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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19화 (19/134)

#19

책으로 이미 카일의 생애를 접한 나는 카일이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한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새카만 머리카락을 엉망이 될 만큼 집요하게 쓰다듬었음에도 카일은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 목에 깊이 기대왔다.

‘아, 귀여워.’

잘생긴 파멸 남주가 앙탈을 부리며 조르면 1초 만에 넘어갈 자신이 있던 나는 곧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래 다른 사람도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줍니까?”

카일의 목소리는 질투와 행복, 기쁨과 조바심이 황금비율로 뒤섞여 있어 그야말로 꿀처럼 달콤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사람 체온이니 따뜻한 거 아닐까요? 제가 껴안아 본 사람이 아직 카일뿐이라 남들에게도 따뜻하게 느껴지는진 잘 모르겠어요.”

“……!”

아차. 말실수했다. 분명 카일이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붉은 눈동자의 반짝거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제가 처음입니까?”

“…….”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이 협상의 달인 대부호가 원하는 말을 술술 해주는 것밖에 되지 않으리라.

카일은 상대를 가지고 노는 데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였으니까.

나는 죽은 사람 연기라도 하듯 입을 다물고 조심조심 숨만 쉬며 잠을 청했다. 그러자 카일이 알겠다는 듯 픽 웃었다.

“답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처음이었을 테니.”

울컥. 대한민국에서도 연애라곤 가뭄에 콩 나듯 잠깐씩 했고, 그마저도 끝이 좋지 않았던 나는 즉각 되물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죠, 카일?”

“그야…… 아직 첫날밤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 말투는 뭐야. 내가 못, 못 했다는 거야, 설마?!

발끈한 나는 안고 있던 카일을 품에서 떼어냈다. 그리곤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카일은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다는 천진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주무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마치 ‘나 졸려요’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나를 더 욱하게 했다. 그래서 말했다.

“누나를 자극해 놓고 어딜 자려고요, 카일.”

“…….”

“제가 재울 것 같아요?”

***

영악한 카일리안 차이엘드에게 놀아나 밤샘을 한 탓에 생활패턴이 와르르 무너졌다.

물론 차이엘드 공작저에는 우수한 인력들이 즐비한 탓에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지만 말이다.

망가진 내 생활패턴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원래대로 돌아왔다.

즉, 오늘이 바로 여색에 미친 관심종자 황제가 베푸는 추수 연회 당일이라는 소리.

카일이 가문의 사업 건으로 잠시 외출한 사이, 나는 클레어가 머무르고 있는 별궁에서 연회 참석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봐. 그 리본보다는 저 레이스가 더 아멜에게 어울리지 않겠어?”

일찌감치 치장을 마친 클레어는 내 머리를 장식할 장신구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는 뭘 했냐고? 예쁜 최애 언니의 미모를 감상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

안 그래도 화려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클레어는 자신의 미모가 더 돋보이는 고혹적인 화장을 한 상태였는데, 특히 버건디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섹시했다.

게다가, 이 짙은 와인빛 드레스! 사람 몸의 곡선이 이리도 유려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관능적이었다.

역시 사교계의 여왕님인 내 최애가 최고였다.

“아멜. 뭘 그렇게 빤히 봐?”

“저, 저번에 레이디 클레어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요. 추수 연회 때문에 여행에서 돌아오셨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럼…… 연회가 끝나면 가시는 거예요?”

의자에 앉은 내 머리에 이런저런 장신구를 대보느라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클레어가 멈칫했다.

나를 담은 붉은 눈동자가 멍하니 깜빡거리기를 반복했다.

“레이디 클레어?”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클레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곧, 클레어의 양손이 내 뺨을 조심조심 조물거리기 시작했다.

“아멜, 넌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말랑말랑.

“세상에…… 내가 아무리 역마살이 끼었다지만 우리 아멜 약혼식까지는 보고 가야겠다. 약혼식용 드레스를 입은 것도 귀여울 것 같아.”

언니. 언제부터 제가 ‘우리 아멜’이었어요. 그렇게 부르시면…….

“꺅! 너무 좋아요! 저는 언니랑 노는 게 제일 좋아요!”

“아멜. 너 방금……”

클레어는 내가 카일리안 차이엘드 공작 전하를 처음 ‘카일’이라고 불렀을 때 그가 지었던 얼굴을 했다.

“나한테 ‘언니’라고 했어? 계속 그렇게 불러라, 응?”

최애의 품에 꽉 안긴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저를 가지세요!

내가 클레어에게 안긴 채로 팬 미팅에서 계 탄 팬의 기분에 흠뻑 취해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지금 뭐 하십니까.”

카일이었다.

거울에 비춰 그를 본 클레어는 금방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러나 날 안은 팔은 무척 찬찬히 풀었다.

카일은 클레어가 나를 완전히 놓을 때까지 입을 꼭 다문 채로 기다리다, 내가 아쉬운 듯 클레어를 힐끗거리자 입을 뗐다.

“준비는 다 마치셨습니까, 누나.”

“네. 클레어 언니가 도와주신 덕에요.”

언니, 라는 친밀감 넘치는 두 단어에도 카일은 표정을 구기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은 분명 언짢아하고 있었다. 역시 차이엘드의 자식들이란…… 표정 숨기는 데에 재능이 충만했다.

둘 사이의 기류는 이 자리에서 전쟁이 터진대도 믿을 만큼 날카로웠다.

당장의 목숨부터 부지하기로 한 나는 방긋 웃으며 카일을 전신거울 앞으로 끌고 왔다.

긴 장갑을 낀 팔을 차렷 자세로 있던 카일의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워 넣어 팔짱을 끼자 그의 굳어 있던 얼굴이 풀어졌다.

“저 어때요?”

나는 한껏 눈웃음을 지으며 카일의 시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카일은 무언가 따끔한 것을 참듯 몸을 움찔했다.

“별로예요?”

카일이 시선을 돌리는 척 침을 삼켰다. 언뜻 얼굴이 붉어진 것도 같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요?”

나는 재롱을 떨 듯 양손으로 꽃받침까지 만들어 보였다.

“……예쁩니다.”

물론 이게 내가 기대한 반응이었다. 예쁘다는 말. 하지만 막상 들으니 몇 시간 동안 공들여 치장한 것에 대한 칭찬치고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예쁘기만 해요?”

급기야 나는 칭찬을 갈취하기 시작했다.

“우아하기도 하고.”

“그리고요?”

나는 구두를 신은 채로 까치발까지 들며 칭찬을 유도했다. 왜인지 카일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지만.

내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칭찬을 요구하자 카일은 시선을 피하다 클레어와 딱 눈이 마주쳐 버렸다.

“…….”

“…….”

두 사이에 정적이 흐르는 순간 깨달았다. 아, 카일이 클레어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말을 아꼈던 거구나.

신경전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카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레이디 클레어. 당신이 보기엔 아멜리아가 어떻습니까.”

“흠…….”

클레어는 카일이 자신의 의견을 구하는 게 무척 의외라는 눈치였다. 내가 봐도 의외긴 했다. 카일과 클레어는 서로를 유령 취급하니까.

클레어는 섣불리 입을 떼는 대신 구석에서 치장을 돕던 하녀를 흘끗 바라봤다. 카일도 시선을 옮겼다.

살벌한 차이엘드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하녀는 자신의 임무를 눈치챘다. 카일과 클레어의 속마음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읊어야 하리라.

그녀는 나를 빛의 속도로 스캔하곤 재빨리 입을 열었다.

“누나 님의 아름다움이야 여러 번 말해 입 아프지만, 추석 연회를 앞두고 오랜 시간 동안 특별히 신경 쓴 만큼 오늘 더 눈부십니다.”

하녀는 두 차이엘드의 눈치를 살폈으나 둘은 조금도 만족하지 않은 눈치였다. 해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특, 특히 물결치는 라떼 색 머릿결 위로 흐드러진 보석 머리핀과 레이스 장식이 압권입니다. 어느 조명 아래에서도 누나 님이 가장 빛나실 겁니다.”

“…….”

두 차이엘드는 이번에도 싸늘했다.

“칭, 칭찬은 이제 시작이지요! 레이디 클레어께서 7차 심사에 걸쳐 뽑은 드레스의 크림색과 분홍색 치맛단이 걸을 때마다 부풀었다가 가라앉으니, 누나 님의 사랑스러움은 단연 연회 참석자 중 최고일 겁니다.”

하녀는 또다시 클레어와 카일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둘은 이번에도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결국 클레어가 직접 입을 뗐다.

“오늘의 포인트는 가슴에 장식한 에메랄드 브로치죠. 차이엘드의 품격에 맞춰 다이아몬드로 빙 둘러 장식했고요. 아멜의 녹갈색 눈동자와 꼭 어울려서 안 그래도 야릇한 아멜의 눈동자가…….”

답지 않게 사족을 덧붙이던 클레어가 제 말에 놀라 입술을 맞물었다.

그러자 카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왜 아무도 환상적으로 어울리는 실크 장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겁니까.”

카일의 말을 들은 클레어가 ‘제법인데?’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다.

“달콤하고 관능적인 향수를 뿌렸으니 부채도 가져가는 게 좋겠죠. 보드랍기로 유명한 그리핀의 깃털이 장식된 이 부채 말이에요.”

그 후로도 두 차이엘드의 생존자는 끊임없이 내 추수 연회용 치장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뭐지? 둘이 원래 이렇게 친했나?

***

관능적인 향의 향수를 뿌리는 것으로 단장을 마친 나는 클레어를 따라 마차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분홍색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나는 평소와 달리 꽃을 구경하느라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사실, 추수 연회가 아멜리아 다이앤의 몸에 빙의한 후로 처음 나가는 사교의 장이라 긴장된다.

내가 뻣뻣하게 걷고 있다는 걸 눈치챈 클레어는 나를 잠깐 멈춰 세웠다.

“아멜. 왜 그래? 안색이 창백해.”

“그냥 조금…… 긴장한 것 같아요.”

클레어도 내 폭망한 데뷔탕트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사교계는 왈츠가 흐르는 전쟁터야. 이런 상태로 갔다간 물어뜯길 텐데.”

안 그래도 겁을 먹은 사람에게 겁을 주시다니.

내가 울먹일 즈음, 치맛단이 나풀거릴 정도의 강한 바람이 정원을 솨아아 훑고 지나갔다.

분홍빛 장미 꽃잎들이 바람결에 맞추어 살랑살랑 떨어져 나왔음은 물론이다.

클레어는 빼꼼 튀어나온 내 구두 위에 사뿐 떨어진 예쁜 꽃잎을 눈에 담다가 말했다.

“아멜. 하나 묻자. 감히 네 구두 위에 떨어진 꽃잎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까?”

“음…… 예쁘기도 하고, 꽃잎이 제게 큰 피해를 준 건 아니니까 그냥 털어낼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발을 슬쩍 움직였다. 그러자 구두에서 내려온 꽃잎이 공중에서 빙글 돌아 드레스 밑단에 내려앉았다.

클레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 말했다.

“작고 예쁘다고 무시하면 보다시피 기어오르지.”

매혹적인 웃음을 지은 클레어는 내 드레스를 살짝 건드려 꽃잎을 바닥으로 털어냈다. 그리곤 구두로 분홍빛 장미 꽃잎을 짓밟았다.

그 상태로 발을 바닥에 비벼 꽃잎을 완전히 으스러뜨리고서야 클레어는 발을 뗐다.

구두 밑창과 장식용 석재에 갈린 꽃잎에서 물이 나와 날리긴커녕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하는 모습.

클레어는 산뜻하게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다 내게 말했다.

“아멜. 너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있으면 고작 밀쳐내는 걸로 끝내면 안 돼. 밀쳐내면 사람은 다시 기어오르게 되어 있어.”

“…….”

“짓밟아. 다시는 네 쪽으로 머리를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네가 벌인 일의 뒤처리는 차이엘드가 할 거야.”

언니, 무서워요.

내가 울상을 하자 클레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두드려주면서도 말을 이었다.

“너는 공작 전하의 피앙세야. 따라서 연회장에 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고. 그러니 더 주의해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클레어의 조언을 정말로 실행에 옮기게 될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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