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카일과 한 마차를 탄 나는 살그미 다가오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창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막상 황궁에 간다고 생각하니 불안감이 치솟았다.
원작을 읽은 내게 황궁이라는 장소는 그저 ‘추수 연회가 열리는 장소 1’이 아니라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득실득실한 곳이었다.
‘터지긴 뭐가 터져?’하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간단하다. 연회에 참석한 다른 귀족들, 황태자, 그리고 카일. 이 셋이 터질까 봐 겁난다.
첫 번째. 연회에 참석한 다른 귀족들.
차이엘드 공작가는 그 위세가 드높은 만큼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문이었다.
이런 가문의 경우, 명예에 흠이 가는 작은 불미스러운 일만 터져도 얼굴도 모르는 자들의 입방아에 수도 없이 오르내리기 마련이다.
작은 일도 그러할진대 큰 일이야 오죽할까.
하일 제국의 다른 귀족들에게 카일리안 차이엘드라는 남자는 그저 차이엘드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혈육을 처리한, 두렵고 잔인한 괴물 공작이었다.
차이엘드의 위엄이라는 게 있으니 앞에서 티 내진 않겠지만 모두가 속으로 추수 연회에 등장한 카일을 씹어댈 것이다.
‘뭐, 얼굴만 보고 좋아라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두 번째 시한폭탄은 황태자, 베르들레반 드 하일. 통칭 베르드.
황태자는 현 황제와 그가 가장 아꼈던 첫째 황후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참고로 황제라는 자는 황후가 살아 있던 시절엔 지금과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름도 외우지 못할 만큼의 여자들을 거느리거나 그녀들의 입김에 놀아나는 일이 없었다던가.
베르들레반을 낳고 1년 후, 황후가 죽은 후부터 쭉 여색에 미쳐 있는 지금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들지만.
차이엘드는 황실과 혈연적으로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가문이다. 베르드의 어머니 또한 차이엘드라는 성을 가진 카일의 고모였다.
그러므로 베르드와 카일리안은 꽤 가까운 친척 사이였다. 나이가 같은 둘은 어렸을 때부터 의사와는 상관없이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베르드를 하나뿐인 친구라고 생각했다. 엄하고 잔혹했던 카일의 아버지가 어울려도 된다고 허락한 유일한 또래였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베르드에게 카일이란 그저 자신을 늘 기죽이는 동갑내기 사촌이었다.
황후가 죽은 다음부터 여자에 미쳐버린 황제가 국정을 돌보지 못할 때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이 차이엘드였다.
카일의 아버지는 황제가 미친 틈을 타 고위급 관료들을 모조리 차이엘드의 사람으로 갈아치웠고, 황실이 차이엘드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어린 베르드에겐 그 공작가를 이어받은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원작에서 카일이 전쟁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베르드 때문이었다.
요약하자면 그가 온 귀족들에게 돌리는 자신의 생일 파티 초대장에 몹쓸 짓을 했다. 카일에게 가는 초대장에만 다른 장소를 쓰라고 지시한 것이다.
카일은 하나뿐인 친구라고 여기던 베르들레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호화로운 선물을 준비해 약속 장소로 나가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한참 후, 카일이 진상을 알게 된 건 벙찐 모습의 공작 전하를 구경하러 온 황태자 무리에게 둘러싸였을 때였다.
그러므로 내가 조심해야 할 세 번째 시한폭탄은 카일리안 차이엘드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베르들레반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키자 카일은 그대로 차이엘드 공작저로 돌아갔다.
그리곤 왜 베르들레반이 자신을 친구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동안 제 앞에서 웃음을 보였는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왜였겠어! 돈 때문이지!’
베르들레반은 황실의 돈줄인 차이엘드, 대부호 차이엘드 공작과 친한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황실이 거리로 나앉을 테니까.
게다가 황제가 미친 듯이 여자를 탐했기 때문에 황실에는 수많은 공주들이 있었다.
‘베르드는 누이동생들을 꽤 아꼈어.’
그들을 다 먹이고 재우고 사치 부리도록 하려면 차이엘드의 돈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카일은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자신의 부를 보고 달려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토록 따르던 돈에 당해보라며 거대한 자본을 일으켜 전쟁을 발발시킨 거다. 파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표정을 우그러뜨리자 카일이 깜짝 놀라 물었다.
“누나. 괜찮으십니까?”
“으음…… 카일.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도 추수 연회에 참석하시나요?”
“……황태자의 참석 여부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연회에 참석하는 누구라도 관심이 있을 거예요.”
“오지 않습니다. 누이들과 도가 지나친 장난을 치다 걸려서 근신 처분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흠…….”
그렇다면 다행이다. 카일과 황태자는 되도록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나는 카일의 손을 꼭 잡고 기도하듯 말했다.
“카일. 세상은 사랑과 평화. 러브 앤 피스예요. 인간은 이 아름다운 세상에 전쟁 따위를 일으켜서는 안 돼요. 알았죠?”
“사랑…….”
카일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경직되거나 움츠러들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연회장에 들어선 카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움직였다.
일국의 공작이 갖춰야 할 예의와 권능을 적당히 보이던 그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이쪽은 추수 연회 후 제 피앙세가 될 다이앤 백작 영애입니다.”
이 몸에 빙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일이 소개해주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높으신 분들’의 자제들이었다.
재상의 딸부터 시작해서 왕실 주치의인 자작의 아들까지. 모두가 카일과 나를 미소로 맞으며 선뜻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이 마치 신입사원이 하늘과도 같은 회사의 재벌 그룹의 회장님을 대하는 것만큼 깍듯한 게 걸렸지만.
예외라 칭할 수 있는 것은 나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레이나 백작 영애였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인사 후에도 말을 덧붙였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서 추수 연회에 참석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일 또한 대답이 나올 줄 몰랐는지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답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께서 베푸는 연회가 아닙니까. 이번엔 특별히 소개할 분도 있고.”
제국의 돈줄인 카일이 말하니 ‘제국의 태양’이라는 칭호도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그렇게 말한 카일은 다시 한번 영업용 미소가 아닌 진짜 웃음을 띤 채로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저와 약혼을 앞둔 다이앤 백작 영애…….”
카일은 또 사르르 웃으며 내 소개를 시작했다. 모조리 칭찬뿐이라 듣고 있자니 민망할 정도였다.
질투와 궁금증이 뒤섞인 시선들을 얼마나 즐겼을까. 황궁에 대해 잘 아는 카일이 나를 포근한 의자 쪽에 데려다주곤 소곤댔다.
“추수 연회는 마음에 드십니까?”
“네, 엄청요.”
책 속 인물들이 원작에서는 망했다는 언급밖에 나오지 않는 나를 인지해주는 게 무척이나 기뻤다.
답을 들은 카일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턱으로 저 멀리에 있던 다른 귀족들을 가리켰다.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제가 카일보다 누나인 거 알죠? 혼자 잘 있을 수 있어요. 와인 마시고 있을게요.”
“……술 취하면 너무 섹시해져서 곤란한데.”
“제 주량은 알고 있고,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여전히 불안한 듯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카일이 곧 산뜻하게 웃었다.
“하긴.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취하면 제가 침대까지 모시면 되니.”
……어째 해결책에 흑심이 낀 것 같다, 남주야.
카일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마도 다른 귀족들과 사업이나 정책 관련 얘기를 하려는 것이리라.
카일의 비즈니스에 큰 관심이 없는 나는 그에게 말한 대로 얌전히 앉아 와인이나 홀짝이려고 했다.
그런 내게 클레어가 다가와 곁에 앉았다.
“공작 전하는?”
“잠시 이야기 나눌 것이 있다고 하셔서요.”
“그렇구나. 맞다, 저쪽에 있는 분수 봤니? 대리석 조각이…….”
무언가가 이상했다.
보통 대화를 나누면 말하는 쪽이 아니라 듣는 쪽이었던 클레어가 별 관심도 없어 보이던 황궁의 실내 장식이나 오케스트라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다니.
마치 내 주의를 끌기 위해 일부러 말을 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한테 숨기는 거라도 있나?’
나는 클레어의 도도하고 섹시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동자로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곤거림.
“아멜리아 다이앤이면…… 그 무너져가는 백작가, 맞지? 집에 돈이 없어서 황궁 출입도 힘들다던가.”
“오죽하면 총기사단장이었던 다이앤 백작이 은퇴를 선언했겠어.”
“공작 전하와 어쩌다 약혼한 걸까?”
그야 남주를 내가 살살 꼬드겨서 역사를 이루는 바람에…….
하지만 영애들이 생각하는 내 약혼 사유는 사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뻔하네, 뻔해. 팔려간 거겠지.”
“하긴. 지위나 재산이 공작 전하쯤 되는 분이 다이앤 영애를 사랑할 리가.”
“제물일까? 아니면……”
“어쨌든 사랑은 아닐 거야.”
그 누구도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내가 팔려왔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헐값에. 일시불로. 할인까지 팍팍 쳐서 거의 짐을 떠넘기듯 떨이로 말이다.
“…….”
무언가 억울한 마음이 스멀스멀 치솟았다. 카일이 나를 사랑할 리 없다는 남들의 평가는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물건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한참 심란해할 무렵, 이야기를 마쳤는지 카일이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영애들의 수군거림을 막기 위해 내 곁을 지키고 있던 클레어는 다시 물러나 파티를 즐겼다.
둘만 있게 되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일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져서 눈에서 꿀이 흐르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다니!
“무슨 문제라도?”
카일이 소곤거렸다. 순간 내 머릿속에 괜찮지만 조금 위험한 계획이 떠올랐다.
이 방법이 먹힌다면 영애들에게 추측이 틀렸다는 것도 알려줄 수 있으리라. 동시에 카일의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카일. 나랑 춤춰요. 왈츠 연습 열심히 했잖아요?”
영 뛰어나지 못한 왈츠 실력을 갖춘 남주에게 보는 사람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춤을 추자고 한다.
물론 그 목적은 ‘우리 친해요.’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그러나 카일은 짜증이나 화를 머금는 대신 눈웃음을 지으며 소곤거렸다.
“영애들에게 어필하고 싶어서 이러시는 것 맞습니까?”
뜨끔. 나는 모르겠단 듯 얼굴을 갸웃했다.
“어필……이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어째 아무도 안 믿는 눈치라.”
대부호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카일의 분석은 정확했다.
게다가, 내가 자기를 이용하는 걸 알면서도 화는커녕 웃기만 하다니.
카일은 더 기다릴 것이 있냐는 듯 내 손을 잡아끌어 사람들의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그리곤 미숙하기 짝이 없…… 는 왈츠를 춰야 하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잘 춰?
리드 못 하는 건 다 연기였어?!
내가 노련한 리드에 당황해 어버버거리자 카일은 특유의 능글맞으면서도 위협적인 웃음을 띤 채로 작게 물어왔다.
“저라는 패를 이렇게밖에 못 쓰십니까?”
“……네?”
“레이디 클레어가 말했을 텐데. 다신 같은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짓밟아야 한다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카일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 같았다.
“왈츠에서 멈춘다면 우리가 결혼한 다음에도 비슷한 소문이 떠돌 겁니다. 우리 아이들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야 할 거고.”
자연스레 결혼이랑 2세 얘기 끼워 넣는 것 좀 보게!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제게 더 큰 걸 요구하십시오.”
“……내 뺨에 뽀뽀해줘요.”
카일은 픽 웃으며 즉각 내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눈썹을 쓱 올려 보였다.
“겨우 이 정도에서 만족하실 겁니까?”
“으으…….”
나는 주변을 훑어봤다. 뺨에 뽀뽀하는 정도로는 아무도 카일이 날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결국 나는 이기적이고도 도발적인 요구를 입 밖에 냈다.
“카일. 키스해줘요.”
“어떻게?”
“남들이 보면 헉 소리 날 정도로 아―주 격하고 진하고 위험하……게.”
나는 말끝을 흐렸다.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눈빛이 완전히 짐승의 것처럼 뒤바뀐 탓이었다.
곧, 그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나를 번쩍 안아 들고 홀을 가로질러 으슥한 복도로 향하며 말했다.
“분명 누나가 해달라고 조른 겁니다.”
“응?”
“그러니까 이번엔 셋 셀 때까지 안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