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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21화 (21/134)

#21

카일은 알맹이 귀족답게 황궁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적당히 으슥하면서도 야릇한 분위기가 날지도.

우리가 향한 곳은 정원 구석의 유리 온실 옆, 네모나게 다듬어진 관목과 관목 사이였다.

황궁 파티 홀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아래로 내려오는 계단을 여러 개 밟아야 했다.

다른 곳보다 저지대에 있어 남들이 스킨쉽을 지켜보게 하기엔 딱인 장소였다.

카일은 매끄럽고 조금 차가운 유리 벽에 내 등을 기대게 한 다음 고개를 푹 숙여 입술을 겹쳐 왔다.

나쁜 장난을 하는 것처럼 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나도 픽 웃음을 흘리며 카일의 숨을 집어삼켰다.

소리가 나도록 내 입술을 빨아들인 카일은 뜨겁고 미끄럽게 침범해 들어왔다.

나는 그의 혀끝을 쪽 빨아들이다 각도를 바꿔 혀를 더 얽었다.

그의 손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살살 어루만졌다. 어느 곳에 집중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손길이 뜨거웠다.

카일이 유리 벽 때문에 뒤로 물러나지 못하는 내게 단단한 몸을 바짝 밀착할수록 멀리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분명 카일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구경하러 온 인파이리라.

카일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입술을 떼고 작게 말했다.

“계획하신 대로 잘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아마도요? 지금쯤 저 사람들 머릿속에 카일리안 차이엘드 이미지도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나는 통쾌한 기분에 보조개가 푹 패도록 웃었다. 그런데, 카일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제 이미지라면……”

카일은 ‘차이엘드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가문을 쓸어버린 괴물’ 이미지를 떠올리는지 우울한 얼굴을 했다가 곧 눈을 반짝였다.

“다른 사람들이 절 다르게 생각했으면 하고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겸사겸사.”

남주가 또 행복 회로를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현실 부정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까.

카일은 입꼬리를 쭉 올려 행복감을 드러내곤 다시 거리를 좁혔다. 순간 꽃이 휘날리는 CG가 보이는 듯도 했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미모에 취하고 탄탄한 몸에 녹다운된 나는 조금 흐트러진 채로 코앞에 있는 조각 같은 얼굴을 감상했다. 그러자 카일의 눈이 반짝였다.

“누나. 사랑…… 읍.”

고백 차단 완료.

입술을 덮친 행동이 과감했는지 멀리서 손수건이 부욱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한참 동안이나 내게 집중했다.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빨아들이다가 각도를 바꿔 다시 고개를 가까이하는 게 황홀했다.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살그미 턱선을 타고 내려와 어깨에 다다랐고, 곧 허리로 흘러내렸다.

……남주야, 많이 급한가 보구나.

“하아…… 카일.”

나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려 키스를 멈춘 다음 속삭였다. 그러자 나와 눈을 마주한 카일이 얼굴을 확 붉혔다.

“카일.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제 눈에 뭐라도 있어요?”

“……홀릴 것 같습니다. 야하기도 하고.”

내 손을 거둔 다음 입술을 지분대며 카일이 말을 이었다.

“누나. 황궁에는 손님들을 위한 빈방이 많습니다. 모두 제 것처럼 사용해도 되고. 원하신다면……”

“어후…… 카일, 연기력이 장난 아닌데요?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겠어요.”

“지금 제가 연기하는 것 같습니까?”

카일이 위협적으로 웃었다. 붉은 눈동자가 예쁘게 반짝거렸다.

얻어내고 싶은 무언가를 발견한 아이의 눈빛처럼 순진해 보이지만 누나는 넘어가지 않는단다.

약혼반지를 끼지 않았는데도 속마음이 들렸다. 물론 나도 혈기왕성할 나이라 좀 끌리긴 하지만.

“카일,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카일이 얇고 길게 뻗은 예쁜 손가락에 내 머리카락을 휘감으며 답했다.

“얼마든지.”

“목이 말라서 뭐라도 마셔야겠어요. 가서 물이나 와인 좀 가져다줄래요?”

“…….”

카일의 등 뒤로 파닥파닥 흔들리는 꼬리가 보이는 듯했다가 이내 추욱 처지더니 사라졌다. 아쉬워하는 것 좀 보게.

“카일, 부탁이에요. 응?”

누나 좀 쉬자. 네 얼굴이 심장에 해롭다.

“……가져오면 제가 먹여드려도 됩니까?”

“그렇게 해요. 천천히 다녀오세요.”

카일은 내 머리를 정리해주곤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누나.”

카일이 시원시원한 걸음으로 추수 연회가 벌어지는 홀 쪽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그곳에서 따라 나와 우리를 구경하던 인파들은 해산되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유리창에 기댄 채 잔디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무슨 놈의 키스가 이렇게……’

역시 여주인공이고 뭐고 내가 카일을 예뻐해 주기로 한 건 탁월한 결정이었다.

무려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내게 빠진 이 상황에서 그의 끝내주는 얼굴과 몸, 목소리와 정…… 력을 내내 밀어내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으리라.

나는 오랜 난제를 해결한 것처럼 상쾌함을 느끼다, 스트레칭을 하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

누군가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분명 구경꾼들은 다 사라졌는데.

대한민국에 살던 나는 그렇지 않았으나 아멜리아 다이앤의 몸은 전직 총기사단장의 딸답게 예민했다.

곧장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흐릿한 시선으로 본다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름다운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한 여성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나 드레스 자락을 보면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분명 남자였다. 남자가 여장을 한 거다. 여성이 갖기 힘든 골격이었고 선이 굵었다.

화룡점정으로 목걸이에 가려졌으나 툭 튀어나와 존재감을 드러내는 목울대를 본 나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왜! 척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여장남자가 엑스트라인 나를 보고 있는 건데!

튼튼한 두 다리로 무작정 달려 거리를 벌린 나는 이쯤이면 되었겠지, 생각하고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여장남자는 맹렬히 나를 추격해왔다.

“야, 거기 서!”

“인간적으로 여장한 상태에서 누가 들어도 남자인 목소리는 내지 맙시다……!”

뒤를 돌아보다 다시 앞을 돌아본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조형물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반사적으로 뜀박질을 멈추곤 주변을 둘러보니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내 뒤가 벽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여장남자가 거친 숨을 헉헉대며 내게 다가왔다.

“학, 학…… 드디어 따라잡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얼굴이 곱상하긴 하지만 분명 남자였다.

“이러지 마세요! 제, 제가 누구인 줄 알고!”

“하아…… 하아…….”

“카,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약혼녀란 말이에요! 차이엘드 공작가!”

빽 내뱉은 말에 밭은 숨을 내뱉던 남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래서 따라온 건데? 네가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약혼녀라.”

“……!”

긴장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지만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남자와의 거리는 가까웠다. 게다가 그는 숨겨둔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제 몸을 더듬었다.

무기…… 인가?

그러나 나는 아멜리아 다이앤, 비록 지금은 파산해 곰 인형 눈알이나 붙이는 신세가 되었으나 한때 전설의 총기사단장이었던 남자의 러블리한 외동딸이었다.

클레어도 말하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나를 위협하거든 다신 그럴 수 없도록 확실하게 짓밟으라고.

“자, 이제 반항은 그만하고. 얌전히 따라와.”

여장남자가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초록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는 순간,

―퍽!

나는 이를 악물고 젖먹던 힘을 짜내 그의 다리 사이를 올려 찼다.

그간 도망으로 단련된 내 단단한 다리가 남자의 고간에 정확히 박혔다. 그는 기습에 놀란 얼굴을 했다가, 고통에 몸서리치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흥. 제가 아무리 얼굴은 청순하고 몸매는 가녀린 세기의 미녀라지만 이 정도 힘은 있다고요. 얌전히 감방에…… 응?”

나는 턱을 추켜올리고 주인공처럼 명대사를 날리려다 멈칫했다. 다리 사이를 붙잡고 뒹구느라 남자의 가발이 벗겨졌다.

그런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왜 이 남자가 황실 직계 혈통의 특징인 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황가에 젊은 남자라면 딱 하나인데.

“…….”

여장하고 추수 연회가 열리는 황궁을 돌아다니다 남의 약혼녀를 따라오는 미친놈이 황태자일 리 없다고 위안하려는데,

[황태자는 모든 부분에서 카일과 맞지 않았다. 특히 도가 지나칠 정도의 장난을 즐기는 그의 모습에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치를 떨기 일쑤였다.]

원작의 한 대목이 머릿속에 좌르륵 지나갔다.

“…….”

아무래도 내가 올려 찬 건 한 사람의 다리 사이가 아니라 하일 제국의 미래이자 황실인 것 같았다.

***

연회장에 있던 모두는 홀로 들어서는 차이엘드 공작을 보고 움찔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비슷한 생각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혈육들을 청소하고 공작 자리를 차지한 괴물이라더니, 순 로맨티시스트…….’

‘공작 전하가 키스 장인이셨을 줄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내 여자한텐 따뜻한 타입이셨어.’

지금의 그는 언제 약혼녀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눴냐는 듯 냉랭한 얼굴로 와인 두 잔을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클레어를 제외한 아무도 몰랐다. 카일이 웃음을 꾹꾹 참느라 무척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아멜.’

카일은 와인을 기다리며 연회 홀을 둘러봤다. 매년 참석하는 추수 연회가 이렇게 즐거운 곳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홀이 공작저와는 다른 분위기로 꾸며진 탓에 그곳을 힐끔힐끔 구경하는 사랑스러운 아멜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도 많아 아멜이 입가에 크림을 묻힌 채로 오물거리는 걸 눈에 충분히 담았다.

아멜이 눈을 빛내며 왈츠를 추자고 했을 땐 기뻐서 몸에 전율이 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아멜이 키스해달라고 했을 때였지만.

“…….”

분명 제 입으로 키스해달라고 했다. 카일은 그렇게 말할 때 살짝 올라가던 입꼬리와 움푹 패던 보조개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용당하는 기분도 나쁘지만은 않군.’

아멜리아 다이앤은 제 평판을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카일의 머릿속엔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얼른 이용가치를 어필해 아멜이 자신의 재산과 몸과 마음을 마음껏 써먹도록 꼬드기리라.

‘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 먹으셨으면 좋겠는데.’

특히 밤에 이용당한다면 더 좋고.

웨이터가 내민 와인을 받아든 카일은 웃지 않으려 입술을 맞물었다.

아까보다 빠른 걸음으로 아멜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며 카일은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황태자가 연회에서 빠지니 황궁도 나쁘지 않군.’

성큼성큼.

카일은 격한 키스를 나누었던 유리 온실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갸웃했다. 아멜이 없었다.

“…….”

또 도망가신 건가.

“…….”

아까 키스가 별로였던 걸까.

앞으로 더 연습하겠다고 눈을 반짝이며 다짐한 그는 곧 들려오는 아멜의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빠르게 다가간 카일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베르들레반이 중요 부위를 손으로 꼭 감싼 채로 바닥에서 바들거리고 있었다.

뭐, 그가 죽든 말든 관심은 없었다. 주가가 요동치는 것도 진정시킬 수 있었고.

하지만 아멜리아가 울상을 하곤 자신을 올려다보는 건 심장에 매우 해로웠다.

“카일…… 어떡해요? 제가 하일 황실의 미래를 박살 냈어요……”

아멜리아가 울먹이며 이름을 불러준다. 그것도 애칭으로. 그 모습을 본 카일은 와인잔을 툭 떨구고야 말았다.

그는 베르드가 고통에 신음하든 말든 아멜을 꼭 껴안은 채로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누나. 제국 하나 세우는 데 돈 얼마 안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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