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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24화 (24/134)

#24

추수 연회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돌아온 다이앤 백작저에는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두 분께서 백작저 살림을 돌보기 시작하셨구나.’

일단 내가 처음 빙의했을 때보다 시설이 많이 나아졌다. 쥐구멍도 많이 막았고, 필요 없는 장식품들을 팔아 마련한 생필품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사실.

지금 내가 있는 다이앤 백작저는 시설이 많이 낡긴 했지만 공간 자체가 넓었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월세를 살던 자취방에 비하면 말이다.

만족했다. 처음에는 말이다.

하지만 제국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공작저에서 한 달을 넘게 지내다 오니 아무래도 적응할 시간이 더 필요한 듯했다.

특히 잠.

다이앤 백작저에 온 지도 일주일이 넘었는데 잠자리가 너무 불편했다.

‘카일의 침대는 과학에 가까운 경지라 등에 닿기만 해도 잠이 솔솔 쏟아졌었지.’

아멜리아 다이앤의 낡은 나무 침대는 어떤 자세를 해도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결리는 뒷목을 통통 두드리며 몸을 풀었다.

“어머, 아멜. 괜찮니?”

어머니인 다이앤 백작 부인이 물었다. 그제야 내가 아침 식사를 위해 식탁에 가족과 모여 앉은 상황인 게 생각났다.

“네, 네! 괜찮고말고요.”

“아가…… 아까부터 백 살 먹은 할머니처럼 끙끙거렸잖니. 정말 괜찮아?”

“네, 그럼요. 연회 때 긴장을 너무 했나. 온몸이 쑤시긴 하네요.”

나와 어머니는 웃었다. 그리고 아버지, 페르슈 다이앤은 불퉁한 얼굴로 으깬 감자를 깨작거렸다.

“차이엘드 공작, 감히 우리 딸의 온몸을 쑤시게 해……?”

잠시 후, 아버지는 본인의 중얼거림에 깜짝 놀라 길길이 날뛰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혀를 츳츳 찼다.

“여보. 아멜이 사랑한다잖아요. 언제까지 애 취급할 거예요? 차이엘드에서 보내온 선물도 그래요. 뜯지도 않고 쌓아두는 건 예의가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 딸을 똑바로 봐요. 얼마나 아름다운 숙녀로 자랐는지.”

어머니는 내 연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나는 장난스레 꽃받침을 해 턱에 가져다 댄 다음 찡긋 웃었다.

“크흠, 크흠!”

애교에 녹은 아버지는 날 한참이나 보더니 아련한 목소리로 옛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부인과 파티에서 처음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호호. 당신도 참. 그게 얼마나 오래된 일인데요. 아멜이 스물네 살이니까 24년 전 일이라고요.”

“그때, 당신이 ‘차 한잔하고 갈래요?’하고 말했을 때…… 내 가슴은 그야말로 터지는 줄 알았다오.”

어머, 어머. 젊은 시절 어머니는 꽤 도발적이셨군.

“그때 당신이 정말 차만 마시고 가려고 해서 제가 얼마나 복장 터졌는지…….”

어머니가 어딘가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가 힐끔 내 눈치를 봤다.

덥석.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급히 눈을 감았다.

“자, 자…… 기도할까? 사랑이 많으신 주님. 오늘도 일용할 차 한잔…… 아니,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가 일용할 양식 주셔서 고맙다는 기도를 밥 먹다 말고 해요, 엄마.

***

오전 일과를 마친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건조한 눈으로 시계를 바라봤다.

‘오전 열 시.’

일주일 전, 그러니까 사랑스러운 약혼녀인 아멜리아 다이앤이 차이엘드 공작저에 머무를 당시 오전 열 시는 카일이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아멜이 레이디 클레어와 차를 마시고 정원을 거닐곤 하는 시간이었으니까. 공국의 정무를 보다 슬쩍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던 아멜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창밖을 아무리 내다봐도 삭막한 정원뿐이었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보고 싶다.’

카일은 철저히 무표정을 유지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멜의 부재로 인한 무기력함을 느끼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나 님이 안 계시니 공작저가 어두침침하네.”

“에휴…… 늘 활달하셨는데.”

“도망을 계획하시는 모습이 어찌나 발랄하시던지.”

고용인들 또한 카일이 뒤에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카일은 유령 같은 걸음을 옮겨 마구간으로 향했다. 발이 날랜 백마를 몰아 뒷마당으로 향하자 매캐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말에서 내린 카일은 구두에 흙먼지가 내려앉든 말든 팔짱을 끼고 그곳을 관찰했다.

‘아멜리아 호수’의 시공 현장을 말이다.

‘……좀 작은 것 같기도 하고.’

카일이 저 멀리 지평선까지 뻗은 호수 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 분위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호수를 만들어내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멜이 다이앤 백작저에 머물러야 하는 약 20일 동안 충분히 완성되리라.

‘망할 베르드 자식이 여장만 안 했어도…….’

카일은 으득 이를 가는 것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행히 날씨와 기타 여건이 따라줘 작업은 날로 빨라졌다.

‘공들인 보람이 있군.’

공이 아니라 돈인가. 픽 웃으며 생각한 카일은 주변을 둘러보다 누군가를 발견했다.

자신과 다름없는 죽상을 하고 있는 클레어 차이엘드였다.

“…….”

클레어 또한 무표정에 팔짱을 낀 채로 ‘아멜리아 호수’ 탄생의 순간을 눈에 담고 있었다.

‘황태자, 그 개자식 때문에 우리 아멜이…….’

물론 표정 변화 없이 황태자를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는 것까지 똑같았다.

아멜에게 선물하려 해외에서 주문한 차나 옷, 장신구들이 일주일 전부터 속속 배달되고 있었다.

선물 받을 이가 없는 선물들을 받는 클레어의 마음은 우울함의 극치였다.

“하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특기인 카일과 클레어가 거의 동시에 짜증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서로를 힐끗 바라보다 호수가 될 적갈색 구덩이로 시선을 옮겼다.

한참 후. 카일이 먼저 운을 뗐다.

“레이디 클레어가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제 약혼녀가 호수를 좋아할 것 같습니까?”

“정원이 옆에 있으니 노을이 지면 아름다울 듯합니다. 아멜은 노을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노을이라.”

노을에 젖은 아멜을 생각하곤 포커페이스 유지에 실패한 카일이 웃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그가 다시 물었다.

“더 더할 것은 없는 것 같습니까?”

“흠…….”

클레어는 잠시 고민하다 카일이 완전히 놓치고 있던 부분을 짚어주었다.

“오리. 아멜이 동물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오리…….”

“하얀색으로.”

“알겠습니다.”

머지않아 차이엘드 공국의 하얀 깃털을 가진 오리들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공작이 아름다운 흰 깃털을 가진 오리를 고가에 매입하겠다는 공문을 발표한 탓이었다.

***

어머니와 조촐한 티타임을 마친 나는 얼마 없는 드레스 중에서도 가장 단정한 것을 골라 입은 다음, 귀족 여성들이라면 하나씩 갖고 있다는 은신용 마법 망토를 챙겨 다이앤 백작저를 나섰다.

황궁 소속 기사들이 나를 황궁의 조사실로 데려가 ‘황태자 고자킥 사건’에 대해 심도…… 는 없고 그냥 시간 낭비일 뿐인 조사를 진행했다.

“하하. 영애는 어쩜 말씀도 이리 재미있게 하시는지.”

오늘 자 질문에 모두 답하는 것으로 조사를 마친 내게 조사관이 말을 붙였다.

황궁 조사실 사람들은 내가 터무니없는 농담을 해도 배를 붙잡고 자지러졌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차이엘드의 수표 때문이겠지.’

산뜻하게 웃은 나는 오늘 외출의 진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차이엘드 공작저에 머무는 동안 내가 놀기만 한 건 아니다. 나름 미래에 대한 준비란 걸 했다는 말이다.

나는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고 싶었다. 기왕이면 큰 돈을.

끝내주는 공작저 생활을 하다 다이앤 백작저로 돌아왔을 때 그 목표는 더 확실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카일만큼 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이앤 백작저의 곳곳을 수리하고 두 부모님이 다시 황궁에 출입할 수 있을 만큼은 벌고 싶었다.

차이엘드 공작저에 있을 때 나는 틈틈이 취업 정보를 모아왔다. 내가 일자리를 구할 때 염두에 뒀던 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근무 시간이 탄력적일 것.

둘째.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접할 수 있는 직업일 것.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내가 대박을 터트리기 가장 쉬운 길은 주식이나 투자였다.

특히 기업의 파산 같은 일은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원인을 덮어둔 탓에 속부터 곪다 터지는 것이라 기미만 포착해낸다면 결과를 예측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좋아. 주식 대박 가자.’

주식 꿈나무가 된 내가 장래희망으로 선택한 직업은 경제 관련 칼럼 기고가였고, 나는 그 첫발을 내딛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면접을 보러 가는 ‘하일 타임스’라는 이름의 중견 신문사는 차이엘드와 관련이 없으면서 그럭저럭 봉급도 괜찮았다.

기고한 칼럼의 반응이 괜찮으면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후…… 가자.”

빙의 전, 취준생이기도 했던 나는 모의 면접을 숱하게 경험했던 몸이라 과하게 떨지는 않았다.

망토를 꺼내 두른 채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곤 하일 타임스 사의 홀로 들어섰는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아…….”

“아니, 당신은……!”

깐깐하게 생긴 남자가 나를 보곤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적대심을 드러냈다.

“다이앤 백작 영애?! 영애가 여긴 왜!”

“그게, 면접 약속이……”

망했다. 눈앞의 남자는 차이엘드 은행에서 우리 집에 압류 딱지를 붙이러 왔을 때 내 가슴팍에 압류 딱지를 붙였다가 카일에게 잘린 그 남자였다.

이름은 모른다. 미안하지도 않고.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이 남자가 나를 싫어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차이엘드 은행에서 잘리고 하일 타임스의 비서 겸 잡무를 맡아보고 있는 듯했는데 어째 나를 보고 짓는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면접이라고? 영애가?”

“네. 경제 칼럼을 쓸 사람을 모집한다고 신문에서 봐서요. 기한 내에 이리로 와서 면접을 보면 된다고 나와 있던걸요?”

“그건 맞지만……”

남자는 새카만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려 나를 훑어본 다음 여전히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나도 남자의 태도가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지 안내해주시겠어요?”

“허…… 그렇지. 그래야지.”

남자는 따라오라는 말을 툭 내뱉곤 성큼성큼 걸었다. 하지만 안내를 따라 이동한 곳은 면접은커녕 손님 접대도 하기 어려울 만큼 비좁았다.

“앉으시죠, 영애.”

“사장님이 이리로 오시는 건가요?”

“그 전에 영애가 칼럼을 쓸 자격이 있는지 테스트를 거쳐야 할 듯해서 말입니다.”

“…….”

“경제 칼럼보다 정원 가꾸기나 자수 놓기에 대한 칼럼을 쓰는 것이 더 어울리실 듯한데. 쫄딱 망하긴 했지만 다이앤의 딸이지 않습니까.”

그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나는 그를 따라 웃지 않았고, 남자는 곧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팔랑.

내 앞에 서술형 시험지처럼 네 개의 질문이 적힌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보여주시지요. 잘난 다이앤 영애께서 얼마나 하실 수 있는지.”

그래프와 전문용어가 섞인 것이 아무리 봐도 칼럼 기고가에게 주어진 문제는 아니었다. 전문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나 풀 수 있을 만큼 어려운 문제였다.

“못 푸셔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제국의 여성들은 대부분 못 풀 테니 주눅 들지 마시고.”

“…….”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중요한 사실을 몰랐다.

빙의 전,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갚은 등록금이 모두 이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지식을 쌓는 데 쓰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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