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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3화 (13/134)

#13

날이 밝자마자 나는 준비를 마쳤다.

무슨 준비냐고? 당연히 튈 준비지.

“……앞으로도 계속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곱씹어도, 어제 카일이 한 말은 가볍게 넘길 수가 없다.

누가 들어도 영혼의 반쪽에게나 할 말이잖아!

약 한 달 동안 공작저에 머물며 카일의 스케줄을 대충 파악해둔 나였다.

카일은 일주일을 거의 같은 패턴으로 반복한다. 특별한 일이 생기면 아침 식사를 할 때 하일드가 언급하니 그가 어디 있을지 예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카일은 차이엘드 가의 대대적인 회의 때문에 공작저에 없다.

‘오케이. 지금이 도망갈 타이밍이다.’

공작저의 주요 인력들이 카일을 따라나섰으니 나를 막을 자 아무도 없다.

저번 도주에서 교훈을 얻은 나는 알차게 도망 짐을 꾸렸다. 일단 물이 필수고, 편한 구두를 신어야 한다.

당찬 걸음으로 공작저의 문을 향해 걸어가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마치 근위병을 연상시키는 차이엘드 가의 경호원들이 나를 막아선 것이다.

“누나 님. 어디 가십니까.”

중요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차이엘드를 지키는 사병(私兵) 수준의 경호원들. 그리고 공국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

물론 차이엘드는 공국의 수장이기도 했으니 병사가 저택을 지키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지금 내 상황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이앤 백작저에 가요. 감기가 나았으니 돌아가 보는 게 좋을 듯하여.”

도도하게 말한 나는 그들에게 물러나 달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오직 차이엘드의 명만을 듣는 이들이 내 허세를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하긴. 쥐뿔도 없는 내 명을 들어서 뭐해. 주인님께 혼날 게 뻔한데.

해서, 나는 노선을 변경하기로 했다.

“산책을 못 해서 쓰러질 것 같네. 내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카일이 참 슬퍼할 텐데.”

카일에게 도망가려는 주제에 카일을 팔아먹는 건 좀 찔리지만, 일단 도망은 가야 했다.

나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시름시름 앓는 연기를 했다. 곧, 경호원들이 쭈뼛 물러났다.

‘……좋았어. 야비하지만 이대로 간다.’

문 쪽으로 다가서자 경호원들은 깍듯이 문을 열어주었다.

산책을 나가는 척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걸으니 그들도 무서운 기세로 나를 뒤따랐다. 나는 불쾌한 티를 팍팍 내며 쏘아붙였다.

“계속 따라오실 건가요? 산책에 방해가 되는데.”

“산책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누나 님.”

이 공작저 분들은 정말 내 성이 ‘누나’인 걸로 알고 계시나.

“그럼 멀리 떨어져서 걸어주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의 단호한 태도에 찔린 나는 자격지심이라는 것을 발휘하고야 말았다.

“왜죠? 내가 도망이라도 갈 것 같나요?”

“…….”

경호원들은 말없이 내가 메고 있던 빵빵한 가방을 가리켰다. 생수와, 비상식량과 지도 및 나침반이 비죽 삐져나온 가방을.

“큼…… 공작저의 정원을 구경하려고 했어요. 이것들은 공작저가 하도 넓으니까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챙긴 거고.”

나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느릿느릿 정원을 거닐었다. 그러자 따라오던 엘리트 경호원들이 눈을 반짝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누나 님. 곧 공작 부인이 되실 테니 미리 구조를 익혀두십시오.”

“공, 공작 부인이요?”

내 반사적인 물음에 경호원들은 줄줄이 읊었다.

“공작 전하께서 분명 미래의 공작 부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소중한 여인이니, 작은 상처라도 나면 저희의 목을 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이러면 내일모레 결혼할 것 같잖아!

“언, 언제 그런 말을 하셨어요?”

“누나 님이 공작저에 들어오신 그날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쭉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악!”

이럴 수는 없다. 내가 파멸의 씨앗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망, 도망만이 살길이다. 정 털게 만들어야 해……!

나는 더 이상 뜸 들일 것도 없이 빛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쫄딱 망하긴 했지만 아멜리아는 총기사단장의 딸. 이 정도 달리기는 거뜬했다.

가방까지 포기해 가며 이를 악물고 달린 끝에 공작저와 바깥의 경계인 담벼락이 보였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 무협지 뺨치는 점프를 한 나는 겨우 그곳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누나 님! 위험합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파멸 남주가 사는 공작저가 더 위험하거든요!

경호원들은 나를 따라 담벼락에 올라오려 했다. 그들은 농구선수만큼이나 키가 큰 자들이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쉬울 거다.

다급해진 나는 담벼락에 아슬아슬하게 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제 일인 양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누나 님! 뛰어내리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뒤로 떨어지십시오! 저희가 받겠습니다!”

“다른 남자가 제 몸에 손댔다고 하면 카일 눈이 뒤집어질 텐데도요?”

“아, 그건…….”

카일이 무섭긴 한가 보다. 순식간에 찬물을 퍼부은 것처럼 분위기가 싸해지네.

공작저를 등지고 앞을 바라보자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원래 이렇게 높았나?

저번에 넘은 담은 바로 앞이 푹신한 잔디밭이었는데, 여긴 마차가 다니는 길인지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누나 님! 바람이 거셉니다! 제발 내려오십시오!”

“그건 싫…… 꺅!”

나는 균형을 잃었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대학 교양체육 시간에 배운 유도 낙법 같은 건 다 쓸모없었구나.

어떻게든 머리는 박지 않으려 머리를 꼭 감싸자 세상이 빙글 돌았다.

파멸 엔딩도, 병사도 아닌 추락으로 죽겠구나, 할 즈음.

“어머, 귀여워라.”

무척 섹시한 여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내가 늘씬한 품에 안긴 것도 같다.

어떤 은혜로운 분께서 나를 받아주신 게 틀림없었다.

‘어디…… 응? 외모가 왜 이렇게 익숙해?’

붉은 눈. 허리 아래까지 찰랑이는 새카만 생머리.

제국에서 흔히 보이지 않는 고혹적인 디자인의 드레스와 새빨간 입술의 미인. 게다가 왼쪽 귀에만 찬 진주 귀걸이까지.

“누군진 모르겠지만 귀엽네. 언니랑 놀다 갈래?”

클레어 차이엘드, 내 최애가 나를 안고 있었다.

곧고 날렵한 콧등, 한 올 한 올 신이 그려낸 듯 뚜렷하고 수려한 눈썹. 풍성한 속눈썹 아래의 깊은 붉은 눈. 새빨간 입술과 같은 색으로 칠한 손톱.

클레어가 머리를 우아하게 쓸어넘기며 나를 보는 순간, 내 입에서는 맥 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니…… 예뻐요.”

클레어는 픽 웃으며 자기도 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어떡해. 나 치인 것 같아.

나는 공작저 탈출이라는 원래 목적을 완전히 잊은 채로 눈앞의 여신님을 바라봤다.

반대편 벽에 있던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전까지는.

그들은 나를 보고 ‘잡았다, 요놈!’ 하는 얼굴을 했다가, 안주인 격인 클레어 차이엘드를 발견하곤 귀신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클레어는 그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도도한 시선만을 내주며 물었다.

“이 귀여운 숙녀분은 누구?”

“아, 저는 그냥 지나가던……”

내가 자기소개를 하려 하자 경호원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아멜리아 다이앤. 공작 전하께서 미래의 공작 부인이라 칭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은 정식 교제 중입니다.”

뭐야. 이분들…… 내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잖아? 공작저 사람들이 단체로 날 놀리나?!

경호원들의 대답을 들은 클레어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무얼 들었는지 되새기는 듯했다.

그러다 감정이라곤 담기지 않은 냉철한 눈으로 나를 하나하나 뜯어봤다.

설마 내가 카일의 애인이라는 말을 듣고 나를 해치진 않겠지?

하지만 클레어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공작 전하께서 왜 들였는지 알 것 같네.”

“……네?”

“귀여워. 청순하고. 그런데 눈빛이 야해. 잘 꾸며놓으면 엄청 섹시하겠어.”

클레어는 나를 향해 고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클레어야. 클레어 차이엘드. 아멜리아, 언니랑 놀다 가라, 응?”

심장이 아프다. 이 집안사람들은 왜 이렇게 눈웃음이 예쁜 걸까.

클레어에게 손을 붙잡힌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카일. 카일에게서 도망쳐야 하는데…….

“싫니?”

“…….”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자신의 배다른 남동생들을 담백하게 처리한 장본인이 바로 이 언니 아닌가!

일단 목숨부터 부지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까르르 웃으며 마냥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클레어는 공작저의 후미진 구석에 있는 별궁으로 나를 안내했다. 아버지와 동생들을 죽인 후 클레어는 별궁 하나를 자신의 영역으로 사용하는 듯했다.

나는 혹여나 클레어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입꼬리를 올려 보인 채로 싹싹하게 말을 붙였다.

“그럼 레이디 클레어께선 바다 건너 트라이하 제국에서 방금 돌아오신 거예요?”

“응. 난 여행하는 게 좋거든. 내키는 대로 돌아다닐 때만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좋아.”

클레어는 자신의 짐을 풀고 있는 하녀들에게 다과를 부탁하곤 내게 권했다.

“마셔 봐. 트라이하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게에서 블랜딩한 찻잎이야.”

……이거 마시면 갑자기 쓰러지는 거 아니겠지?

어색하게 웃은 나는 차를 조금 홀짝였다. 그런데.

“우와. 홍차에서 딸기 향이 나네요? 향긋해요!”

“괜찮지?”

클레어가 사르르 웃었다. 뭐지?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클레어라고 하면 걸크러쉬를 유발하는 쎈언니의 정석이다.

‘이런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이미지가 아니라고!’

게다가, 긴 대화 내내 클레어는 카일의 손님인 나를 전혀 거리낌 없이 대했다.

“아멜, 네가 있으니까 좋다. 사실 혼자 있는 게 싫어서 공작저로 돌아오는 게 좀 꺼려졌거든.”

“아하하…… 네?!”

좋다고? 내가 있는 게?

“늘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는데.”

그 외에도 클레어는 ‘원래 그렇게 귀엽게 먹니?’라든가, ‘앞으로도 종종 놀러 올래?’ 등등의 말로 내 심장을 두들겨 팼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레어에게 예쁨 받고 있다. 순간, 내 머릿속에 기가 막힌 작전이 떠올랐다.

일명 ‘내가 좋아? 쟤가 좋아?’ 작전.

카일은 자신을 이용하고 결국 괴물 소리를 듣게 한 클레어를 싫어한다.

냉철한 그에게 클레어는 약점이자, 살인을 암묵적으로 허락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일 테니.

클레어는 자신이 카일을 이용했다는 자각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차이엘드 공작’이라는 명예를 물려받은 카일이 당연히 견뎌야 할 무게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카일이 손을 더럽히지 않고 후계자가 된 것은 자신이 손을 대신 더럽힌 덕이니.

즉, 둘은 서로를 무척 꺼린다.

그런데, 내가 클레어와 어울리는 모습을 카일이 본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정을 털 수 있을 거다. 쓰레기 같은 생각이지만 확실해.

회심의 미소를 지은 나는 최선을 다해 클레어와 어울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클레어는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며 나를 드레스룸으로 데려가 인형놀이 하듯 치장시키기 시작했다.

“이건 정열의 도시 마드리디안에서 최신 유행하는 드레스야. 너 줄게.”

“이, 이걸요?”

나는 두 가지 포인트에서 놀랐다. 하나는 클레어가 내게 내민 검은색 드레스가 무척 비싸 보였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어때, 섹시하지?”

그래. 너무 섹시해서 문제였다.

선물을 받았으니 입어 보는 것이 예의인지라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입긴 했는데…… 어후.

“요즘 마드리디안에서는 이렇게 안이 비치는 소재의 이브닝 드레스가 유행이래. ‘시스루’라고 한다나?”

클레어가 내게 준 검은 드레스는 어디 하나 안 달라붙는 곳이 없어 온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데다, 쇄골 부분과 팔이 시스루였다.

가슴골이 그대로 비쳐 보여 거울을 보는데도 낯이 뜨거워졌다.

분명 발목까지 덮는 길이. 그런데도 정숙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예쁘다.”

클레어는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거울을 보여주었다.

나는 거울 속의 섹시한 데다 상큼하기까지 한 묘령의 여인을 보며 감탄사를 삼켰다.

‘크으으. 기가 막힌다, 기가 막혀.’

내가 스스로의 모습에 홀딱 빠져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 거친 노크가 들리곤 뒤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옆에 있던 클레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아멜리아. 여기 계셨습니까.”

카일이었다. 무뚝뚝한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해 섬찟 소름이 돋았다.

당황한 나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을 떠올리곤 씩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

눈을 맞추자마자 카일이 인상을 구기며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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