을 늘어뜨린 다음, 눈웃음을 지으며 눈물을 글썽거리기.
“……참으라는 겁니까, 말라는 겁니까?”
역효과만 났군.
“음…… 카일이 알아챈 대로 제가 술을 마셔서. 술기운에 하긴 싫어요. 추한 모습 보이면 어떡해요?”
“처음 만난 날 누나가 절 호텔로 데려갈 땐 지금보다 더 취해 있었습니다. 계속 매달리면서 이것저것 해달라고 조르는 게 예쁘기만 했고.”
“어흐흑……”
말 예쁘게 하는 것 좀 보게!
심장에 통증을 느낀 나는 이번에도 나약한 의지력을 보이고야 말았다. 한 번쯤은 만행을 저질러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내가 질끈 감았던 눈을 막 떴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선명히 들려와 카일과 나는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용인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기억은 없으니 급한 일이 생긴 것이리라.
방문객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던 중, 뒤이어 익숙한 하일드 집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 전하. 늦은 밤 죄송합니다. 방금 도착한 전보에 대해 알려드려야 할 듯하여.”
“무슨 일입니까.”
“그것이……”
집사장은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카일은 그 떨림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듯 가까이했던 몸을 서서히 뒤로 뺐다.
“클레어 님께서 귀국하신답니다.”
멈칫. 하일드 집사님의 목소리에 카일이 굳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안달을 내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나는 카일의 반응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클레어 차이엘드. 차이엘드 집안의 살아남은 딸.
그녀가 카일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
클레어 차이엘드.
내가 빙의한 소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에서 그녀의 포지션은 애매하다.
악역이라고 하자니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지만, 그 행위가 칭찬받을 만한 것은 못 된달까.
확실한 건, 카일은 그녀를 ‘괴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카일리안의 아버지, 선대 차이엘드 공작은 혼외자식이 몇 명 있었는데, 클레어 또한 본부인이 아닌 하녀 소생의 맏딸이었다.
하지만 차이엘드 공작은 클레어를 내다 버리지 못했다.
묘사에 따르면, 클레어가 차이엘드 공작가의 외모적 특성을 너무 뚜렷하게 물려받은 탓에 버리기 곤란했단다.
‘어머니인 하녀는 곧장 내쫓겼다고 했지. 클레어를 가문에 둔 것도 가문의 명예와 이미지를 생각한 조치였을 거고.’
클레어는 공작저의 가장 은밀한 방에 가두다시피 해서 길러졌다.
따라서 카일을 비롯해 나중에 태어난 정실부인의 아들들은 자신에게 클레어라는 누나가 있는 줄도 몰랐으며, 어쩌다 공작저에서 마주쳐도 하녀의 딸인 줄 알았다고 한다.
클레어와 딱 열 살 차이인 카일 또한 그녀에 대해 별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카일의 아버지, 차이엘드 공작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신이 차이엘드의 위대한 부와 명예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라. 짐승은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지.”
‘짐승’이라는 말은 차이엘드의 문양, 붉은 방패 위의 두 마리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아들들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꽤 순진한 편이었던 것일까. 카일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매정한 말들을 듣고 자란 형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려 했다.
하지만 형들은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막내를 가장 먼저 제거하려 들었다.
누가 누구를 해치려 들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나날 속, 카일의 열일곱 번째 생일에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차이엘드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던 첫째 아들, 장남이 사고로 죽은 것이다.
공작저의 계단에서 구른 것이 원인이라고 나오긴 하지만…… 책 속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 확신했다.
계승권을 두고 다투던 형제들 중 누군가가 죽인 것이라고.
고작 열일곱에 현실을 직시한 카일은 이후 1년간 지독한 공포와 암살 가능성 때문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의 열여덟 번째 생일.
카일의 인생에 지우지 못할 깊은 상처가 생긴다.
카일이 가장 신뢰하던 둘째 형이 단검을 들고 찾아와 카일을 친히 찔러 죽이려 한 것이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건, 카일이 싸움을 꽤 한다는 사실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일도, 둘째 형도 죽지 않았다. 대신 접전의 결과로 카일은 골반 부근에 깊은 상처를 얻었고, 이후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가 살해당하기보단 스스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했을 때, 은은한 등불과 따뜻한 수프를 들고 찾아온 여인이 있었으니.
“도련님. 시장하시죠?”
하녀 연기를 하며 들어온 그녀가 바로 클레어 차이엘드였다.
클레어는 마치 카일을 아끼는 유모처럼 친근하고 부드럽게 다가가 그의 경계를 풀었다.
수프에 독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 먼저 먹어보는 친절까지 베풀면서.
죽어가던 카일은 제가 떠먹는 것이 자신의 눈물인지 수프인지도 모른 채로 허겁지겁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그때, 클레어가 은밀한 제안을 건넸다.
“도련님. 차이엘드를 위해서는 도련님이 살아남으셔야 해요. 원하신다면 제가 돕겠어요.”
“당신이 왜……”
“차이엘드를 위해서.”
연기에 재능이 충만한 클레어 차이엘드는 안 그래도 정신이 무너져 있던 카일에게 한 줄기 빛인 척 다가갔다.
이미 형이 휘두른 단검에 베인 상황.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선택지가 없던 카일에게 클레어는 마치 모두 대의를 위한 일이라는 듯 속삭인다.
“공작이 되신 다음에도 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도련님. 그럼 제가 모든 일을 끝낼 테니.”
나는 카일을 이해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니까.
형을 죽이는 방법으로 살아남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떨치고 싶었을 것이다.
해서 카일은 클레어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날, 차이엘드 공작가의 후계자가 정해진다.
암살 둘에 사고사 하나.
평생을 공작저에만 갇혀 지낸 클레어는 공작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가 어느 때에 무엇을 하는지를 꿰고 있었을 테니 그녀에겐 쉬운 일이었다.
다음 날, 카일의 아버지인 차이엘드 공작마저 지병으로 사망한다. 마치 미리 맞춘 듯한 타이밍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클레어는 자신을 감금에 가깝게 가둬 기른 아버지가 자연스레 죽을 때만을 칼을 갈고 기다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가 계획했던 대로, 사람들은 줄초상의 원인을 카일리안이라고 생각했다. 막대한 부와 공작이라는 명예를 이어받게 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카일은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형제들과 아버지의 합동 장례식 마지막 날, 클레어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
그녀가 했던 말, ‘차이엘드를 위하여’가 사실 ‘클레어 차이엘드를 위하여’였다는 진실을 깨닫고 카일은 절망한다.
어쨌건 자신은 살인을 묵인한 괴물 공작이 되었으니.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후계자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여린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카일은 그녀에게 다가가 묻는다.
“클레어, 대체 무얼 바라고……”
그 질문을 들은 클레어는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명대사로 길이길이 기억되는 한 마디를 툭 내뱉는다.
“난 자유를 원해.”
크으으.
나는 이 대사 때문에 클레어라는 캐릭터를 좋아했다. 카일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클레어가 내 최애였다.
***
“누나. 제가 앞에 있는데 다른 생각이 듭니까?”
한층 차분한 얼굴로 침대에 마주 누워 있던 카일이 뚱한 얼굴을 하며 나를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카일.”
다른 생각을 해도 너무 잘하고 있어서.
클레어의 귀국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일은 티 내지 않았지만 정신적 충격이 큰 듯했다.
두렵기도 할 것이다. 클레어가 오는 순간 자연스레 과거의 일이 떠오를 테니.
카일이 클레어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자신을 괴물로 만든 행위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가 반, 그리고 가족을 말살시키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녀에 대한 두려움과 경멸이 반 정도일 것이다.
‘바다 건너 제국을 여행하다 귀환이라니. 예상치 못한 등장인데.’
카일과 클레어의 재회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카일은 공작 자리를 계승한 후에도 클레어를 내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 때문에 차이엘드의 고용인들과 다른 가문의 귀족들도 암묵적으로 클레어를 이 집안의 정식적인 자녀로 인정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차이엘드 사람답게 서류 처리나 돈 불리기에 능했고, 카일도 필요할 때면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고 클레어를 이용했다.
둘의 관계는 남남보다도 비즈니스적이었으며 클레어 또한 카일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어렵다. 어려워. 그나저나…… 아무리 남주라고는 하지만 과거가 너무 딱하다.’
동정도 사양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조금만 달래줘야겠어. 딱 오늘만.
꾸물꾸물 앞으로 이동한 나는 카일을 푹 껴안았다. 얇은 잠옷 너머로 조금 놀란 듯 굳은 신체가 느껴졌다.
“카일. 이 상처는 언제 생긴 거예요?”
나는 오늘도 상의 탈의 상태로 진득한 유혹을 보내오는 남주에게 모르는 척 물었다. 골반의 흉터. 둘째 형이 몸과 마음에 낸 깊은 상처를 쓰다듬으면서.
카일은 픽 웃곤 내가 이제껏 회상한 이야기를 덤덤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아. 짠해. 어떡하니, 우리 남주.
상처 입은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앓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다. 하지만 카일은 털어냈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아멜리아 다이앤. 당신이 곁에 있어 줘서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
내가 눈에 띄게 움찔했는지, 카일은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앞으로도 계속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안 돼. 이건 누가 들어도 파멸 플래그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