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는 카일이 문을 쿵 닫고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이나 응시했다.
‘어떡해. 화났나?’
언뜻 본 얼굴이 붉어진 것도 같다. 아니, 분명히 붉었다.
얼마나 열 받았으면 그 짧은 시간에 얼굴이 그만큼 끓을 수 있는 거지?
카일의 차가운 목소리를 상기하고서야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차츰 깨달았다.
카일이 형제들끼리의 계승권 다툼과 클레어에 대해 내게 털어놓은 것이 겨우 어젯밤이었다.
아무리 냉혈한에 전쟁을 일으킬 파멸 남주라고 해도, 카일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란 듯 클레어와 어울리고 있는 것을 본 순간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일은 사과해야 한다는 결론만 나왔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키곤 클레어에게 꾸벅 인사했다.
“죄송해요, 레이디 클레어. 전……”
“공작 전하 표정이 안 좋으시던데. 얼른 가봐, 아멜. 나한텐 다음에 또 놀러 오고.”
조심히 인사한 나는 별궁을 빠져나와 공작저의 본궁까지 전력 질주했다.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런 유치한 짓을 했을까?
숨이 차는 줄도 모르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할 찰나, 격한 움직임을 견디지 못한 드레스 밑단이 찢어졌다.
예쁜 드레스를 선물해준 클레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쨌든 뛰기는 더 편해졌다.
한참을 달린 끝에 나는 겨우 카일의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에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창밖을 내다보는 카일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쓸쓸해 보이는 그를 곧장 끌어안고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숨을 헉헉거려서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일까. 카일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카일리안. 내 생각이 짧았어요. 당신 상처를 들쑤셔서 미안해요.”
분명 상처를 받은 건 카일일 텐데 어째서인지 내가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문지르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카일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듯한 한숨을 쉬었다.
“……키스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카일이 평소처럼 휙 뒤돌지 않아서 나는 더 조바심을 느꼈다.
“알았어요. 허락해 줄래요?”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카일은 머리가 아픈 사람처럼 또 한 번 한숨을 쉬고는 입을 뗐다.
“하나, 둘……”
그리고 차츰 뒤돌아 나를 마주했다.
“셋.”
우울하긴커녕 내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카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를 관찰했다.
눈물 자국? 우울해한 흔적? 그딴 거 없었다.
오히려 카일은 평소보다 더 치장한 나를 보고 침을 삼켰다.
……침을 삼켜?!
“카일…… 화난 거 아니에요?”
“다른 남자가 지금 모습을 눈에 담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화가 나긴 납니다.”
“상, 상처받은 건요?”
“제가 상처를 왜 받습니까?”
카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삽질한 거구나. 내가 삽질했어. 그 와중에 안도감이 드는 건 왜일까.
“다행이다. 전 저 때문에 카일이 상처받은 줄 알고……”
내뱉고 아차 싶었다. 내가 이 말을 왜 했을까. 분명 불이 꺼져 어두운 실내인데도 카일의 눈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설마 레이디 클레어와 함께 있는 걸 보고 제가 상처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달려온 겁니까?”
레이디 클레어라니. 가족이 아니라 생판 남이 부르는 호칭이네.
카일은 찢어진 드레스 밑단과 아직 헉헉거리는 내 숨을 보고 금방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내 허리를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제게서 도망가고 싶어 하시면서 왜 자꾸 반대로 행동하십니까.”
……내가 도망가고 싶어 하는 티를 많이 냈나?
“레이디 클레어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덕분에 제가 공작저에 없는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상처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 남주.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는구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정신력이 강하기도 하고.
……근데 왜 나를 안 놓아주니.
카일은 나를 조심히 안아 창틀에 앉혔다. 그리곤 찬찬히 구두를 벗겼다. 어쩐지 따끔하다 싶어 봤더니만 웬걸, 뒤꿈치가 다 까져 피가 나고 있었다.
클레어가 선물해준 드레스는 허벅지 경계까지 아슬아슬 찢겨 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리도 급히 뛰어온 것인가.
카일은 높은 창틀에 날 앉힌 다음 자기보다 높이 있는 내 얼굴을 홀린 듯 바라봤다.
나를 원해 미치겠다는 얼굴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가 손끝으로 내 발등부터 드러난 허벅지까지를 찬찬히 쓸어올리며 말했다.
“누나가 그녀에게 선물 받은 옷을 입고 있는 게 싫습니다.”
“……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찌이익―
내가 대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천이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단단히 감싼 감각이 조금씩 느슨해졌기에, 그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움찔 놀란 나는 겨우 단호한 목소리를 짜냈다.
“카일, 안 돼요. 이건 선물 받은 거라고요.”
“어차피 망가진 드레스인 데다 상처에 닿으면 쓰라릴 겁니다. 선물이라면 저도 준비했고. 오면서 하나쯤은 보셨을 텐데.”
“설마 그 이삿짐만큼 많은……?”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보이는 건 다 쓸어왔습니다.”
대부호인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돈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카일. 내 선물은 안 사와도 돼요.”
“……그녀의 선물은 받으면서, 제 선물은 받기 싫으신 겁니까?”
아니 이 인간아, 그게 아니잖아!
“그녀에게 선물 받은 옷을 입고 있는 게 싫습니다.”
카일은 단호한 어조로 한 번 더 말했다. 순간 시무룩해진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물었다.
“안 어울려요?”
그러자 카일은 어딘가가 아픈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곤 시선을 피했다.
“……제가 아까 왜 얼굴 붉히며 피했겠습니까.”
“네?”
“누나, 지금 보는 사람 미치게 할 만큼 섹시해.”
으르렁대듯 짐승처럼 내뱉은 카일은 내 아랫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곤 물어왔다.
“숨은 다 고르셨습니까?”
뛰어오느라 헉헉대던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지금은 괜찮았다. 호흡이 평소와 다름없었으니.
“허락은 아까 하셨고.”
“허락?”
“키스 말입니다. 저는 셋까지 똑바로 센 걸로 기억하는데.”
“카일 설마…… 내가 숨 고를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물론. 숨이 가쁜 채로 시작하면 금방 끝내야 하지 않습니까.”
카일은 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겨주며 얼굴을 코앞까지 가까이했다.
그리곤 경고하듯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오래 하려고 기다린 겁니다.”
카일은 창틀에 걸터앉은 내 무릎 사이로 바짝 몸을 밀착했고, 붉은 눈동자로 나를 홀렸다.
맨 등에 차가운 유리가 닿자 나는 움찔하며 카일에게 몸을 기댔다.
고개를 기울인 그는 마치 어딘가 깊은 공간에 들어가기 전 노크를 하는 것처럼 짧게 키스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그의 체향이 온몸의 신경을 깨우는 듯했다.
그러자 그가 장난스러운 뽀뽀만 연달아서 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로 그의 몸을 휘감아 더 바짝 당겼다.
그리곤 차츰 맞물려오는 그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입술을 머금으며 살짝 깨물자 카일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입을 조금 벌린 그가 내 숨을 한 입씩 베어먹는 것처럼 움직이며 집요하게 입안을 헤집었다.
침범해온 그를 얕게 빨아들인 나는 다리로 그를 더 가까이 잡아당겼다.
얼마나 오랜 시간 키스를 나누었을까.
“카일리안……”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입술이 반쯤 겹쳐진 상태에서.
남자 주인공의 키스는 그야말로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아찔했고, 카일은 능숙함을 무기 삼아 하는 밀고 당기기에 능했다.
모든 요구를 채워줄 것처럼 다급하게 굴다가도, 어느 순간 뚝 물러나 애간장을 아주 그냥 활활 태워버렸다.
그뿐인가.
“이름은 나중에 불러주십시오.”
귓가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거친 숨을 흘리며 살랑살랑 나를 유혹했다.
……내가 이거에 껌뻑 죽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이.
나중에, 라니. 얼마나 길게 할 생각인 걸까.
카일은 내 등을 따라 손가락을 차츰 내리며 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손끝이 닿는 곳마다 간지러움과 전류가 흐르는 듯한 저릿함이 느껴져 뱃속이 간지러웠다.
그가 각도를 바꿔 가며 퍼붓는 키스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황홀했다.
가슴이 찌르르 울리고 기분이 이상해져 차오르는 숨을 핑계로 그만하자고 말하려 할 때면, 기가 막히게 알아채곤 가벼운 입맞춤을 이어갔다.
그러다 내가 숨을 고르면 다시 짐승처럼 입술을 삼켰다.
누군가가 마법이라도 써서 이대로 시간을 멈춰주셨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할 즈음.
카일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어갈 것만 같던 키스를 애정 가득한 한 번의 입맞춤으로 마무리했다.
……왜지? 아니, 물론 파멸 엔딩과 아주 조금 멀어졌으니 좋아하는 게 맞지만…….
“지금 한참 좋았는데 왜 멈추냐는 얼굴인 거 아십니까?”
카일은 픽 웃곤 자신이 흩트린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잘하다 멈추면 아쉬워서 어떡하라고!
금방 다시 달려들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카일은 숨을 몰아쉬는 주제에 차분한 말투로 물어왔다.
“더 원하시는 겁니까.”
“조금, 아니, 조금보단 더 많이.”
내 대답을 들은 카일은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으면서도 짓궂은 목소리를 냈다.
“아닌 것 같은데.”
“아니긴 누가……”
카일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대로 찬찬히 시선을 내린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이런 자세였을까.
나는 마치 놀이기구의 안전바를 붙잡듯 카일의 재킷을 꽉 붙잡고 있었다.
이게 벗겨지는 순간 내 목숨도 함께 날아간다는 사실을 몸이 기억하고 있던 탓일까.
얼마나 단단히 붙잡았는지 손톱이 손바닥에 자국을 냈을 정도였다.
내가 하얗게 질린 주먹에서 힘을 스르륵 빼자 카일은 조금 서글픈 얼굴을 하곤 물었다.
“누나. 저를 거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단언컨대, 네가 파멸 남주만 아니었어도 며칠 동안 방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야, 남주야.
내가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마땅한 대답을 짜내려 할 즈음, 카일은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순진하고 시무룩하게 운을 뗐다.
“혹시 첫날밤이 별로였……”
“별로였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 반박은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과거의 카일에게 사과하세요. 그렇게 끝―내주게 잘해놓고 별로였냐니. 공작 전하쯤 되시는 분이 이렇게 자신감이 없으시면 어떡해요? 전 백작저로 튀고 나서도 일주일 동안 그렇고 그런 생각만 나서 낮에도 찬물로 목욕하느라 죽는 줄 알았…… 헙.”
나는 왜 말하기 전에 생각이라는 것을 생략하는가. 카일은 나를 생각해주는 것인지 입가를 가렸지만 큭큭 웃는 게 다 들렸다. 제기랄.
“그래서 감기에 걸리셨던 겁니까?”
“…….”
“날 두고 무슨 상상을 했길래.”
목소리가 지독하게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