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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5화 (15/134)

#15

나는 괜히 옆을 노려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아, 민망해.

카일은 너덜너덜해진 드레스 위로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 주다. 그대로 나를 껴안았다.

“지금도 나쁜 생각이 듭니까.”

어떻게 안 해! 네가 이렇게 귀엽고 섹시하고 다 해 먹는데!

“……대답 안 할 거예요.”

카일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싱겁게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조심스레 안아 올리곤 침대로 향했다.

나는 재킷으로 몸을 꼭 감싸며 잘난 얼굴을 감상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어 조금 정리해주기도 했고.

그러자 대부호 공작님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얌전히 잠들기를 원하면 제 재킷만 걸치고 눈 마주하는 건 하지 마십시오.”

“어머. 제 눈빛에 뭐라도 있나요?”

“보조개가 움푹 파이도록 웃지도 마시고.”

“하지 말라는 게 왜 이렇게 많아요, 카일?”

내가 장난스레 묻자 카일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에 뭐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게 많은지.”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까진 뒤꿈치가 아프지 않게 살살 침대에 내려놓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웠다.

“대체 왜 밀어내시는…… 아.”

남주는 이번에도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얼굴을 했다.

안 돼. 내가 제일 불안해하는 게 이 얼굴이라고!

“이걸 노리고 계신 겁니까, 누나?”

카일이 조심히 손깍지를 끼며 물었다.

손깍지. 그래, 손깍지. 내가 환장하는 애정행각.

나는 얼굴을 훅 붉힌 채로 다다다다 대답했다.

“카, 카일. 물론 제가 첫날밤에 손깍지 낀 상태로는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된다고 하긴 했지만……”

“……물론 그렇게도 말씀하셨지만,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닙니다.”

카일은 단단히 맞잡은 내 왼손을 들어 약지를 지그시 바라봤다.

“좀 더 확실한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라면 진작 말씀하시지.”

“확실한 관계요?”

“내일 당장 세공 장인들을 부르겠습니다. 누나는 앉아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걸 고르기만 하십시오.”

……이 남주가 지금 볼까지 붉게 물들이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뭘 골라요?”

“약혼식에 쓰일 약혼반지 말입니다.”

카일은 심장이 멎을 정도로 행복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고르는 김에 결혼반지까지 골라두시면 더 좋고.”

***

카일은 진심이었다.

내가 아직 잠에 취해 있을 이른 아침, 카일은 차이엘드의 문양이 들어간 제복을 갖춰 입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내게 짧게 입맞췄다.

“황실 재정 문제 때문에 황궁에 다녀오겠습니다. 푹 주무시고 일어나서 마음에 드는 약혼반지를 골라두십시오. 제 선물도 둘러보시고.”

반지라는 단어에 내 잠은 홀라당 날아가 버렸지만.

“아이고야……”

내가 한숨을 내쉬며 손등을 뺨에 가져가자 하녀가 수선을 떨며 물었다.

“어머, 누나 님. 구두가 마음에 안 드세요?”

나보다 어린 듯한 하녀는 척 보기에도 고급으로 보이는 구두를 찬찬히 돌려 가며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에요. 예뻐요.”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카일이 남기고 간 엄청난 양의 선물들 계속 훑어보기 시작했다.

대체 이걸 다 사려면 돈이 얼마나 많아야 할까?

대충 셈해보건대, 내가 대학 5년 다니면서 쓴 학자금으로는 여기 있는 구두 한 켤레를 겨우 살 수 있을 것이다.

클레어의 1년 여행 기념품은 ‘와…… 가게 하나를 털어 왔나?’ 소리가 나올 정도.

그러나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선물은 ‘확실히 털었어. 골목 전체를 털었을까? 아니면 수도의 상가 전체?’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규모였다.

선물이 끝이 없다. 끝이 없는 데다 다양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가끔은……

“이, 이게 뭐예요?”

“누나 님, ‘빅토리의 비밀’ 모르세요? 수도에서 제일 알아주는 속옷 브랜드잖아요!”

야릇하기까지 하다.

무슨 놈의 슬립이 안이 다 비쳐 보이나. 부드러운 털은 왜 달린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눈웃음을 치면서 다가와 격한 키스를 퍼붓기를 즐기는 카일답게, 선물은 그야말로 뜯어보는 사람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입어달라는 건 아니겠지? 아, 설마!’

나는 민망함에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잠, 잠깐 쉬었다가 할까요?”

“알겠습니다, 누나 님.”

내가 냉수를 들이켜며 부채로 파닥파닥 얼굴을 시키자, 멀지 않은 의자에 앉아 나를 지켜보던 클레어가 픽 웃었다.

“귀엽네.”

언니. 오늘 그 말만 백 번도 넘게 하셨어요.

분명 내가 읽은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에서의 클레어는 공작저의 본궁 출입을 꺼렸다.

그런데 왜일까. 클레어는 내가 선물을 열어보기 시작할 때쯤 슬쩍 나타나 턱을 괴고 내 리액션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번 귀엽다는 말을 덧붙였다.

“레이디 클레어. 제가 귀여워요?”

내가 물었다.

보통 이런 질문을 들으면 민망해하는 것이 정석인데, 클레어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짓이 예뻐. 격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놀리고 싶고. 표정도 풍부해서 계속 봐도 안 질린다? 귀엽다는 건 이 모든 상황의 총칭이야.”

“아……”

너무 탄탄하게 설명해주시니 할 말이 없었다. 클레어는 또 한 번 치명적인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 저기 오네. 세공 장인들.”

클레어가 턱짓했다. 나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공 장인이라고 해서 사람 한둘이 오겠거니, 했건만. 웬 공구를 든 남자들이 이리도 많은가.

아무래도 카일의 선물을 뜯어보는 것보다 더 힘든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장인 정신이랄까, 자부심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무조건 자신의 디자인을 선택하게 할 것이라는 열의로 모두의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클레어가 내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손끝을 움직이자 세공 장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약혼반지의 샘플이 든 상자들을 펼쳐 보였다.

붉은 벨벳 쿠션이 깔린 나무 상자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반지들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모두 메인 보석 부분이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완성된 게 아닌가요?”

내 물음에 장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중 하나가 내게 말을 올렸다.

“가장 중요한 메인 보석을 아직 전달받지 못하였습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거요?”

내가 대꾸하자 그들은 다이아몬드를 돌멩이 취급하는 사람들처럼 픽 웃었다. 클레어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멜. 생각해 봐. 공작 전하께서 겨우 다이아몬드로 만족하시겠어?”

겨, 겨우 다이아몬드라니!

그보다 더 비싼 광물이 있나 물으려던 내 머릿속으로,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세계관 설정이 좌르륵 지나갔다.

아, 설마. 제발 그 보석만 아니어라.

그게 박힌 약혼반지를 받는다면 정말 빼도 박도 못 하고 파멸 엔딩이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메인 보석으로 ‘아레테의 결정’이 들어가는 건 아니죠?”

모든 소설이 그렇듯,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도 특유의 세계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대부분은 영국의 귀족 사회에서 영향을 받은 듯했지만, 작가가 짜낸 창작 설정도 여럿 있었다는 말이다.

가령 이능력을 사용하는 용병 집단이나 북방의 전투민족 같은 것들.

……지금 생각해보니 작가가 설정 덕후였던 것 같기도 하다. 본인 블로그에 작품에 써먹지도 못할 설정을 잔뜩 올려둔 걸로도 모자라 설정집까지 만들었다니.

‘물론 난 읽지 않았지만.’

아무튼, 소설에서 꽤 쓰이면서도 내가 인상 깊게 읽었던 설정 중 하나가 바로 ‘아레테’였다.

쉽게 생각하자면 아레테는 초능력이다. 그것도 엄청 값비싼 초능력.

이 세계에는 신이 인간에게 수여했다는 ‘아레테의 결정’이라는 보석이 극소량 존재한다.

희소한 만큼 그 가격이 매우 비싸다. 언뜻 기억하는 묘사로는 트리플 엑설런트 등급을 받은 다이아몬드보다 100배 비싸다던가.

비싼 데다 물량 자체가 워낙 적어서, 아레테의 결정은 귀족이나 황족 등 막강한 부를 지닌 자들도 쉬이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초대 차이엘드 공작도 결국 독점 매매를 포기했다고 했지.’

게다가, 아레테의 결정을 얻는다고 해서 모두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정의 보유자에게 아주 강력한 욕망이 있어야 한다. 아레테는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능력을 주인에게 선사한다.

예를 들어, 물에 빠져 죽기 일보 직전인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의 욕망은 ‘빠져 죽고 싶지 않아!’ 일 터.

A가 아레테의 결정을 누군가에게 받게 되면, A의 초능력, 즉 아레테는 물에 빠져도 죽지 않는 능력이 되는 식이었다.

가령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거나. 물고기만큼 수영을 잘하게 된다거나.

물론 작가가 미는 카일의 설정은 ‘아레테 따위 쓰지 않아도 짱 쎈 남주’였기 때문에 카일이 아레테를 쓰는 장면은 거의 없다.

애당초 방어 계열이기 때문에 본인이 사용 자체를 꺼리기도 하고.

그런 카일이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약혼반지를 준다? 이건 그야말로 파멸 플래그였다.

아까 말했던 대로 신이 ‘수여’한 보석인지라, 아레테의 결정에는 특별한 옵션이 붙는다.

누군가에게 받으면 선물한 자의 허락이 있기 전까진 버리거나 남에게 양도할 수 없다.

즉, 카일이 놔주지 않으면 평생 끼고 있어야 한다.

‘……안 돼. 이건 사망 플래그야.’

카일이 일으킨 전쟁에 휩쓸려 죽은 사람들이 평생 내 이름을 씹어댈 거라고!

속으로 수십 번 심호흡을 한 나는 클레어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말 카일이 아레테의 결정을 메인 보석으로 세팅할까요?”

“아멜. 넌 정말 사교계에 관심이 없구나?”

“……네?”

클레어는 ‘포기해, 이 아가씨야.’하고 말하듯 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차이엘드가 몇 주 전부터 아레테의 결정을 고가에 매입하려 한다는 대륙에 소문이 쫙 퍼졌어. 바다 건너 제국에 있던 나도 들었는걸?”

맙소사. 나만 모르는 소문이 있었다니.

카일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라는 위안을 잠시 해봤지만, 그가 일할 때 빼고는 모두 내 곁에 머문다는 건 내가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다. 이럴 리가 없어. 신이 나를 버리다니!

“카일이 쓰려는 건 아닐까요? 좋은 아레테를 얻으면 사업에 도움이 될 테니까……”

“공작 전하는 이미 아레테 보유자야. 차이엘드 공작 지위와 함께 물려받은 아레테의 결정이 있거든.”

아, 맞다. 이건 책을 읽은 나도 아는 설정이다.

아레테는 정말 간절한 욕망이 있어야만 부여받을 수 있는 힘인지라, 아레테의 결정을 여러 개 가지고 있던 몇몇 선대 황제들도 아레테는 하나뿐이었다.

즉, 두 개를 가져서 득일 것이 없다.

‘이대로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약혼반지를 얻었다간…….’

나는 세공 장인들이 아코디언처럼 펼쳐놓은 반지들을 재빨리 눈으로 훑었다.

메인 보석을 가장 어렵게 가공해 세팅하는 반지를 골라야 한다. 그래야 아레테의 결정이 가공 중에 깨진다는 희망이라도 품어볼 테니.

내가 찬찬히 손끝을 움직이자, 세공 장인이 다급히 덧붙였다.

“누나 님. 이 약혼반지야말로 차이엘드 공작가의 품격을 한층 드높일 수 있는 디자인입니다.”

“계속해 보세요.”

“이 반지에 세팅되는 메인 보석은 꼭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으로 세공합니다. 광택과 아름다움의 정점이지요.”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내가 되묻자 세공 장인은 눈을 번뜩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표면을 수학적으로 완벽한 58면으로 커팅해 보석 본연의 아름다움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세공법! 제가 아닌 그 누구도 이런 기술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무지하게 어려운 세공 방법이라는 얘기잖아.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꼭 맞잡으며 답했다.

“저는 이 디자인으로 하겠어요. 초―고난도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으로 디자인된 아레테의 결정이 가지고 싶거든요. 뭐, 어려운 만큼 세공 중 사고가 날 수도 있겠지만요.”

제발 나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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