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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7화 (17/134)

#17

나는 카일에게 약혼반지를 빼 달라고 부탁한 다음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그를 푹 껴안았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이번 추수 연회는 기대됩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읽은 책 속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고독한 늑대 캐릭터라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드는 파티나 무도회, 연회를 무척 껄끄러워하기 때문이다.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는 하일 제국의 귀족 대부분이 참가한다. 그들은 차이엘드의 부와 권력을 탐내 카일에게 살갑게 굴면서도 뒤에서는 괴물 공작이라 경멸하곤 했다.

카일 또한 그 사실을 은연중에 알고 있어 사람이 많은 자리를 꺼렸고, 피치 못할 자리에서는 짧은 시간 얼굴만 비춘 뒤 자리를 떴다.

‘그런 남자가…… 추수 연회가 기대된다고?’

“카일은 연회를 좋아해요?”

카일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누나랑 같이 갈 생각에 기대하는 겁니다. 다른 남자가 채갈까 봐 걱정도 조금 되지만.”

몸이 닿아 있는 탓에 속마음이 들려왔다.

「혼자가 아니니 연회를 끝까지 즐기는 것도 괜찮겠지.」

「……우리 관계를 알리고 싶기도 하고.」

마음을 더 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카일이 약혼반지를 빼 보석함에 다시 넣었기 때문이다.

‘이 반응은…… 분명 변했어.’

속마음을 읽으니 확실해졌다. 지금의 카일은 내가 책에서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막연히 짐작한 모습과 많이 달랐다.

내 무엇이 이 사람을 바꾸었는진 알 수 없지만, 카일은 변했다. 상상만큼 잔인하지도, 냉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귀여워서 문제야.’

원작 여주인공에게도 이렇게 사랑스러웠을까. 예쁨 받고 싶은 마음을 숨기려 하면서도 다 드러내는 건 치명적이었다.

‘확실해. 지금의 카일은 파멸과 거리가 멀어.’

몇 년 후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남자가 약혼녀를 남들에게 소개할 생각에 들뜰 리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지금처럼 단단히 마음을 먹고 밀어낼 필요는 없었다.

여주인공이 등장하면 카일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만큼이나 다른 사람이 된 걸 보면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냥 내꺼였으면 좋겠다.’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바라보자 카일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무도회나 파티를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요?”

나는 빠르게 원작의 기억을 스캔했으나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차이엘드가 일으킨 전쟁의 희생양이 된 것은 시민들뿐만이 아니었다. 총기사단장 집안이었다 쫄딱 망한 다이앤 등의 힘 없는 백작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게 원작에 나온 우리 집, 다이앤 백작가의 분량 전부였으니까.

대신 다른 책에서 읽은 삐뚤빼뚤한 글씨가 떠올랐다. 바로 아멜리아 다이앤의 일기장이었다.

이제야 생각났다. 아멜리아는 사교계에 입성하는 뜻깊은 자리라고 할 수 있는 데뷔탕트 때 계단에서 구른 전력이 있었다.

다이앤 백작 부부가 집안의 금붙이들을 모두 처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일순간의 사고로 모두 망쳤다며 무척 속상해했다.

일기장에도 화려한 드레스만 보면 그날이 생각나 수치스럽다고 어찌나 한탄을 늘어놓던지.

어쨌든 내가 빙의한 아멜리아 다이앤 또한 공식적으로 차려입고 모여 춤을 추는 사교 자리를 꺼리는 캐릭터다.

“데뷔탕트 때 일로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헛소문이었습니까?”

카일은 ‘말만 하면 헛소문을 퍼트린 놈팡이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제길. 이러면 할 수 있는 대답이 하나뿐이잖아.

“음…… 카일이랑 같이 참석하는 연회라 기대되나 봐요.”

울며 겨자 먹기로 한 대답임에도 카일은 귀하디귀한 보물을 얻은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리곤 나를 더 꼭 껴안았다.

“내일부턴 슬슬 연회 준비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제 약혼녀를 소개하는 자리이니.”

“저 때문에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사람들도 때가 되면 적당히 알게 되겠죠.”

“하루빨리 알리고 싶습니다. 추수 연회라면 주요 귀족들이 모두 참석할 테니 딱 좋은 자리라고 생각되는데.”

카일은 ‘잘생김을 연기해 주세요’라는 의뢰를 받은 배우처럼 아름답고 시무룩한 얼굴을 갸웃했다.

“안…… 됩니까?”

“어흑…… 돼요. 돼.”

이놈의 입이 방정이었다.

***

카일이 무얼 준비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은 건 연회를 코앞에 둔 어느 늦은 저녁이었다.

이미 연회 준비를 마친 나는 장미가 예쁘게 피었다는 고용인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넓디넓은 차이엘드의 정원을 구경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물론 밤 산책을 200% 즐기기 위해 와인을 몇 잔 마시면서.

기분이 좋아진 내가 팔랑팔랑 돌아왔을 땐 로비에 카일과 하일드 집사님이 우뚝 서 있었다.

카일은 나를 훑어봤다. 가까이 다가와 언뜻 풍기는 술 냄새를 맡은 것도 같다.

공작저에 있는 술은 내가 다 마시는 것 같아 무안한 마음에 웃자 카일이 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응. 장미가 예쁘게 피었길래 구경하고 왔어요. 카일은 로비에 서서 뭘 하고 있었어요?”

“저는……”

카일이 하일드 집사님을 힐끗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하일드에게 춤 교습을 받고 있었습니다. 워낙 춤에 젬병이라.”

“그렇습니다. 공작 전하께서는 춤을 연습하시던 중이었습니다.”

기사단장 출신 집사장님께 춤 교습이라.

“정말요?”

완벽한 춤 실력은 남주의 덕목인데, 이상하네.

카일은 영 어렵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어렵습니다. 하일드와 연습해도 느는 것 같지 않고.”

뭔가가 이상했지만 알코올이 들어가는 바람에 생각이 단순해진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술김이라 그런지 불퉁한 얼굴을 하며 아쉬워하는 카일이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카일. 연습 도와줄까요?”

카일은 내가 내민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부드러운 왈츠가 흘러나왔다.

사교계에 군림하기 위한 모든 것을 마스터한 클레어를 파트너 삼아 내내 연습한 탓에 내 왈츠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멜리아가 데뷔탕트를 기대하며 각고의 노력을 한 것을 몸이 기억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 왈츠와는 달리 카일은 무척 뻣뻣한 스텝을 밟았다. 뭐랄까. 아예 못 추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엇나가는 느낌.

내 발을 밟거나 손으로 나를 쳐내는 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내가 빙글 돌아야 할 때 꼭 실수해 내가 와락 붙잡아 안아줘야 했다.

항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냈던 카일이 실수를 연발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어서, 나는 카일을 집요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카일. 리드에는 영 소질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레이디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차이엘드 공작 전하의 왈츠 실력이 영…….”

“레이디들의 사랑은 필요 없습니다.”

카일은 뚱한 얼굴을 하고 내 놀림에 꼬박꼬박 대꾸했다. 그럴수록 술이 들어간 나는 짓궂은 문장만 쏟아냈다.

“어휴. 왈츠 리드를 제가 다 하는 것 같은데.”

“리드하는 쪽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풋 웃은 나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왈츠 스텝을 밟으며 빙그르르 돌다 너스레를 떨었다.

“오랜만에 공작 전하가 리드하는 것 좀 보고 싶네.”

그러자 카일이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음?’

홀을 가득 채우던 왈츠가 뚝 끊겼다. 하일드 집사님은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카일은 내 허리를 받친 채로 거리를 훅 좁혀 나를 뒤로 반쯤 눕게 하는 고급 기술을 구사했다.

그리곤 단단한 품에 안겨 옴짝달싹 못 하는 내게 속삭였다.

“누나가 제 리드를 원하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응?”

“아. 왈츠 리드는 형편없다고 하셨으니 다른 리드로.”

정신을 차리니 으슥한 복도였다. 카일은 잘난 얼굴을 무기 삼아 살금살금 거리를 좁혔다.

빙빙 도는 왈츠를 추느라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빛나는 붉은 눈이 어찌나 섹시한지.

파멸 엔딩과 잠깐의 재미를 저울질한 나는 곧장 잠깐의 재미 쪽에 승기를 들어줬다.

……그래도 너무 적극적으로 스킨십에 응하면 양심에 찔리니 살짝만 튕겨볼까.

“카일, 이러면 안……돼요.”

“방금 된다고 말한 것 같은데.”

“안…… 된다니까.”

‘안’은 개미가 낸다고 해도 믿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래. 난 최선을 다했다.

카일은 저항의 의지 따위 없는 내 눈빛을 읽어내곤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다가왔다.

코앞에서 숨결이 느껴질 때 눈을 감았다. 짧은 틈을 두고 말캉한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내 숨을 한 입씩 머금던 카일은 점점 진득하게 입술을 탐해오기 시작했다. 혀로 입술 안쪽을 핥아 더 안쪽을 범하게 해달라고 조르는 것에 슬슬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나는 온몸에 쭈뼛 전기가 흐르는 느낌을 즐기며 조금 더 그를 받아들였다.

……남자 주인공은 역시 남자 주인공인 것인가. 카일의 리드는 그야말로 끝―내줬다.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게 문제였지만.

카일은 나를 어렵지 않게 안아 들고 제 방으로 향했다. 술을 마신 탓에 알딸딸했던 나는 익숙한 침구의 감각에 눈을 번뜩 떴다.

“카일……”

그를 밀쳐내려 그의 가슴에 손을 댔는…… 데, 순간 탄탄한 몸에 이성이 툭 멈춰 버렸다.

내 몸 위로 제 몸을 반쯤 겹친 카일은 키스를 이어가면서 노련하게 내 귀걸이를 빼 침대 아래로 던졌다.

귀걸이 다음엔 목걸이였다. 제 행동에 방해가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침대 아래로 던지는 행동에 애가 탔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입맞춤에 정신을 놓고 있다 보니 추웠다. 드레스도, 이불도 모조리 침대 아래에 러그처럼 깔려 있었다.

또다시 나는 얇고 흰 원피스만을 입은 채로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처럼 멍청하게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도 셋 셀 겁니까, 누나?”

카일이 제 몸을 감싸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끌러내며 물었다.

“그럼요. 하나, 둘……”

카일이 언제든 그만둬도 된다는 듯 순진하게 웃으며 나를 쓰다듬었다. 그 바람직한 모습에 나는……

“셋.”

기어이 셋을 다 세고야 말았다.

그동안 참은 게 많은 카일은 짐승처럼 나를 덮쳐왔다. 입술부터 시작해 조금씩 먹혀들어 가는 기분이 나쁘긴커녕 황홀했다.

“카일……”

내가 달뜬 숨을 내뱉자 카일은 듣고 있다는 듯 눈썹을 으쓱이면서도 살결을 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간지럽다고 표현하기엔 뱃속을 사르르 녹이는 듯한 느낌이 너무도 컸다.

내가 한 번 더 이름을 불렀을 때, 카일은 아쉬운 얼굴을 하고서도 다정하게 말했다.

“내키지 않으시면 말하십시오.”

“네?”

카일이 뺨을 붉히며 눈을 살짝 피했다.

“……사랑하니까 참을 수 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나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멈추긴 뭘 멈춰요. 더 해줘요.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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