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황태자 베르들레반 드 하일. 통칭 베르드.
사람들은 이 캐릭터를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쪼렙 악역으로 기억했다.
돈이라곤 쓸 일뿐인 황실의, 철없는 장난질 좋아하는 황태자인 베르드는 카일을 친구가 아닌 돈줄로 생각했다. 공작 집안에게 돈을 타다 쓰는 입장이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베르드는 카일에게만 다른 장소로 향하는 초대장을 보내 차이엘드를 농락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을 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일은 전쟁을 일으키기로 마음먹는다.
……나는 그런 캐릭터의 다리 사이를 걷어찬 거고. 젠장. 어쨌든 제국의 황태자인데. 파멸 플래그가 아니라 사형 플래그를 세워버렸다.
아니, 이건 황태자 잘못도 있다. 아무리 장난기 넘치는 캐릭터라지만 명색이 황태자인데 여장이 뭐야, 여장이!
장난쳐서 근신 처분을 받은 상태라며! 숨은 또 왜 헉헉대서 사람 놀라게 만드냐고!
내가 억울함에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할 무렵,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 우다다 달려왔다.
“황, 황태자 전하!”
“괜찮으십니까!”
“괴한의 습격을 받으신 겁니까?!”
주인이 고간을 붙잡고 바들바들대고 있다는 사실에 기사들은 퍽 놀랐으나 곧 침착하게 범인을 색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색출 작업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저 여자가 내 다리 사이를 걷어찼…… 크흑…… 아직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는데……!”
베르드는 바닥에 누운 채로 나를 가리켰다. 기사들이 곧바로 내게 위협적인 눈짓을 보내왔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리칠 수 없었다. 카일이 나를 꼬오옥 안은 채로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까.
‘……다행이다. 살았어. 역시 인생은 돈과 권력, 그리고 뒷배다.’
카일은 나를 제국법에 따라 체포하려는 기사들의 얼굴을 외울 듯 세세히 바라봤다.
기사들이 주춤 물러나는 게 이해가 될 정도로 위협적인 시선이었다.
“제 약혼녀와 관련된 일이니 차이엘드도 연대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카일은 내 왼손을 꼭 잡았는데, 언제 가져와 끼운 것인지 약지에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들려오는 파멸 예정 연하 남주의 속마음.
「그냥 지금 황가 쓸어버리고 제국 하나 새로 세울까. 누나가 부담스러워하겠지만…….」
카일은 잠시 고민하다 생각을 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읽은 <내 약혼녀를 제일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주는 법>에는 혼수품은 원래 좀 부담스러워야 한다고 나왔잖아.」
대체 얼마나 돈이 많아야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스윗한 책은 왜 또 찾아 읽었어……!
나는 카일의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안 그래도 전쟁은 황태자가 카일을 아니꼽게 바라봤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런데 카일의 약혼녀인 내가 영혼을 담은 올려치기를 시전했고, 카일이 두둔하니 얼마나 얄밉겠어.
으으. 나 때문에 전쟁이 나면 죄책감에 못 견딜 것 같다.
“카일. 일단 태자 전하를 위한 의사를 좀……”
“아.”
카일은 건조하게 대답하곤 뒤따라온 하일드에게 이것저것을 부탁한 다음 베르드에게 다가갔다.
“제국의 작은 태양께 인사드립니다.”
“아까부터 쭉 보고 있지 않았냐? 인사를 왜 이제 해?”
“사태가 긴급한 듯해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카일은 살짝 웃는 것으로 황태자에게 빅엿을 선사한 다음 말을 이었다.
“일단 차이엘드 병원으로 가셔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치료비와 보상금은 걱정 마시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러게 남의 약혼녀는 왜 따라갑니까? 더군다나 여장을 하고.”
그렇지! 잘한다! 더 몰아세워!
“내가 이런 장난 치는 거 하루 이틀 봐? 아무튼, 저 여자는 날 죽이려 들었으니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건 황가의 명예 문제…… 윽.”
황태자는 고통을 느끼곤 다시 몸을 수그렸다. 하일드 집사님이 클레어를 데려온 것도 그쯤이었다.
“……레이디 클레어?”
그녀가 등장하자 황태자는 짐짓 진지한 얼굴을 지으려 노력했다. 그래봤자 멋있지는 않았다.
“…….”
범상치 않은 눈치로 사태를 빠르게 파악한 내 최애는 카일과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황태자의 곁에 꿇어앉았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시여. 괜찮으십니까?”
클레어가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를 위로 쓸어올리며 애잔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크흠…… 네, 누님. 별일 아닙니다.”
저 얼굴을 정면에서 본 남자라면 누구든 황태자와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
“별일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이쪽은 아멜리아 다이앤. 총기사단장이었던 다이앤 백작의 여식입니다. 곧 차이엘드 가(家)의 사람이 되겠지요.”
클레어가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나를 소개하곤 애석하다는 듯 서글픈 얼굴을 했다.
“우리 아멜이 어쩌다 황족의 몸을 상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원칙에 따라 황실의 동쪽 철탑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동쪽 철탑. 거긴 황실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가는 곳이었다. 최소 형이 징역이고 최대가 사형이라던가.
사형도 그냥 사형이 아니라 공개처형이나 능지처참을 당한다고 했다. 만일 황태자가 고, 고, 고…… 자가 되었다면 사형이 당연할 텐데.
하지만 황태자는 되려 손사래를 치곤 말했다.
“사고가 있긴 했지만 제 탓도 있으니 황실의 동쪽 철탑에 구금하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머……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역시 클레어도 차이엘드였다. 먼저 나를 다른 구금실로 옮겨달라고 말하지 않고도 원하는 걸 얻어내다니.
매혹적인 웃음을 지은 그녀가 다시 카일과 눈빛을 교환하고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선 어서 치료를 받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못 움직이겠…… 으윽!”
“걱정 마세요.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나는 클레어가 저승사자라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클레어는 왼쪽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다 손을 까딱여 기사들 몇 명과 함께 순간 이동을 해버렸다.
‘맞다. 왼쪽 귀걸이에 아레테의 결정이 들어 있댔지.’
클레어의 욕망은 자유. 그런 그녀가 부여받은 아레테는 ‘이동’이었다.
황태자가 사라지자 카일과 내 곁에 남은 기사들은 무척 부드러운 어조로 고했다.
“다이앤 백작 영애. 일단 구금실까지는 가주셔야겠습니다. 황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구금 수사가 원칙입니다.”
“구, 구금이요……?”
“네. 원칙적으로는 조사가 모두 끝나고 혐의가 밝혀질 때까지 구금 상태가 유지됩니다.”
“조사가 끝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황태자 전하의 증상에 따라 다를 겁니다. 만일 영애의 행위 때문에 황손이 끊기는 상황이 온다면 혐의가 커지는 만큼 구금이 더 길어지겠지요.”
망했다. 차라리 얼굴을 칠걸. 왜 거길 차서는.
“카일. 저…… 다녀올게요.”
감방에. 내가 한숨을 쉬고 애써 웃자 카일이 손을 꼭 잡고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누나. 금방 해결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카일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게 이번만큼은 반가웠다.
***
황궁 안 황제의 침소.
하일 제국의 황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제 침실을 둘러봤다.
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늘어뜨린 여인들이 사방에서 저를 잡아보라 아양을 떠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큼, 큼…… 어디 그럼……!”
황제가 쿵,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폐하! 안에 계십니까!”
무언가에 놀라도 단단히 놀란 듯 다급한 목소리가 황제를 찾았다. 황제의 비서 노릇을 하는 가고일 백작이었다.
“무슨 일이지? 이 밤에. 연회라면 슬슬 끝나지 않았나.”
“그것이…… 알현을 청한 분이 계십니다.”
“안 돼. 돌아가라고 해. 지금 짐은 몹시 바빠.”
철벽을 치던 황제는 가고일 백작의 다음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알현을 청한 자가 차이엘드 공작입니다.”
“……!”
여인들과 질펀하게 얼크러질 생각만을 하고 있던 황제의 머릿속에 비상이 걸렸다.
그는 재빨리 여인들을 물리고 위엄 있는 정복으로 갈아입었다. 제국의 황제가 신하가 집에 갑자기 찾아온 군주를 맞으러 갈 때처럼 행동했다.
그것도 거리낌 없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카일은 갑자기 찾아왔음에도 고작 5분을 기다려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황제가 무척 서두른 덕이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 죄송합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카일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허허…… 대륙, 아니, 세계의 태양이라 불리는 자네에게 그런 인사를 받으니 낯간지럽군.”
황제는 인사를 기껍게 받으면서도 복잡한 심경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 가고일 백작에게 들은바, 카일이 아끼는 여인이 황실의 하나뿐인 아들, 황태자의 고간을 올려 찼다고 했다.
아들이 고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등골이 서늘했으나 신발을 갈아신을 즈음에 기능에는 이상이 없다는 의사들의 소견이 전해졌다.
‘당연히 그렇겠지. 차이엘드 병원으로 곧장 데려갔다니.’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곳이 아닌가.
황제는 아들이 성적 기능을 상실해 황실의 대가 끊기는 것보다 눈앞의 가지런한 젊은 공작이 더 무서웠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다. 진창에 있으면 누구든 흙탕물에 더럽혀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순리였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어린 나이에도 공국을 빈틈없이 다스리는 고위 귀족이면서 세계 경제의 중심에 있는 자였다.
정치와 경제라는 가장 더러운 진창의 중심에 있는 자, 그건 황제인 자신이 아니라 눈앞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고하고 깨끗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어린놈이 제일 강하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그를 더럽히지 못했다. 우월했고 영리한 데다 결단력까지 있었다. 그것이 모두가 차이엘드를 두려워하면서도 추앙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황제는 처제의 아들이기도 한 그를 오랜 시간 지켜보았다. 그래서 카일이 더 두려운지도 몰랐다.
잔인하기로 유명한 차이엘드의 생존 경쟁에서 가장 불리한 막내아들이라는 지위를 극복하고 공작 자리까지 얻어낸 그였으니까.
“그래. 차이엘드 공작이 내게 무슨 일이지?”
“황제 폐하께 감히 부탁드릴 것이 있어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자네가 아끼는 여인과 황태자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들었네. 걱정 말게. 없었던 일로 할 테니.”
황제가 점잔을 빼며 말했다. 하지만 카일은 얌전히 반박했다.
“아끼는 여인이 아니라 약혼녀입니다. 그리고 없었던 일로 하는 건 원칙에 어긋나니 안 될 일입니다.”
“……무슨 소리지?”
봐준다는데 갑자기 원칙 타령이라니. 무엇을 노리고 있단 말인가.
“원칙대로 그녀를 동쪽 철탑에 쳐넣자는 얘기는 아니겠고. 공작. 무엇을 원하나?”
황제가 아리송한 얼굴과 달리 카일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했다.
“원칙을 어긴다면 그녀에게 불명예가 따를 겁니다. 그러니 원칙을 바꾸길 원합니다.”
“허……”
“황제께서 의회에 황실의 특권을 조정하는 안을 발의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장.”
아멜이 보석의 여지 없이 구속 수사를 받아야 하는 건 같은 범죄라도 황실을 향한 것은 더욱 지엄히 다뤄지는 황가의 특권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그녀를 누추한 감옥에 오래 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의회에 법 개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황제의 발의라면 심야 시간에도 표결을 부칠 수 있었다. 잠을 설쳤다는 불평이 좀 생기긴 하겠지만.
게다가 아멜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다는 걸 보여주면 그 누구도 다시는 다이앤을 무시하지 못한다.
이것이 카일이 노리는 진짜 효과였다.
……물론 누나에게 자신이라는 패를 이렇게 써먹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황제는 고개를 설설 저었다.
“그건 안 될 일일세. 고작 한 명을 위해 황가의 특권을 내려놓으면 황가가 어떻게 되겠나?”
“황가의 특권이라.”
카일은 입꼬리를 형식적으로 올려 보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황제가 꼬리를 내렸다.
“내가 발의한다면 황제파 귀족들은 동의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의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귀족파가 어떻게 나오겠나.”
“그건 걱정 마십시오. 폐하께선 법 개정안을 당장 발의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황제는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의회가 황제파와 귀족파로 나뉘어 있긴 했다. 두 당파 사이에는 아주 작은 차이만이 있었다.
황제파.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명을 받고 황제의 측근이 된 사람들.
귀족파.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명을 받고 귀족을 대표하게 된 인사들.
즉 어느 쪽이나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사람이었다.
제국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젊은 차이엘드 공작의 체스말이었다. 의회를 장악한 카일이니 원한다면 제국법에 따라 황제를 끌어내리고 새 황가를 세울 수도 있었다.
물론 제국의 노른자 땅을 모조리 가진 그가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황제는 알았다.
카일리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유는 하나.
‘후사 문제 때문이라고 했지.’
차이엘드 공작은 아이를 두기를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나락으로 빠트릴까 봐 겁내고 있다는 것을 황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폐하. 제 약혼녀인 아멜리아 다이앤을 닮은 아이가 있다면 귀여울 것 같지 않습니까?”
하고 넌지시 물어온다면.
“……당장 발의하겠네. 의원들을 불러 모으는 건 자네가 하게.”
황제는 청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