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카일이 하일 제국의 황제와 얼굴을 마주한 지 약 세 시간 후.
황제가 먼저 나서 특권을 내려놓고 민생을 살피겠다는 취지로 법안이 통과되었고 황명에 따라 바로 시행되었다.
아멜이 이미 구금되었다면 뒤늦게 바뀐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 무용지물이었겠지만, 다행히 그녀는 아직 구금되기 전이었다.
카일의 노력은 허사가 아니었다.
하일드에게서 아멜은 안녕하며 보석금 또한 지불해 형식적인 조사만 받으면 된다는 답을 들은 카일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다 혀를 찼다.
“츳츳. 어쩌다 차이엘드 공작이 한 여인에게 빠진 건가? 귀여운 구석이라곤 없는 그대를 이렇게 뒤바꿔 놓은 것을 보니 보통 여자는 아닌가 보군. 역시 여자는 위험해.”
보통 영양가 없는 말은 듣고 무시하는 편인 카일이었지만 이번엔 황제의 발언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미동 없기로 유명한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
겨우 황실의 수장이 지금 감히 누구를 평가하는가.
기분이 무척 더러워졌지만 카일은 참기로 했다. 일단 황제와는 혈연관계이기도 했고, 참으면 누나가 상을 주실 테니.
하지만 그냥 넘어가긴 싫었다.
“폐하께서 여자는 위험하다고 말씀하셨으니 손쓰도록 하겠습니다.”
“……뭐?”
“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공주나 고용인을 제외한 황실의 여성들에게 배정되는 예산이 필요 이상입니다. 돌아가는 즉시 손보도록 명하겠습니다.”
황후 사망 이후로 황제의 유일한 낙은 여색이었고 카일은 그걸 막았다. 무척 여유로운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한 카일을 황제가 불러세웠다.
“아니, 그걸 정말 줄일 건가? 내가 심심함에 미쳐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폭군이라도 되실 겁니까?”
카일이 황제를 직시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으나 눈에 살기가 어려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차가운 표정이었다.
“허허, 이 사람이. 가족끼리 왜 이래. 내 내일 아침 정리해 차이엘드 쪽으로 서신을 보내지. 너무 빡빡하게 줄이진 말고.”
황제는 가족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어 혈연을 필사적으로 강조했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카일은 그녀들을 모두 내쫓고 싶었다.
‘약혼식을 마무리하고 천천히 생각해야겠군.’
반사적으로 약혼반지를 낀 아멜을 떠올린 카일은 무심결에 사르르 웃었다.
황제는 방금까지 죽일 기세로 압박을 퍼붓다 갑자기 볼을 붉히는 카일을 보며 ‘저 자식 얼굴에도 혈관이 있었어?!’ 하고 경악했다.
***
“누나 님, 괜찮으십니까!”
“누나 님, 이것 좀 드십시오. 조사가 많이 힘드셨나 봅니다. 그새 야위셔서……”
“저기…… 아직 여기 온 지 세 시간밖에 안 지났거든요? 저 원래 이 시간에 안 먹고요.”
나는 나를 극진히 대접하려 서로 안달복달하는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을 보며 기함했다. 차이엘드의 공주님 대접, 아니, 약혼녀 대접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건의 경위를 진술하는 조사실에는 분명 험악한 분위기여야 했다. 그런데 창문의 철장에는 웬 꽃들이 화사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심지어 조사관은 반짝이가 달린 나비넥타이를 매 무해한 이미지를 필사적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말투는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상냥했고.
대충 우린 차나 미적지근한 물 대신 차이엘드의 쉐프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밀크셰이크가 서빙되었다.
‘……역시 돈이 최고다.’
다이앤 백작저의 침대보다 푹신한 취조실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진술을 마친 나는 혀를 내두르며 지평선을 살폈다.
새카만 점이 보여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지만 내가 기다리던 사람은 아니었다.
“누나, 괜찮으십니까?”
카일이 내 얼굴을 살피곤 철렁한 얼굴을 했다. 그 속마음이 궁금했기에 나는 카일의 허리를 슬쩍 껴안았다.
「그새 많이 야위신 것 같은데…… 얼른 공작저에서 쉬게 해드려야겠군.」
이 사람들은 내가 9시에 잡혀 와서 편안하게 있다가 12시에 풀려났다는 걸 모르시나.
“카일. 겨우 세 시간이었어요. 덕분에 편안하게 있었고. 고마워요.”
차이엘드 만세. 자본 만세.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행입니다. 마차를 불렀으니 곧 올 겁니다.”
“음…… 근데, 카일. 저 카일이랑 같이 못 가요.”
“네?”
카일은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곤 설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속은 복잡했다.
「어째서 같이 안 가시겠다는 거지? 키스가 정말 별로였나?」
「빌어먹을 베르드가 무슨 말이라도 한 건가.」
「아멜……」
애타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카일에게 하일드 집사장님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전하. 조사를 받는 동안에는 거처에 머물러야 한다고 합니다. 관련 법규상 보호자가 인솔해야만 거처로 돌아갈 수 있답니다. 약혼식도 조사가 끝난 후로 미뤄야 할 듯합니다.”
“그 말은……”
“날쌘 말을 다이앤 백작저로 보냈습니다.”
그렇다. 나는 성인임에도 파산한 다이앤의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나 어머니가 서명을 해야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이앤 백작저는 더 잃을 게 없어서 불구속 수사 중에 튈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하일드. 방법이 없습니까.”
카일은 방법이 없으면 만들라는 투였다.
“전하. 그것이…… 상대가 다이앤 경인지라.”
하일드 집사장님이 곤란한 얼굴을 하는 건 또 처음 본다. 나는 이해했다는 얼굴을 한 카일의 손을 살짝 잡았다.
「……다이앤 백작은 원칙주의자니 내가 원칙에 위배되는 짓을 하면 탐탁지 않게 여기겠지.」
「누나의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건 싫은데.」
카일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내 왼손을 바라봤다.
「내가 누나의 법적 가족 역할을 못 한다는 말인가.」
「……역시 얼른 결혼을 해야겠어.」
나는 카일이 속으로 내린 결론을 못 들은 척하곤 지평선을 살폈다. 저 멀리서 능숙하게 말을 모는 중년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멜리아!”
총기사단장이었던 페르슈 다이앤. 즉 내 아버지 되시겠다.
곰 인형 눈알 붙이기 생활을 오랫동안 이어갔음에도 전직 총기사단장의 실력은 어디 안 가는지 말 타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카일은 어째 황제를 알현하러 갈 때보다 깍듯하게 인사했다. 마찬가지로 깍듯하게 인사한 아버지가 내 어깨를 털어주며 살폈다.
아버지가 내 옷매무시를 가다듬어주는 탓에 속마음이 들려왔다.
「망할 망나니 황태자가 감히 여장을 하고 내 딸을 위협해?」
인자한 미소와 달리 아버지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나는 사르르 웃는 것으로 그 속을 진정시켰다.
「역시 내 딸이 제일 사랑스러워. 차이엘드 공작에게도 아깝군.」
아빠. 그건 좀 과대평가인 것 같은데요.
어쨌든 다이앤 백작은 카일에게 그간 돌봐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 아멜이 편히 쉬도록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아버지는 고맙다는 뜻을 재차 전하곤 나를 데려가려 했다.
카일은 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며 아버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말에 올라타는 나를 바라봤다.
“다이앤 백작. 바람이 차니 차이엘드의 마차를 타고 가십시오.”
“허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만, 말 한 필이면 됩니다. 그렇지, 아멜…… 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던 내 아버지는 우뚝 굳었다.
“이건……”
아버지는 내 왼손의 반지를 바라봤다.
참 예쁜 반지였다. 얼마나 돈을 들이면 이 작은 반지에 아레테의 결정과 함께 차이엘드의 문양을 새겨넣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반지가 예뻐서 바라보는 건 아닌 듯했다. 아버지의 짙은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버지의 속마음.
「저, 저 다 가진 공작이…… 내게 말도 없이 안 하고 우리 딸에게 날름 약혼반지를 줘?!」
응? 이상하다. 카일은 분명 우리 집에 편지를 보냈을 텐데. 정식으로 교제하자고 말한 그 날 바로.
카일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차마 제국의 돈줄인 위대한 차이엘드 공작에게 물을 수는 없었는지, 아버지는 하일드 집사장님을 으슥한 곳으로 잠시 데려갔다.
아버지는 파산하기 전까지 총기사단장이었고 하일드 집사장님은 기사단장 출신이니 안면이 있나 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일드.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멜리아가 약혼이라니!”
“다이앤 경. 무슨 소리십니까? 분명 약혼을 기쁘게 반긴다는 답신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뭐?”
“분명 다이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단 말입니다.”
잠시 고민한 내 아버지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쿠궁, 하고 놀랐다.
“설, 설마 부인이…… 나 몰래…….”
“아무래도 현명하신 백작 부인께서 대신 편지를 보내셨나 보군요.”
“하일드. 왜, 왜…… 그렇게 생각하지?”
하일드 집사장님은 이유를 몰라서 묻냐는 듯 따끔하게 쏘아붙였다.
“그야 다이앤 경께 사윗감 물색을 맡겼다간 아멜리아 아가씨가 지팡이를 짚을 때까지 홀로 사셔야 할 테니까.”
“…….”
“딸아이가 12월 8일에 태어났다고 128명의 기사들에게 휴가증을 뿌리셨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시말서를 쓰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그건 너무 기뻐서…… 가만. 자네도 그때 휴가증 받아서 놀다 왔으면서 이럴 건가?”
“아무튼, 걱정 마십시오. 차이엘드 공작 전하가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시란 건 경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넨 너무 매정해.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다고. 내 상황이 되면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는 법이라네.”
아버지는 나를 눈에 담고 다시 하일드 집사장님의 뚱한 얼굴을 바라봤다.
“누굴 닮아 저렇게 예쁜지…….”
“1절만 하십시오, 다이앤 경. 재차 말씀드리지만 공작 전하보다 나은 신랑감은 제국에 없습니다. 예법이면 예법, 가문이면 가문! 누구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지요.”
하일드 집사장님과 아빠가 자랑 배틀을 시작했다.
흥미진진하게 둘의 대화를 훔쳐 듣던 내게 카일이 쭈뼛 다가왔다. 돈을 천억쯤 잃은 얼굴이었다.
……아니지. 카일은 천억 정도 잃은 걸로 이런 우울한 얼굴 안 할 거야.
“누나. 밤공기가 차니 마차를 타고 가십시오.”
“하지만 마차는 한 대잖아요. 카일은 뭘 타고 가려고요?”
“일전에 황실에 끌고 왔다 잊어버리고 두고 간 마차들이 많습니다. 마부에게 시켜 가져오라고 하면 됩니다.”
대체 집안에 마차가 얼마나 많으면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인가. 오늘도 차이엘드의 재력에 놀라며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내가 타고 갈 마차가 다가왔다. 아버지는 하일드 집사장님께 등 떠밀리듯 해 나를 마차 안으로 에스코트했다.
“아멜, 가자꾸나.”
“잠시만요. 아버지 먼저 타고 계세요.”
나는 마차에서 내려 죽상을 하고 있는 카일의 손을 잡았다.
「대체 한 달을 어떻게 떨어져 있으라는…… 아멜?」
금세 뒤바뀌는 속마음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나는 결심한 대로 카일을 보듬어주기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카일. 조심히 가요. 마차 고마워요.”
“……한 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금방 갈 거예요. 우리가 연애 기간이 짧…… 아니, 거의 없었으니까 지금 장거리 연애한다고 생각해요. 종종 데이트도 하면 좋잖아요.”
“……데이트?”
처음 듣는 단어라는 투였다. 놀란 나는 손짓을 해가며 ‘데이트’라는 것을 설명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같이 공연을 보러 가거나, 호숫가를 걸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거.”
“아…… 그런 일들을 좋아하십니까? 호수 걷는 거?”
카일은 그런 일을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파멸 예정 남주는 일 중독자라 극도의 효율만을 추구하니까.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호수가 주는 즐거움에 대해 부연 설명했다.
“기분 좋잖아요.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평화가 느껴진달까. 밤에 걸으면 분위기도 있고요.”
남주의 끝내주는 얼굴을 보고 있는 것도 좋고 말이야.
내가 악의를 감추고 살짝 웃자 카일은 여전히 모르겠단 얼굴을 하다가 얼굴 가득 느낌표를 띄웠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 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카일과 슬쩍 접촉해 속마음을 읽어냈다.
「공작저에 호수를 하나 파는 게 좋겠군.」
……아니야, 그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