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카일은 곧장 허리춤의 벨트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내 시선은 그보다 조금 아래, 도드라진 음영에 쏠렸다.
‘……첫날밤에도 느낀 거지만 미쳤다. 미쳤어.’
역시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나, 잠깐만.”
카일은 거리낌 없는 손길로 침대 옆 서랍을 뒤졌다. 그 안에 무언가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나도 보았다.
……저건 로맨스 소설의 꽃. 남녀 중 하나가 맛만 봐도 100% 피임이 가능하다는 사탕인데. 이 남주는 저걸 왜 이렇게 많이 쌓아놨어?
나는 서랍에 넘칠 만큼 들어 있는 피임 사탕과 재빨리 그중 하나를 맛보곤 쓰레기통에 버리는 카일을 번갈아 보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가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 거리를 좁혔다.
카일은 취한 듯 몽롱한 눈을 맞춘 채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의 손길은 머리카락에서 귓가로, 턱선으로, 입술로 부드럽게 옮겨왔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모르겠어.”
“……괜한 칭찬 말아요.”
내 말이 카일에게는 얼른 본론을 시작하자는 뜻으로 들렸나 보다.
카일은 첫날밤에 내가 가르쳐준 대로 눈을 꼭 감고 입술을 머금었다. 그가 한 입 한 입 잡아먹듯 턱을 벌리고 공을 들이자 내 입술도 말캉하고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의 손이 원피스 끈을 만지작대다 어깨 아래로 끌어내렸다. 원피스가 차츰 흘러내렸다.
***
그리고 몇 시간 후. 나는 체력을 탈탈 털어 쓸 만큼 격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카일의 팔을 베고 그의 침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본 지 어느새 한 시간이 다 되어간다.
카일의 리드는 뭐랄까…… 빙의하기 전 대한민국에서 입에 붙었던 ‘끝내준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만큼 환상적이었다.
그래.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처음 온몸을 빳빳이 세운 뒤로 그를 재우기가 싫었다. 그동안 나도 참고 있었나?
그래서 뭐…… 안 재웠다. 그리고 나는 그 결정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몸정도 정이라는데. 파멸 남주에게 몇 번이나 안겼는지 모른다. 내가 안았나?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성인 둘이 상호 합의하에, 안전하게 보낸 시간이니 큰 문제는 없었다. 딱 한 번…… 아니지. 한 번이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카일의 미인계에 매번 이렇게 넙죽 넘어가면 안 될 텐데.’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는 유혹에 약하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카일에게 유혹의 여지를 주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나는 차이엘드 공작저에 사는 걸까.’
초호화 공작저는 물론 최고였다. 카일도, 클레어도, 차이엘드의 고용인들도 내 편의를 과하다 싶을 정도로 봐주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내가 얻어낸 게 아니었다. 카일에게 철벽을 치지 않기로 결심한 것과 내가 스스로 앞길을 개척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다이앤 백작저의 빚도 해결해야 하니까 일단 직장을 구해야겠다. 기왕이면 근무 시간 조정이 가능한 걸로.’
지금의 카일이 파멸과 멀어 보인다고 해도 그에게 기생해서 살 생각은 없었다. 일단 직장을 구해 종잣돈을 마련한 다음 차근차근 차이엘드가 대신 변제해 준 빚을 갚으리라.
다이앤 백작가의 빚 액수가 크긴 하지만 다행히 나는 책 바깥에서 온 사람이다. 어떤 사업이 흥하고 망할지를 어느 정도 아니, 초기자본만 모으면 투자로 돈을 불리는 건 한낱 단꿈이 아니었다.
내가 차근차근 세운 계획을 다시 정리할 무렵, 카일이 나를 바짝 끌어안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뭐, 그냥……”
“지금 주무시지 않으면 내일 피곤할 겁니다.”
“…….”
“잠이 오지 않습니까?”
카일은 어린애를 달래듯 나를 꼭 껴안고 웅얼거렸다. 품이 따뜻해서 마음이 짠했다.
내가 입술을 맞물자 카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그냥.”
내가 성의 없이 답하자 카일은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얼굴을 했다. 분명 나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반짝이는 눈. 발그레해지는 뺨. 그리고……
“혹시…… 아이에 관한 생각을 하신 겁니까?”
완벽한 헛소리.
잠깐. 뭐라고? 아이? 이 ‘아이’가 Child나 Baby는 아니겠지?!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에서도 아이를 갖기를 원하지 않던 카일이었다. 여주인 바네사와도! 그런데 왜!
나는 침착하게 현실도피를 시도했다.
“카일, 애완동물이라도 기르게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누나.”
“그럼 ‘아이’라는 말은……”
“아멜. 누나를 닮은 아이면 무척 사랑스러울 것 같은데. 조금 빠릅니까?”
조금 빠르냐고? 여기가 아우토반인 줄 알았다! 무슨 놈의 남자가 속도 제한이라는 걸 몰라!
“카일. 하지만 아직 약혼식도 안 했잖아요.”
“정확한 판단을 빨리 내리는 게 저희 가문 특기라.”
어쩐지 납득은 간다. 어마어마한 돈을 굴릴 때 순간 판단 능력은 몹시 중요할 테니. 작가 공인의 원작 설정이기도 했다.
“……결정이요? 무슨 결정?”
“누나를 영원히 제 곁에 둘 겁니다.”
내가 놀란 얼굴을 하자 카일은 쐐기를 박아버렸다.
“아멜리아 다이앤, 당신을 내 곁에 둘 거야. 영원히.”
“돈, 돈 보고 공작 전하께 접근한 저를요?”
카일은 당연하지 않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보였던 위협적인 대신 애교 가득한 미소를 장착했다.
그리곤 필사적으로 자신의 재력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누나.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을 모르십니까? 지금 당장 망해도 우리 손자 손녀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손자 손녀만 괜찮을까. 차이엘드라면 망해도 10세기 정도는 버틸 거다. 아니, 그 이상도 버티겠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돈 보고 접근했다는 제 불순한 의도가 문제가 아닐지……”
“그게 마음에 안 들긴 합니다. 돈 보고 접근했으면 하루라도 빨리 공작 부인 자리를 원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카일이 불퉁한 얼굴을 하고 그동안 쌓인 것이 많았다며 내게 툴툴대기 시작했다.
“얼른 저를 유혹하고 꼬셔서 공작 부인 자리를 차지하시란 말입니다. 불순한 의도에 그대로 넘어가 드릴 테니.”
“아니, 저기……”
“겨우 차이엘드의 피앙세 자리에 만족하시는 겁니까? 원하는 건 다 드릴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카일?”
“돈 보고 제게 접근했다고 하셨으니 겨우 제 몸이랑 얼굴에 만족하실 생각은 마십시오.”
이 남주는 대체 어디가 문제지? 그사이에 머리라도 다친 걸까?
내가 눈을 끔뻑거리자 카일이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이 문제는 원래 부부가 합의해서 결정하는 거라고 배웠는데.”
“배워요? 어디서?”
“책을 읽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10가지 방법>과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19가지 조언>.”
미치겠네, 진짜! 그런 스윗한 책은 또 어디서 구해온 거야!
카일은 절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누나가 원하지 않을 때 아이를 갖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대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쓰레기통 쪽을 힐끔거린 카일은 여전히 어두운 내 얼굴을 보고 덧붙였다.
“그래도 걱정하시는 것 같으니 내일 아침 카비커스 차를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카비커스 차는 한 방울만 맛봐도 100% 피임 효과를 자랑하는 마법의 차였다.
효과에 맞게 무척 비쌌지만 카일이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 한 잔이면 카비커스 차 열 잔도 거뜬히 구입하리라.
난데없는 2세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정신줄을 붙잡기 위해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카일은 도와주지 않았지만.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좋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
“네……?”
안 봐도 내 눈은 휘둥그레졌을 거다.
원작에서 카일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당한 악행을 그대로 대물림하게 될까 봐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했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생각보다 강하니, 아이를 보면 자신의 끔찍했던 과거가 떠오를까 봐 두렵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 남자가 대체 왜?
“카일. 그…… 괜찮겠어요? 아이?”
“사실 제가 아이에게 쌀쌀맞게 굴까 봐 걱정하긴 했습니다. 제 아버지처럼. 하지만……”
카일이 나와 눈을 마주했다. 눈동자 가득 나를 담은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손톱에 긁힐까 걱정한 건지 말랑한 지문 쪽 손끝으로 내 드러난 팔을 간질이는 행동이 무척 다정했다.
“당신이 낳은 아이에게 어떻게 쌀쌀맞게 굴겠습니까. 지금도 바라보면 웃음부터 나는데.”
심장이 아파 시선을 피했다. 이런 사랑스러운 말들을 쏟아내던 남자가 운명의 사랑을 만나 훌쩍 떠나버리면 내 마음이 찢어질 게 뻔했다.
“큼, 큼. 카일. 제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요?”
“그럼 제가 평생 누나를 독차지할 수 있는 겁니까? 그건 그것대로 좋습니다.”
부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긍정적인 사고라는 건 다 사실이었다. 무슨 놈의 남자가 이렇게 긍정적이람.
내 눈동자가 그야말로 지진이라도 겪은 듯 달달달 떨리는 걸 눈치챘는지 카일은 나를 더 꼭 껴안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가 생긴다면 사랑해줄 겁니다. 누나를 닮았다면 더더욱.”
고백하자면 나는 대한민국에 살던 시절, 등교 전 매일 들려오던 인간극장 BGM만 들어도 눈물을 왈칵 흘릴 만큼 감성적이었다.
그런 내게 카일의 기습 발언은 눈물을 팡 터트릴 만큼 슬프게 들렸다.
자식들을 짐승처럼 경쟁시키며 키웠던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기까지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얼마나 아팠을까.
자신이 겪은 것을 남에겐 겪지 않게 하겠다고 말하는 게 기특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남자를 대체 어떻게 밀어내.’
카일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가 파멸을 원하게 된 건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인들 모두가 그를 집요하게 괴롭혀온 결과였다.
원래 나쁜 게 아니라 누군가가 집요하게 망가뜨린 거라면, 정신머리 제대로 박힌 어른으로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게 옳지 않을까?
동시에 반발심도 들었다. 이미 카일이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을 막아 원작의 흐름을 바꾼 나였다. 게다가 카일은 내게 진심이었다.
‘그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은 내가 예뻐해 주자.’
결심이 섰다. 카일이 바네사에게 빠져 나를 떠나든 말든, 나는 카일을 보듬어주기로. 설령 카일이 떠난다고 해도 나만 슬퍼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다 꼭 껴안았다.
그의 몸이 움찔 굳었다, 더 따스하게 감겨왔다.
한참 동안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카일은 내가 잠들 무렵, 다짐인지 맹세인지 모를 말을 속삭였다.
“누나가 있는 한, 저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