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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25화 (25/134)

#25

책에 빙의하기 전, 나는 죽어라 공부해 들어간 대학에서 경제학과 무역학을 복수전공했다.

둘 다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수석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닌…… 건 아니었지만 성적 장학금이라면 놓친 적 없었다.

그런데도 대출을 왜 그렇게 많이 받았냐고 묻는다면 서울의 살인적인 집값과 물가 때문이라고 하겠다.

젠장. 다시 생각해 봐도 대출금 다 갚고 빙의한 건 너무 억울하네. 공부하면서 생활비대출까지 싹 갚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뭐, 지금 포기하고 나가신다면 다이앤 영애께서 이곳에 온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명예는 지켜 드리겠다는 말입니다.”

의자에 앉아 문제를 내려다보는 내게 남자가 말했다. 대출금을 떠올린 내 얼굴이 많이 어두웠나 보다.

“뭐, 쫄딱 망한 다이앤 백작가에 지킬 명예라는 게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만.”

남자가 주름이 자글자글 돋보이도록 눈웃음을 쳤다. 나는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느끼며 펜을 쥐었다.

관련 지식이 없다면 표와 숫자, 낯선 기호들에 겁먹고 나가떨어졌을 법한 문제들. 하지만 학부 4년 동안 개처럼 구른 내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망설임 없이 문제 아래에 답을 써 내려가자 콧수염 모양을 잡고 있던 남자가 멈칫했다.

“이 무슨……”

“겁을 주셔서 무척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어렵지 않은걸요?”

나는 일부러 상큼하게 웃은 다음 작게 덧붙였다.

“아, 죄송해요. 보는 사람에 따라 어렵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일인데. 제 생각이 짧았네요.”

주먹 쥔 남자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못 본 척 나머지 문제들의 답을 빠르게 적었다.

위의 세 문제와 달리 마지막 문제는 조금 까다로웠다.

가상의 회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보고 나라면 이 회사에 자금을 투자할지 말지를 결정하고 그 이유를 기술하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내가 멈칫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영애.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놓고 문제를 못 푸는 겁니까? 사실 앞의 세 문제는 긴장 풀라고 낸 거지. 마지막 문제가 칼럼을 쓸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진짜 문제란 말입니다.”

“그럼 문제를 똑바로 주세요.”

“……뭐?”

“특정 회사에 투자할지 말지는 회사의 주력 사업이나 매출만 보고 결정하는 게 아니니까요. 재무제표를 봐야 회사 재정 상태를 알죠.”

“재무…… 뭐?”

남자는 재무제표가 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고작 이 정도 정보를 가지고 투자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도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얄밉게 생긋 웃자 남자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나는 마음을 읽기 위해 문제지를 그에게 내미는 척하며 손을 살짝 스쳤다.

「나이도 어린 년이 차이엘드라는 뒷배만 믿고……!」

읽어낸 속마음이 격했기에 나는 그가 손을 들어 올리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휙―!

난데없는 손찌검을 가볍게 피한 나는 힘을 역이용해 그를 책상 위로 눌러버렸다.

총기사단장 집안 딸은 근력이 상당한 편이기도 했거니와 남자가 너무 비실거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때리려고 할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당신이 출제한 것도 아닌데.”

내가 쏘아붙이자 남자는 길길이 날뛰었다. 온화한 음성이 들려온 것도 이쯤이었다.

“출제자는 나일세.”

나와 내가 짓누르고 있던 남자는 곧장 소리가 나는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무척 귀여운 인상의 중년 신사분이 서 있었다. 큰 체격에 배가 나오고 끝이 동그랗게 말린 수염까지 기르고 있어 무척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내게 목인사를 건넨 그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와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폴. 다 지켜보고 있었네.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다니. 자넨 해고야.”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 나는 짓누르고 있던 남자, 폴을 놓아주었다. 폴은 해고 통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 참……! 사장님, 저를 이딴 식으로 대하신 걸 후회하실 겁니다.”

쿵!

폴이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책상을 쳐 위협했다. 하지만 중년의 신사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이었다.

“허허, 폴. 나는 몸싸움이 싫네. 내가 싸움만 했다 하면 상대가 꼭 못 일어나더라고.”

“……!”

“이 친구야, 그러게 남의 회사에서 결례를 범하면 안 되지.”

중년의 신사가 한 대만 맞아도 골로 갈 것 같은 우람한 손으로 폴을 내보냈다. 그리곤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거, 아가씨께 무례를 범했군. 나는 하일 타임스의 사장, 프링글스 샤르테일세.”

이름과 얼굴을 들으니 자연스레 모 감자 칩의 캐릭터가 생각났다. 반사적으로 아멜리아 다이앤이라고 소개할 뻔한 나는 잠시 멈칫했다.

앞으로 쭉 일하려면 가명과 가짜 신분을 사용하는 것이 낫겠다,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좋아. 가명을 사용하자. 흔하디흔해서 이름만으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도록. 샘, 밥, 앤, 존 중에 하나가 좋겠어.

“저는 앤 스미스입니다. 프링글스 사장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좀 뜬금없긴 했지만 하일 제국의 수도에만 천 명은 있을 것 같은 흔한 이름이었다. 그만큼 의심을 사기 어려운 이름이기도 했다.

프링글스 사장님은 빙긋 웃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앤 양이라고 불러도 되나?”

“물론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라면…….”

“폴이 낸 문제는 칼럼 기고가가 아니라 전문 분석 논객을 모실 때 쓰는 문제지지. 아가씨는 그걸 멋지게 풀어냈고. 그러니 칼럼을 쓸 자격은 충분해.”

프링글스 사장님이 귀여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앤. 우리 신문, 하일 타임스에 칼럼 기고가로 함께해 주겠나?”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에서도 못 했던 취업을 했다. 그것도 사장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비록 엑셀 자격증과 토익 점수는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나는 격앙된 얼굴을 몇 번이나 끄덕였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실력을 지닌 아가씨가 있을 줄이야. 앞으로 지켜보겠네.”

나는 차이엘드의 약혼반지가 자리하고 있는 왼손을 철저히 숨긴 채로 악수에 응했다.

“오늘은 내가 일이 있으니 다음에 차나 한잔하며 일정을 논의하도록 하지. 내 비서에게 말해둘 테니 필요한 서류들을 작성하고 가시게.”

***

나는 응접실에서 필요한 서류들을 작성한 다음 하일 타임스의 건물을 빠져나왔다. 원래 칼럼 기고가라는 직업은 원고를 보내면 건수에 따라 돈을 지급받는 식이었다.

하지만 나를 좋게 봐준 프링글스 사장님은 매달 정직원만큼의 월급을 줄 테니 앞으로 3년간 하일 타임스에만 칼럼을 기고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여러 곳에 투고한다면 정체를 들킬 위험이 커져 그럴 생각도 없거니와, 3년 동안은 일 끊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이니.

게다가, 하일 타임스라면 분명 원작에서 전쟁이 끝났음을 대서특필한 신문이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일으킬 전쟁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불굴의 신문사라는 이유만으로도 이곳에 뼈를 묻을 가치는 충분했다.

‘아, 바람 좋고 볕 좋고……’

나는 느긋한 기분을 한껏 느끼며 다이앤 백작저까지 걸어가려고 했다. 교통비도 아낄 겸.

취업 성공을 자축하려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생각뿐이던 내 앞길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대낮에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상종하기 싫은 이 인간은…….

“아멜리아 다이앤. 잠깐 나 좀 보지. 수상한 사람은 아니니 걱정 말고.”

베르들레반 드 하일. 황태자다.

변장도 허술해 얼굴이 다 보이는 데다 목소리까지 들으니 확실해졌다. 여장을 했다가 나한테 중요 부위를 걷어차인 또라이.

나는 겁먹은 척 도망가려 마음먹었다. 황태자가 변장을 했고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니 전하인 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꺄악! 이거 놓으세요!”

국어책 읽기 비명을 지른 나는 냅다 도망을 치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윽…… 진짜…… 난 너 때문에 뛰지도 못하는데……”

다리 사이를 붙잡고 애처롭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디는 황태자를 보니 어쩐지 짠해져서 도망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뭐랄까, 양심에 찔린다. 어쨌든 이 인간은 나 때문에 입은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나는 황태자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다가가 물었다.

“저기…… 누군진 정말 모르겠지만 저한테 무슨 일이세요?”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고, 장소를 옮기지.”

나는 황태자가 날 으슥한 뒷골목의 무너져가는 오두막으로 납치라도 할 줄 알았다.

“근처에 딸기 케이크 끝내주게 하는 카페가 있어. 따라와.”

하지만 베르드는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작가가 작정하고 만든 개그 캐릭터이자 쪼렙 악역일 뿐이었다.

‘하긴. 진짜 악역은 바다 건너 제국에 따로 있으니.’

카페로 자리를 옮긴 베르드는 여전히 로브를 쓴 채로 딸기가 들어간 이런저런 디저트들을 한가득 시키곤 종업원에게 팁까지 두둑이 지불했다.

……저게 다 카일 돈 아냐. 황태자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맛집 탐방하는 데 차이엘드의 돈이 쓰인다니.

베르드는 잠시 목적을 잊은 듯 딸기가 듬뿍 얹힌 디저트들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놈의 황태자가 독살 위협 같은 건 고려하지도 않고 이렇게 태평한 것일까.

덕분에 나도 안심하고 맛있는 디저트들을 먹을 수 있었다. 얼마나 당 섭취에 열을 냈을까. 베르드는 딸기 요거트 셰이크를 마시던 입가를 톡톡 닦곤 엄중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고 내게 왔다.”

‘네가 그 황태자 전하시잖아요.’

하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놀란 얼굴을 지어 보인 다음 굽실거리는 연기를 했다.

“큼큼.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나를 보낸 것이니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기만 하면 된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까? 그냥 날 황궁으로 불러서 물어보면 될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베르드의 입에서 나온 질문을 듣자 지금 상황에 진지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직감했다.

“아멜리아. 너는 왜 카일리안 차이엘드와 약혼했지?”

“……무슨 의미에서 하시는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국의 귀족이면서 카일리안 차이엘드에 대한 소문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아무리 다이앤의 여식이라고 해도.”

“…….”

카일에 대한 소문이라면 분명 공작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가족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리라.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다른 꿍꿍이가 있나 본데.”

“그런 건 아닌데…….”

“황태자 전하의 우람한 그곳을 걷어찬 것으로 미루어볼 때, 네가 황실을 위협하기 위해 차이엘드 공작에게 접근한 것이라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인 것 같은데요.

제 망한 추리에 심취한 황태자는 급기야,

“아멜리아. 그대는 ‘아레티스트’ 소속인가?”

하고 묻기까지 했다.

그럴 리가요. 거긴 여주가 속해 있는 용병 집단인데. 저는 가까이 가본 적도, 아직 원작 여주인 바네사를 본 적도 없답니다.

황태자는 한참이나 내가 괴물이라 불리우는 카일에게 접근한 이유를 추리해댔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에 나온 것처럼, 베르드가 카일을 정말 돈만 많은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게 드러났으니까.

“아, 알았다. 내가 가장 뻔한 수를 잊고 있었군. 아멜리아 다이앤, 그대는 차이엘드의 돈을 노리고 그 괴물에게 접근한 거지?”

이쯤이면 카일을 감정도 없고 상처도 받지 않는 ATM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카일이 없는 자리에서, 그것도 표면적이긴 하지만 약혼녀인 내게 이렇게 말해 놓고 나중에 카일을 만나면 살갑게 웃으며 돈을 타갈 것을 생각하니 역겨웠다.

이러니 카일이 폭발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황가를 쓸어버리지.

나는 베르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조금도 찔리지 않는다는 눈치라 더 속이 상했다.

카일은 나름 친구라고 생각했던 베르드가 자신을 돈줄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의 충격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고 파멸을 맞는다.

그러니 내가 지금 베르드에게 경고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황태자 전하의 사신께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베르드는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나는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주어 말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돈이나 재산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감정이 있고 상처도 받는 사람.”

“……뭐?”

“차이엘드 공작 전하를 돈 많은 괴물로 생각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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