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세상 어떤 광물보다 값비싼 아레테의 결정이 나 때문에 망가지면 카일도 상심해서 약혼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약혼 포기까진 아니더라도, 미안해서 얼굴을 차마 못 보겠다는 핑계로 카일과 거리를 둘 수 있을 거다.
나는 주섬주섬 샘플 반지들을 정리하고 자리를 뜨는 세공 장인에게 ‘파이팅!’하고 의욕을 불어넣어 주었다.
겨우 한숨 돌리고 자리에 앉자, 클레어는 이번에도 나를 귀여운 여동생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귀여워. 공작 전하께서 왜 서둘러 약혼반지를 준비하는지 알겠어.”
“그 이유, 저도 좀 압시다……”
맹하게 지껄인 나는 다시 말을 고쳤다.
“궁, 궁금하잖아요? 공작 전하께서 어떤 마음으로 약혼에 임하시는지.”
“당연히 추수 연회가 끝나자마자 약혼식을 치르려는 생각이겠지.”
추수 연회.
풍부한 농지를 가진 제국의 백성들은 가을의 한 주를 축제로 보내는데, 이때 황제가 귀족들 심심하지 말라고 친히 베푸는 연회가 바로 추수 연회다.
명색이 황제인 분이 열었는데 아무도 안 오면 서운하니 고위 귀족들은 의무참석.
물론 남주인 카일은 고독한 늑대 캐릭터답게 연회나 무도회 등등을 즐기지 않았지만, 황명인데 어찌하랴.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 클레어가 1년마다 귀국하게 된 이유도 이것이었다. 어쨌거나 차이엘드라는 성을 쓰고 있으니 가문을 위해 사교 파티에 나가야겠지.
차이엘드는 황비를 여러 번 배출한 데다 제국의 내정에도 깊게 관여하는 특급 명문가였다. 알맹이 중의 알맹이 귀족이라 차이엘드의 자손들은 무조건 참석해야만 했다.
“레이디 클레어. 추수 연회까지 얼마나 남았죠?”
“한 달 정도. 황제 폐하는 친히 베푸시는 추수 연회가 가장 주목받길 원하시니, 어느 귀족도 그 일이 끝나기 전에 이슈를 만들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 하일 제국의 황제는 대단한 관심종자였다.
만일 제가 여는 파티 전에 누가 이슈를 터트려 제 관심을 뺏어간다면, 온갖 이유를 들어 벌을 내릴 사람이었다.
따라서 카일이 약혼식을 아무리 빨리 추진한다고 한들, 추수 연회가 끝나는 한 달 후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세공 장인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약 일주일 후, 카일이 돌아오지 않은 늦은 저녁.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차이엘드의 경호원들이 영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누나 님. 일전에 약혼반지를 맡은 세공 장인이 다짜고짜 찾아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약혼반지를 제작하는 데에는 족히 1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주문 일주일 후.
‘……됐다, 됐어! 다행이다!’
나는 차오르는 안도감을 숨기며 그를 안으로 들이라고 말했다.
곧, 기사들이 내키지 않는 티를 팍팍 내며 문제의 세공 장인을 죄인 호송하듯 끌고 왔다. 얼굴은 물론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래. 그 비싼 보석을 깨 먹었으면 그럴 법도 하지.’
나는 빙긋 웃으며 인사를 받곤 그가 본론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영양가 없는 대화를 길게 이어가던 세공 장인이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마음의 준비를 해주십시오, 누나 님.”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한들, 저는 준비되어 있답니다.”
마치 서부영화의 결투 장면처럼 비장한 바람이 불었다.
세공 장인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곤 배에 힘을 빡 주고 소리쳤다.
“더이상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 응?”
나는 처참히 부서진 아레테의 결정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보석함 안에 든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약혼반지.
흠집도 하나 없고 세공마저 완벽해 눈이 멀 정도로 반짝거렸다.
“이 찬란함을 보십시오! 제 생에 가장 완벽한 작업입니다!”
극도로 흥분한 세공 장인은 반지를 샹들리에 쪽으로 쳐들었다. 그러자 보석이 산란시키는 빛에 눈이 시렸다.
“차이엘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밤과 낮, 식사와 잠을 잊고 작업한 결과입니다.”
카일은 돈을 대체 얼마나 퍼부은 거야!
하는 수 없다. 도둑이라도 맞기를 기대해보는 수밖에.
나는 ‘와아……’하고 김빠지는 감탄사를 흘린 후, 보석함을 철컥 닫았다. 그러자 세공 장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나 님! 반지를 손에 끼워보셔야지 이 무슨……!”
“아니에요. 아레테의 결정이 세팅된 반지라 공작 전하가 안 계시면 뺄 수 없어서요. 착용은 약혼식 때 하죠.”
나는 천천히 하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며 그의 등을 반쯤 떠밀었다. 세공 장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실 즈음.
“반지가 완성된 겁니까?”
발랄한 카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매번 완벽한 타이밍에 등장하는지 기가 찰 지경이었다.
카일은 반지가 완성되었냐고 묻곤 바로 상자를 열게 했다.
보석엔 영 관심이 없는 그였지만 이 약혼반지가 훌륭하다는 것은 금방 인정했다.
카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초―고난도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아레테의 결정이 세팅된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내 약지에 반지를 끼우는 장면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
카일이 내 손에 반지를 끼워 넣은 순간 강력한 전류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망했다. 내게 아레테가 부여된 거구나.
파멸 엔딩을 피해 도망가고 싶다는 게 내 간절한 욕망이니, 순간 이동이나 빛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아레테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이 손에는 어떤 보석도 어울리겠지만.」
「……마음에 드시나?」
카일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어색하게 끄덕이며 마음에 든다고 말했지만, 카일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마치 내가 자기 ‘마음’을 읽어냈다는 것처럼.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남주는 심장이 멎을 듯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왼손에 입 맞췄다. 때맞춰 또 다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손등 말고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
“카일. 사람들 많은 데서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
카일은 내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 답했다.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믿어달라는 듯 눈망울이 순진했다. 카일은 내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가만. 그럼 내가 아까부터 듣고 있는 건, 설마……
「사람 다 물리고 키스하고 싶다.」
「……키스 말고 다른 것도.」
「방으로 데려가야겠어.」
‘카, 카일의 속마음?!’
당황한 나는 내 손을 잡은 카일과 약지에 끼워진 약혼반지를 한참이나 번갈아 바라봤다.
카일은 무슨 일이 있냐는 듯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공격력이라곤 전혀 없는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역시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데.」
사냥개, 아니, 이 정도면 케르베로스다.
시커먼 생각 하면서 순진한 웃음 짓지 말라고, 이 남주야!
나는 달아오른 뺨을 식히는 척 카일에게 잡혀 있던 손을 슬쩍 빼냈다. 그러자 카일의 속마음이 들리지 않았다.
‘……응?’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다시 카일의 손을 슬쩍 맞잡았다. 그러자 또다시 들려오는 혈기왕성한 연하남의 속마음.
「못 참겠어. 그냥 키스할래.」
내가 속마음을 채 다 헤아리기도 전에 카일은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주변에 있던 고용인들은 알아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카일은 얼굴선을 따라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질 뿐 섣불리 다가오지 않았다.
「……멋대로 키스하면 싫어하겠지. 미움받기 싫은데.」
그가 이렇게 행동할수록 내 아레테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닿은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 것.
혹시 카일에게만 발동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게걸음으로 움직여 옆에 있던 하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보았다.
「아…… 분위기 미쳤다, 진짜! 누나 님이 저렇게 예쁘고 섹시하니까 공작 전하께서도 홀딱 반하시지! 얼른 키스해라!」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닿은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내 욕망이라고 한다면 분명 2년 후, 거대한 자본을 움직여 전쟁을 일으킬 이 남주님에게 벗어나는 것일 텐데. 왜 비행도, 광속 달리기도 아닌 속마음을 읽는 아레테가 부여된 건지 모르겠다.
내가 딴생각을 하면서 눈동자를 굴린 게 꽤 오랜 시간 동안이었는지, 카일이 픽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시선을 피하시는 걸 보니 내키지 않으시나 보군.」
그의 속마음 다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하는 내내 보고 싶었습니다.”
“…….”
속마음을 드러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어 놓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기까지 하니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카일과 슬쩍 떨어져 속마음을 원천 차단했다. 카일은 금방 시무룩한 얼굴을 했지만.
“약혼반지는 마음에 드십니까? 디자인을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해서 제작을 조금 서둘러 달라고 부탁했는데.”
조금 서둘러 달라고 부탁한 게 아닌 것 같던데.
하지만 티 낼 수가 없다. 일단 카일이 내게 보인 건 호의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반지를 눈에 담았다.
“고마워요, 카일.”
“…….”
「……웃는 걸 볼 때마다 미치겠군.」
카일이 얼굴을 조금 기울이며 다가와 그대로 내 입술을 머금었다. 촉촉하고 연한 살결이 비벼지자 온몸에 찌르르 진동이 퍼지는 듯했다.
고개를 더 숙여 집요하게 아랫입술을 괴롭히는가 하면, 숨쉬기 편하도록 짧은 키스를 섞어 가며 내 입술을 탐했다.
……아, 미치겠네. 남주 버프. 키스를 너무 잘해.
고작 입맞춤 한 번에 카일이 운명의 사랑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라고 충동적으로 생각한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카일은 풀린 눈을 하고 벌어진 입술 안쪽으로 조심스레 침범해왔다.
그가 연한 살결을 맛보고 빨아들일수록 호흡이 더 가빠졌다. 한참을 키스하고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다시 장난스럽게 입을 맞춰 온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도록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키스를 조금 더 하고 싶었다. 카일이 내 허리를 받쳐 안고 중얼거리기 전까지 말이다.
“……아멜리아 다이앤.”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부른 카일은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바짝 맞닿아 있는 탓에 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당신을 갖고 싶어.」
“…….”
진솔한 울림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내가 들은 건 누구든 꾸며낼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진심 어린 속마음이었으니까.
‘갖고 싶다고?’
여태까지 카일의 고백을 장난이나 순간의 불장난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나였다. 그런데 카일은 진심이었을 줄이야.
책 속의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소설 속 인물로 빙의한 이상 카일리안 차이엘드도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시시각각 변하는 기분과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스리슬쩍 그의 목에 감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곤 손등으로 약간 부어오른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그게 하필 왼손이었던지라, 카일은 아쉬운 듯 제 입술을 훑으면서도 약혼반지를 보며 만족했다.
“언제까지 끼고 계실 겁니까.”
“그러게요. 당장 빼야겠어요.”
“…….”
카일의 표정이 묘하게 무서워졌다. 즉각 겁을 먹은 나는 씩 웃으며 꼬리를 내렸다.
“계속 끼고 있으면 약혼식 때 느낌이 안 날 것 같아요.”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제발 봐주세요, 파멸 남주님.
내가 눈빛으로 애원하자 카일은 사르르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애교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약혼식을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으음…… 당연하죠.”
그날이 내 제삿날이 될지도 모르는데, 기다렸겠습니까.
내가 표정을 숨기든 말든, 카일은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찬찬히 약혼반지를 매만졌다.
“조금 피곤합니다. 내일도 일정이 빡빡하니 슬슬 침실로 갔으면 좋겠는데.”
이미 남주의 새카만 욕망을 본 나는 허허, 하고 산타클로스 뺨치는 인자한 웃음을 내비칠 뿐이었다.
“당연히 누나도 같이 가는 거고.”
「어딜 도망가려고.」
슬쩍 시선을 피하자 카일은 천사가 내려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손만 잡고 자겠습니다. 응?”
애교 부리지 마!
「손만 잡고 자긴 무슨.」
네가 한 말 네가 비웃지도 말고!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