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네. 차 마시고 싶습니다.”
카일이 여전히 나를 코트 안으로 껴안은 자세로 말했다.
그제야 잘난 얼굴 속 촉촉한 눈망울에 취해 야릇한 대사를 뱉고야 말았다는 자각이 들었다.
차 마시고 갈래요…… 라니.
‘이 대사, 다이앤 백작 부부가 아멜리아를 창조하던 역사적인 밤에 써먹었다는 그 대사잖아.’
나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곱씹었다.
베르드와 딸기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그다음부터 자정이 가까운 시간 동안 쭉, 다이앤 백작저의 빚에 대해 고찰했다.
여담이지만, 역시나 이 집안의 파산은 아버지, 다이앤 백작이 절친한 벗의 사업 자금 대출에 연대보증을 서준 탓이었다.
일찍 잠드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방으로 들어온 나는 앞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 빚을 갚을지 세부 지침을 세웠다.
자정이 다 된 시각에야 겨우 마무리하고 잠들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심각하게.
망할 다이앤의 침대가 내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몸과 머리를 써 피곤한 하루인데도 말이다.
‘공작저에서 카일의 팔을 베고 누웠을 때는 그렇게 잘 오던 잠인데.’
기분전환 겸 창가로 다가가자 언제 온 것인지 모를 카일이 내 쪽을 아련한 눈길로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날이 쌀쌀해 사다리를 타고 급히 내려왔더니 품 안으로 포근하게 나를 품어 안았다. 발이 시리지 않냐며 제 발등을 밟고 올라서라는 것을 겨우 말렸다.
나는 카일의 바람직한 허리에 팔을 감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아직도 카일은 애틋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달콤한 속마음이 들려왔다.
「……아멜. 사랑해.」
“으윽…….”
“누나, 어디 아픕니까?”
심장이요. 심장이. 얼굴 감당하기도 버거운데 속마음은 왜 또 이리 애틋하세요.
나는 카일의 품에서 내려와 그를 다이앤 백작저의 뒤뜰에 있는 사다리로 데려갔다.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내 방 옆 복도에 도착한다. 언제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았다는 게 문제지만.
카일은 사다리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나무 사다리를 톡 건드리자 썩은 나뭇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누나. 이걸 타고 내려오신 겁니까?”
“그럼요. 부모님 두 분이 다 계시는데 당당하게 애인 만나러 나올 깡은 없다고요. 너무 늦은 시간이잖아요?”
「사다리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데…… 누나는 날 만나러 목숨을 걸고 내려온 건가.」
「그나저나…… 애인이라니.」
카일의 양 뺨이 화르르 붉어졌다. 이미 추위에 얼어 불콰한데 아예 피가 몰려버린 듯했다.
……붙어 있으면 안 되겠어. 속마음 들리는 것 때문에 미치겠다.
“카일. 먼저 올라갈게요. 따라 올라올 수 있죠?”
나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사다리를 밟았다. 공작 전하라는 고상한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카일은 능숙하게 사다리를 타고 다이앤 백작저에 들어왔다.
어쩐지 부모님 몰래 데이트하는 10대 청소년이 된 기분이라 짜릿했다.
우리는 살금살금 걸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을 때 경첩에서 어찌나 큰 소리가 나던지.
다이앤 백작저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 장면을 들키면 끝장…… 까진 아니겠지만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 되리라는 것은 카일도, 나도 알고 있었다.
“카일. 잠깐만 있어요. 차 금방 내올게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카일은 손님인걸요? 물만 끓이면 되니까…… 어머.”
그제야 나는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아챘다. 밤이라 물을 끓일 수 없는 것이다. 공작저에는 방마다 차를 끓일 수 있는 시설이 구비되어 있지만 내 방은 아니었다.
물을 끓이려면 아래층에 있는 주방에 들어가 불을 살려낸 다음, 끓으면 기차의 경적만큼이나 요란한 소리가 나는 주전자에 물을 채워 넣고 기다려야 했다.
‘그랬다간 동네 사람들 다 깨어나겠지.’
카일은 분명 영혼까지 사르르 녹일 따끈한 차를 기대하고 있을 텐데. 나는 미안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저기, 카일…… 미안한데 차는 무리일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차 마시러 온 거 아니니까.”
어째 말이 좀 위험하게 들린다, 남주야. 흑심도 시커멓게 낀 것 같고.
“미안해요. 많이 추워요?”
“못 견딜 만큼 춥습니다.”
“웃겨. 춥다는 사람이 코트를 벗어서 벽에 걸어놔요?”
“누나, 눈치채셨으면 얼른 이리 오십시오.”
카일이 내 침대에 올라가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연하남의 애교 공세에 못 이기는 척 침대맡에 앉았다가 침대 위로 살그미 몸을 뉘었다.
“안 누울 거예요?”
“…….”
카일은 나를 원해 미치겠다는 달콤한 눈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내 옆에 누웠다.
다섯 명이 뒹굴거리며 자도 충분할 만큼 넓은 공작저의 침대와는 달리 내 방의 침대는 작았다.
내가 누워서 자기에 딱 맞는 크기. 그렇기 때문에 카일은 다리로도, 팔로도 나를 바짝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뻗쳐 오는 팔을 베고 누우니 이제야 잠이 솔솔 오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나는 그새 카일의 곁에서 잠드는 데에 익숙해진 듯했다.
“으음…….”
“편하십니까?”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최고급 라텍스 베개 부럽지 않습니다.
“네. 기분 좋아요.”
내가 무언으로 긍정하자 카일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주며 말했다.
“잠시만 이렇게 있다가 가겠습니다.”
「여기서 자고 가면 누나가 여러모로 곤란해지겠지.」
카일은 혼자만의 힘든 사투를 하고 있었다.
「키스하고 싶다. 귓불 핥고 싶어.」
「……덮칠까.」
내가 놀란 눈을 마주하자 카일은 천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나.”
겉과 속이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남주야.
나는 약혼반지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슬슬 카일에게 이 사실을 말해줘야겠다. 약혼반지에 박힌 아레테의 결정 때문에 내게 상대의 마음을 읽는 아레테가 부여되었다고.
“저기, 전부터 카일한테 쭉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요……”
“저도 사랑합니다, 누나.”
“……?”
이 남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사랑 고백하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카일은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계속 말씀하십시오.”
나는 입술만 뻐끔거렸다. 사랑한다는 말을 코앞에서 들으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약혼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기억을 떠올리려 하자 카일이 내 왼손을 잡았다.
“잘 때 끼고 주무시는 건 불편합니까?”
“음…… 반지에 박힌 보석이 조금 크긴 해요.”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탓에 혼자 힘으로는 절대 뺄 수 없었던 반지이건만. 카일이 빼내자 쑤욱 빠져나갔다.
탁자에 그것을 올려두니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카일의 속마음이 들리지 않아 조금 편해졌다.
“아무리 불편하시더라도 외출할 때랑 약혼식 때는 꼭 제 반지를 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개판 치고 다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차이엘드가 다 물어줘야 할 텐데.”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카일, 개판 치는 거 좋아해요?”
“아니, 그거 말고. 누나가 차이엘드의 사람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약혼식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힘듭니다.”
나는 침울해하는 카일의 볼을 조물조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약혼식이라. 황실의 미래를 걷어찬 건에 대해 조사가 끝나는 3주 후라고 했지.
이 세계에서는 약혼식을 올린 후 여자가 남자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니 나는 3주 후면 차이엘드 공작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카일은 그 사실이 마냥 즐겁다는 듯 어필을 시작했다.
“누나가 호수를 좋아한다고 해서 하나 들였습니다.”
“들였다고요? 물이라도 길어왔어요?”
카일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하나 팠습니다. 뒤뜰에 공간이 남아서.”
“……돈을 너무 막 쓰는 것 아닐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얼른 공작 부인이 되셔서 바로잡아 주십시오.”
카일은 고작 천원 정도 쓴 건데 봐달라는 듯 나를 더 꼭 껴안고 뺨을 살살 비볐다.
제길. 미인계를 쓰다니. 넘어가 준다.
“얼른 주무십시오. 잠든 모습은 보고 가고 싶으니까.”
“잠든 모습만 보고 갈 얼굴이 아닌데…….”
나는 미인계에 대해 복수를 하듯 카일의 셔츠 단추를 툭 툭 풀고 웃었다.
“답답해 보여서. 그럼 이만 잘게요.”
“…….”
“안 돼요. 다이앤 백작저는 방음이 안 돼서.”
“소리가 문제입니까.”
카일은 어깨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아예 머리 위까지 덮어버렸다. 어두컴컴한 이불 아래 단둘이 있자니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누나. 굿나잇 키스 정도는 허락해 주십시오.”
“…….”
내가 눈을 차츰 감자 카일이 입술을 겹쳐 왔다. 누가 굿나잇 키스를 이렇게나 잠이 확 달아나게 할까.
이불이 조금씩 들썩일 때마다 카일은 각도를 바꿔 가며 집요히 내 입술에 파고들었다.
사탕을 먹듯 아랫입술을 살살 녹이다가 혀로 내 혀끝을 문질러 자극한다. 입안을 둥글리듯 매끄럽게 탐하며 쪽,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인다.
-쿠당탕!
한참을 희롱하듯 침범한 카일이 일순간 몸을 움찔했다. 나 또한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알 수 없는 소음에 눈을 떴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 같은데……”
카일과 나는 동시에 눈을 마주했다. 사다리. 우리가 몰래 타고 올라온 나무 사다리가 부서진 것이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미루어보아 분명했다. 그 말인즉슨, 카일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졌다는 소린데.
“이제 어떡하죠?”
내가 키득거리자 카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픽 웃곤 키스를 이어나가려 했다.
“사다리가 부러졌다고? 그 사다리는 아멜 방 옆 복도로 연결되는 거잖아!”
아버지, 다이앤 백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낡긴 했어도 가만히 있던 게 부서졌을 리 없는데…… 여보, 안 되겠어요. 같이 올라가 봐요.”
“어떤 개자식이 이 야밤에 우리 소중한 아멜의 방에 침입한 건진 몰라도 전직 총기사단장의 힘을 보여주지.”
그리고 바로 뒤따르는 계단 오르는 소리.
‘망했다.’
우리는 곧장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카일이 슬쩍 걷어 올렸던 원피스를 끌어 내렸고 카일은 내가 마음껏 머금었던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창밖을 내려다봤다.
“카일, 안 돼요. 거기서 뛰어내리면 다쳐요!”
“하지만……”
“일, 일단 숨어요!”
숨는다고 해도 소박하기 짝이 없는 내 방에는 가구가 많이 없었다. 답지 않게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던 카일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떠올린 건지 방문의 바로 뒤에 숨었다.
좋아, 영리해.
내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아멜리아야!”
“아멜, 괜찮니?”
아버지는 왕년에 ‘엑스칼리버’라고 불리던 무시무시한 검을, 어머니는 머리를 맞으면 즉사할 것 같은 무쇠 프라이팬을 들고 내 방에 찾아왔다.
“으음…… 무슨 일이에요?”
나는 갓 깨어난 연기를 하며 태연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나무문 하나를 두고 오른쪽에는 문 뒤에 숨은 카일이, 왼쪽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이는 게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카일은 어떻게든 공간을 덜 차지하려 애처롭게 까치발을 든 채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얼른 카일을 도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갑자기 사다리가 부서졌지 뭐니…… 누가 사다리를 타고 우리 딸 방에 들어온 줄 알고.”
“엄마 아빠도 참. 어떤 바보가 목숨 걸고 그 사다리를 쓰겠어요? 길고양이가 건드린 거겠죠.”
“그런가? 하긴, 발정 난 고양이들이 밤새 우는 때긴 하지.”
카일은 무척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으나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알 리 없었다.
“얼른 주무세요. 시간이 늦었는걸요?”
나는 살갑게 웃으며 다이앤 백작 부부의 등을 떠밀었다. 어머니는 방을 빠져나갔지만 아버지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저, 저건…… 남자 코트잖아!”
전직 총기사단장의 매의 눈은 카일이 걸어둔 코트를 발견했다. 문 뒤의 카일도 차마 치우지 못한 코트를 애석하게 바라봤다.
“이름 모를 후레자식이 이 야밤에, 소중한 내 딸 방에 무단 침입해서 옷까지 벗었다고?”
아버지는 격분해 칼집에서 서슬 퍼런 칼을 뽑아 들었다.
스릉―!
무시무시한 소리. 나는 황급히 일어나 그 앞을 막아섰다.
“아빠, 아빠! 주님 생각하셔야죠. 용서, 사랑, 그런 거! 아무리 야밤에 무단침입 했다고 해도 전직 총기사단장이 칼을 이런 데 뽑으면 어떡해요!”
“흠…….”
내 말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는 증거물을 채취하듯 코트만 집어 들곤 다시 문 쪽으로 향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할 즈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소중한 내 딸에게 이 야밤에 접근한 망나니 같은 놈은 내 손으로 주님께 보낸다!”
“네?!”
쾅!
아버지가 바로 옆에 있던 문을 내리쳤다. 분명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윽……”
털썩.
문 뒤에 숨어 있던 카일이 모습을 드러내는 참사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