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베르드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벙찐 얼굴을 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베르드는 한참 후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이앤 영애는…… 그 괴물을, 아니, 카일리안 차이엘드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자신이 말하면서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이미 눈앞의 황태자에게 신물이 난 나는 어떻게든 엿을 먹이고 싶다는 마음에 절절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진, 진짜로……?”
“예. 제겐 소중한 존재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훌륭한 미남은 흔하지 않은 데다 카일은 상처가 많아 보듬어주고 싶었다.
카일은 모두를 제 휘하에 둔 듯했지만 정작 진짜 자기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단 하나도 두지 못했다.
제 편이라고 생각했던 둘째 형도, 눈앞의 망할 황태자도 모두 그를 도구로만 사용했다.
그러니 나라도 당분간은 편을 들어줘야지. 상처받은 사람은 할 수 있는 선에서 보듬어주는 게 어른의 도리였다.
그동안 열심히 평화가 최고라고 세뇌하면 전쟁도 일으키지 않을지 모른다.
“질문이 끝났다면 이만 일어나도 될까요?”
내가 명료하게 묻자 베르드는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은 하고 가지 마. 나 케이크 더 먹고 갈 거야.”
***
그날 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차이엘드 공작저의 포근한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었다. 열이 나는 것도 같았다. 열이 나나 이마를 짚어 확인해줄 아멜도 없었다.
“아멜리아 다이앤.”
약혼녀의 이름을 작게 읊조린 카일이 위스키를 한 잔 따른 다음 창틀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복잡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장면’을 보고 들었으니.
오늘 낮, 카일은 보상금 지급을 핑계로 말 못 할 고통에 끙끙 앓고 있는 황태자의 처지를 확인하러 황궁으로 향했다.
미리 확인했을 땐 분명 약속이 없다 했거늘. 황태자는 황궁에 없었다.
카일은 황궁 근위병에게 물어 황태자의 위치를 알 수 있었고, 일전에 그가 흘리듯 언급한 카페를 기억해냈다.
“카페로 가지.”
주인의 명을 들은 차이엘드의 마부는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자 자연스레 약혼녀 생각이 났다.
‘누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카일이 턱을 괸 채로 다이앤 백작저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을 아멜을 상상했다.
자신은 약혼녀와 떨어져 있어 몹시 속이 상했지만 왠지 아멜리아는 아무 일 없이 씩씩하게 생활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날이 좋다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다이앤 백작저에 불쑥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그럴 수 없었다.
‘다이앤 백작…….’
카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찰나였으나 자신을 도둑놈 보듯 바라보던 다이앤 백작의 눈을.
일전에 읽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10가지 방법>과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19가지 조언>에서 공통으로 주장하던 바가 있었다.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녀의 가족, 특히 장인어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아내는 자연스레 당신의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따르기로 한 카일은 하루에 한 번 다이앤 백작저에 선물을 보내고 있었으나 효과가 없는 듯했다.
시무룩해진 그가 다시 아멜을 떠올리곤 사르르 미소 지었다.
‘얼른 아멜리아 호수를 완성해야 그 핑계로 찾아갈 텐데.’
레이디 클레어의 조언을 수용해 하얀 오리도 백 마리나 샀다. 호수에 들고 갈 피크닉 용품들도 색깔별로 구비했다.
이제 공작저 뒷마당의 호수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즐길 누나만 있으면 완벽했다.
‘3주 후면 형식적인 조사도 종료되니까 약혼식을 할 수 있겠지.’
카일이 즐거운 상상을 하며 잠시 긴장을 누그러뜨렸을 때였다.
―덜컹!
“이, 이놈이 왜 이래!”
마차가 심히 흔들리더니만 마부가 곤란한 목소리를 냈다. 말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흥분한 듯 푸르릉거리는 소리만 냈다.
잠시 후, 주변을 둘러보던 마부가 유니콘이라도 발견한 얼굴을 하곤 보고했다.
“전, 전하……!”
“무슨 일입니까.”
“누나 님입니다!”
“……!”
카일은 곧장 문을 열고 누군가를 따라 카페의 계단을 오르는 아멜리아를 바라봤다. 정말 아멜리아였다.
“…….”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찡해졌다. 고작 일주일 떨어져 있었는데도 말이다.
차이엘드의 백마도, 마부도,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하일드도 누나 님을 발견했다는 뿌듯함에 풀어진 얼굴을 했다.
이미 차이엘드의 모두는 아멜리아 다이앤에게 푹 빠져 있었으므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카일은 일반 신사들이 입을 만한 재킷으로 바꿔 입고 성큼성큼 카페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 있었다. 개인적인 약속인데 자신이 끼어들면 누나가 불편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슬쩍 본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분명 황태자, 베르드였다.
‘누나가 왜 베르드와 단둘이……’
이미 아멜과 벽 하나만을 사이에 둔 자리까지 다가온 후였다. 카일이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아, 알았다. 내가 가장 뻔한 수를 잊고 있었군. 아멜리아 다이앤, 그대는 차이엘드의 돈을 노리고 그 괴물에게 접근한 거지?”
베르드가 아멜에게 물었고, 카일은 그 질문을 똑똑히 들었다.
화? 물론 났다. 아무리 냉혈 괴물 공작 소리를 들어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아멜이 베르드의 질문에 동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앞섰다.
돈을 보고 제게 접근한 것이야 상관없었다. 진작 그녀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 하지만 괴물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
카일은 들키지 않도록 찬찬히 일어났다. 아멜의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가 황태자 전하의 사신께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돈이나 재산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감정이 있고 상처도 받는 사람. 차이엘드 공작 전하를 돈 많은 괴물로 생각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아멜리아 다이앤의 목소리였다. 잘못 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또렷하고 우아했다.
카일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자리에 다시 앉았다. 갑자기 가슴에서부터 몸 곳곳으로 간질거리는 기분이 퍼져 나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베르드와 아멜리아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다이앤 영애, 당신은…… 그 괴물을, 아니, 카일리안 차이엘드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진, 진짜로……?”
“예. 제겐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카페에서의 일을 찬찬히 곱씹은 카일은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로 뜨거워진 얼굴을 식혔다.
‘……그동안 사랑한다는 말은 매번 못 들은 척하더니.’
베르드가 자신을 돈줄 취급하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직접 들으니 충격적이긴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충격을 덮을 만큼 아멜리아의 목소리는 강렬했다.
소중하단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누나가 나를……’
솜털 속에 맨몸으로 뛰어든 것처럼 온몸이 간질거린다.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탁!
잔을 창틀에 내려놓은 카일은 코트를 걸치고 곧장 방을 나섰다. 집사장 하일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주인께 인사했다.
“하일드. 다이앤 백작저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준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아멜리아를 따라 카페에 들어갔다가 새빨갛게 익어서 나온 공작 전하였다.
차이엘드의 고용인 모두가 냉혈한 주인님이 오늘 밤, 다이앤 백작저로 향할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했다.
준비는 빠르게 완료되었다. 카일은 가뿐한 걸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바람은 차고 달은 시리도록 푸르렀으나 아무리 찬 바람을 쐬고 달빛을 받아도 끓는 마음이 식지 않았다.
차이엘드 공작은 다이앤 백작저로 가는 내내 다짐했다. 귀찮게 하지 말자고. 그저 아멜리아가 잘 자고 있는지, 그녀의 방 창문만 보고 오자고.
“…….”
사실은 그녀가 깨어 있길 바랐다. 밤잠이 많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창문에 비친 그림자라도 본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카일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눈에 담는다면 껴안고 싶을 것이고, 껴안는다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자신의 절제력을 줄곧 믿어왔다. 어떤 충동도 능히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멜리아 다이앤을 향한 충동은 그녀가 참아달라고 할 때만 참는 것이 가능했다.
카일은 그 기묘한 인내의 이유를 알았다.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그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할 수 있을 만큼.
이렇게 무언가에 안달 낸 적이 없었다.
아멜리아의 눈길이 제게 향하기를 원했다.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그리고 어느 때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늘.
“전하.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카일은 어쩐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답지 않게 망설이는 그에게 하일드가 조언했다.
“공작 전하. 만일 누나 님이 차를 권하시거든 사양하지 마십시오.”
“……차?”
“페르슈 다이앤 경께서 지금의 다이앤 백작 부인에게 넘어간 결정적 한 마디입니다. 유명한데, 혹 들어보신 적 없으십니까?”
‘차 마시고 갈래요?’는 하일 제국의 기사들 사이에서는 꽤나 히트한 야릇한 말장난이었지만 카일은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처음 듣습니다.”
차 마시고 갈래요? 하고 묻는 누나라니. 이뤄질 수 없는 장면인 줄 알면서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카일은 이웃이 발견하면 소란스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마차를 잠시 물린 다음, 다이앤 백작저의 앞까지 조심스레 걸어갔다.
일전에 들어가 본 적이 있어 아멜리아의 방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다.
‘깨어 계시나?’
닫힌 창문에 오렌지색 빛이 뭉개져 있다. 촛불이나 전구를 켠 것이겠지. 카일은 평화로운 아멜의 방을 눈에 담다 눈을 가늘게 떴다.
‘……누나?’
순간이지만 약혼녀가 빼꼼 자신을 바라봤다. 카일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
그러자 아멜이 쏙 자취를 감추었다.
창문에 드리웠던 오렌지색 빛도 사라졌다. 정적이 사위를 감쌀 때, 카일의 머릿속에 쓰디쓴 가정이 들었다.
어쩌면 아멜리아가 자신을 못 본 척하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방금까지만 해도 황홀감만을 느끼던 가슴이 쓰라렸다. 둘째 형이 칼을 들고 찾아와 골반 부근을 찔렀던 때도 꼭 이런 기분이었다.
아프다.
늘 평균에서 조금 들뜨거나 조금 가라앉던 기분이다. 제 기분이 이렇게 정점에서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가라앉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
배움을 위한 것이라기에는 아멜의 반응이 너무 아팠지만.
카일은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애당초 약속도 잡지 않고 불쑥 찾아온 게 잘못이다. 자신도 홀연히 사라진 아멜을 본 적 없는 척 굴면 된다.
모른 척한다면 아멜리아는 이전처럼 굴어줄 것이다. 절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지만 싫어한다는 말도 하지 않으리라.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마음을 다잡은 카일이 마차 쪽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카일!”
입 모양을 벙긋거리는 듯 아주 작은 목소리. 그러나 분명 아멜리아의 것이었다. 카일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실내용 슬리퍼와 잠옷을 입은 채로 방긋 웃는 아멜이 있었다. 손에는 약혼반지를 낀 상태로.
“……누나. 안 주무십니까?”
카일은 쪼르르 다가가 그녀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코트 단추를 풀어 그녀를 품에 감싸 안았다.
“카일이 없으니까 잠이 안 오더라고요. 바로 들어오라고 못 해서 미안해요. 아래층에서 부모님이 자고 계셔서 반대쪽 창문 사다리로 내려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아멜은 등 뒤로 포개지는 카일의 코트 자락과 단단한 팔을 느끼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그의 눈가와 뺨이 불그스름했다. 계속 눈을 마주하고 있자 석류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에 물기가 어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련했다.
“카일? 울어요?”
“…….”
카일은 말없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고작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했을 뿐인데 미칠 듯이 행복했다. 눈가에 뜨겁게 차오르는 게 눈물이 아니라 사랑인 것 같았다.
아멜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환하게 웃는 카일을 보며 다른 생각을 했지만.
‘어떡해. 많이 추운가 보다. 와…… 근데 잘생긴 남자가 우니까 섹시하다.’
아멜은 카일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 온기를 나눠주었다. 너무도 차가웠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카일. 잠깐 들어와서 차 마시고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