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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28화 (28/134)

#28

어머니와 아버지. 나와 카일. 사람이 넷이나 있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는 황제보다 더 위라는 차이엘드 공작에게 일격을 날렸음에 당황하면서도 왜 카일이 이 시간에 내 방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카일의 풀린 셔츠 단추와 부르튼 입술을 보며 어머, 어머 하고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었고.

카일은 전직 총기사단장의 일격에 어이없게 당해 어지럼증을 느끼고 있었다.

“카일…… 괜찮아요?”

나는 카일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주님한테 직접 보낸다니.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늘에 기도하는 아빠가 할 말이냐고!

내 따가운 시선을 느낀 아버지는 머뭇거리다 함께 카일을 살피기 시작했다.

“차, 차이엘드 공작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버지가 엑스칼리버를 슬쩍 치우며 물었다. 카일은 고통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이앤 백작.”

“…….”

일단 괜찮다는 소리를 들어 안심한 것인지 아버지의 시선은 카일의 셔츠로 향했다. 내가 반쯤 벗긴 셔츠로 말이다.

그 시선에 민망함을 느낀 카일은 순간적으로 나를 감싸줘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백작. 아멜리아가 이렇게 한 게 아니라 제가 벗은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말하면 우리 아빠가 자길 도둑놈 보듯 볼 것까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아, 그러니까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서 이 야밤에 제 딸아이의 방에 사다리를 타고 들어오셔서 옷을 직접 벗으신…….”

아버지는 나라 잃은 얼굴을 지어 보이더니, 곧 의식적으로 ‘딸의 사랑에 쿨한 아버지’를 자처하기 위해 씩 웃었다. 그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

“아니, 아빠. 그게 아니라……”

“괜찮다, 아멜. 이 아버지는 딸의 사랑을 응원하지 걸림돌이 되지 않아요. 그나저나 여보…… 우리 아멜 어렸을 때 앨범이 어디 있지?”

“그 앨범은 어제 당신이 봤잖아요.”

다이앤 백작이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멋쩍게 웃은 어머니도 따라 내려가려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다이앤 백작 부인.”

카일이 사과한 건 그쯤이었다. 내 어머니와 나는 카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차이엘드 공작이 사과라니.

물론 카일은 이성적인 사람이라 객관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을 꺼리는 부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약혼녀의 ‘차 한잔하고 가라’는 말에 넘어온 것 치고는 사과가 너무도 깍듯했다. 강도짓을 하다 현장에서 걸린 느낌이랄까.

하긴. 책에 나온 바에 의하면 카일에게 비즈니스적인 것 외의 인간관계는 미개척지나 다름없었다.

주변에 사람이라곤 돈을 보고 몰려든 자들뿐이니 사적으로 엮인 사람들을 다루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정과 사랑으로 주변을 포용하는 스타일인 우리 엄마는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습니다, 공작 전하. 꼬장꼬장하게 군 제 남편도 사실은 차 한잔하라는 말에……”

“아, 어머니!”

내가 말을 끊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

“흠흠. 다음부터 놀러 오시려거든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오세요. 가족이잖아요?”

“애써 편 들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어머, 사양하지 말아요. 우리 아멜이 날 닮아서 좀 예쁜가. 게다가, 사위 사랑은 장모가 한다잖아요?”

어머니는 내게 찡긋 윙크하곤 ‘귀마개가 어디 있더라……’하는 독백을 하며 내려갔다.

내 얼굴이 다 후끈거리네. 앞으로 두 분 얼굴을 어떻게 본담. 나는 어째 반응이 없는 카일을 살폈다.

“카일,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 일격을 문 하나 사이에 두고 맞았으면 괜찮지 않을 텐데……”

“……아레테를 써서 막았습니다.”

원작의 내용을 아는 나에게는 웃지 못할 일이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아레테는 ‘방어’였다. 공작 지위를 물려받을 당시, 카일에게 가장 절실했던 욕망이 그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설정은 원작에서 딱 한 번밖에 쓰이지 않는다. 카일은 자신의 아레테를 쓰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욕망이 가장 커서 방어의 아레테를 갖게 되었으니 안 좋은 기억이 함께 떠오르는 건가.’

머리 위로 화살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 때도 안 쓰던 방어 마법을 내 방문 뒤에 숨어서 쓰다니. 얼마나 당황했던 것일까.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 세게 맞아서 신경계에 이상이라도 생겼는지 카일은 어딘가 멍했다. 내 말에 반응하는 것도 조금 느렸다.

“카일?”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약혼반지를 끼고 카일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카일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사위 사랑은 장모가 한다고?」

「사위 사랑…… 장모……」

「벌써 날 누나의 남편으로 생각하시는 건가.」

「가족……!」

생각을 마친 파멸 예정 남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깨달음을 얻은 얼굴.

아닌 게 아니라, 카일은 어머니의 말에 꽤나 감동받은 듯했다. 내가 침대에 누워 옆을 톡톡 두드렸는데도 행복에 젖은 얼굴로 눈만 반짝이다니.

“누나. 약혼 준비를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들킨 김에 밤을 보내고 갈 작정인지 몸을 한껏 구겨 내 침대에 들어온 카일이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카일의 몸을 다시 살피며 물었다.

“방금 문 뒤에 숨어 있다 봉변당해 놓고 약혼식을 서두르고 싶다고 하니까 조금 이상해요. 몸은 정말 괜찮은 것 맞아요?”

“약혼식을 서두르는 이유야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제가 얼른 공작저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카일은 미소를 머금은 채 긍정했다. 부끄러운 것인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속마음이 작게 들려왔다.

「저는 얼른 당신의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약혼식은 2주나 남았지만 카일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무언가 놓치는 것이 있을까 봐 조바심을 냈다. 모든 게 있는 차이엘드 저택에 살면서 말이다.

‘대체 약혼식을 얼마나 성대하게 하려고 하는 걸까.’

고용인들은 약혼식 때 쓸 초와 포도주, 기타 등등을 공작 전하께서 직접 확인하신다며 신기하다는 듯 속삭였다. 평소에는 모두 하일드에게 적당히 맡긴다는 것 같다.

‘소박하게 한다고 해도 차이엘드는 차이엘드구나.’

오늘 나는 약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맞출 예정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차이엘드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우리 집 앞에 대기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공작저는 예전과 다름없이 화려했다. 노을이 어리기 전인 대낮인데도 창밖에 어스름히 붉은 무언가가 보이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뒷마당 쪽에서 바람의 흐름을 따라 넘실대는 무언가는 거대한 커튼 같았다.

“저게 뭐예요……?”

나는 오늘 나를 돕기 위해 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기다리던 클레어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멜리아 호수 공사 터야.”

“아멜리아 호수?”

호수를 판다더니 정말 판 걸까.

“거의 완성되긴 했지만 공작 전하께서 약혼식 당일에 공개하고 싶다고 하셔서 가림용 천막을 씌웠지.”

“……호수를 가리려고 저 비싼 자가드 원단을, 저렇게나 많이 샀다고요?”

“그럼. 선물은 타이밍이 중요하잖아?”

세상에나. 저게 다 얼마야. 저 천막을 걷어다가 드레스를 만들어도 스무 벌은 족히 만들겠다.

‘진짜로 호수를 팔 줄이야. 연못도 아니고!’

차이엘드의 돈지랄에 오늘도 혀를 내두른 나는 클레어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드레스는 다 의상실에서 치수를 재고 사는 줄 알았는데 디자이너가 직접 오기도 하나 보다.

아니, 카일이나 클레어가 부른 거겠지. 둘은 원한다면 황제나 황태자도 마음대로 부를 수 있을 테니.

클레어를 따라간 방에서는 디자이너와 조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져온 드레스들을 일사불란하게 마네킹에 입히는가 하면, 원단을 보기 좋게 펼쳐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레이디 클레어!”

삿대질을 하며 조수들을 부리던 남자가 클레어를 발견하고 잇몸까지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레이디 클레어께 인사 올립니다.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귀한 분의 드레스이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클레어는 대접과 찬양을 받는 것이 너무도 익숙해 보였다. 하긴. 어린 영애들은 가뭄에 콩 나듯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클레어의 성숙함과 섹시함을 따라 하고 싶어 안달을 냈다.

클레어가 이 남자의 드레스를 입는 순간 의상실은 입소문의 중심에 오르리라. 정작 본인은 그런 관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오늘 옷을 맞출 건 내가 아니라 이쪽. 차이엘드의 약혼식 드레스이니 최선을 다해줬으면 해.”

클레어가 내 어깨를 감쌌다. 남자의 눈빛이 순간 먹잇감을 스캔하는 맹수처럼 날카로워졌다.

“이분이 소문의……! 큼, 다이앤 영애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영애의 약혼식 드레스를 맡게 된 가르통이라고 합니다.”

쪽-

남자의 두툼한 입술이 내 손등에 닿았다. 썩 좋지 않은 느낌이었으나 인사는 인사이니 내색하지 않았다.

클레어는 미리 준비해둔 듯한 의자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드레스를 맞추는 나를 지켜봤다. 그래. 지켜본다는 표현이 딱 옳았다.

마치 드레스를 어떻게 맞추는지 구경한 다음, 다음엔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고 피드백을 해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무슈 가르통은 조수들을 능숙히 부리며 내 몸에 화사한 무늬의 천과 부채들을 가져다 댔다.

“영애. 특별히 원하시는 디자인이 있습니까?”

“음…… 제가 드레스에 대해 잘 몰라서요.”

“저런.”

나는 책 밖에서 빙의해온 사람이라는 의미였는데, 무슈 가르통의 동정 가득한 눈빛을 보니 다이앤의 딸은 드레스를 맞춰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딱 이다음부터였다. 가르통이 은근히 내 의견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은.

“음…… 그 옆의 것이 제게 더 어울릴 것 같은걸요?”

“어머, 다이앤 영애.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찬사를 받는 제 식견으로 보건대, 영애께는 제가 고른 이 천이 훨씬 어울릴 겁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목걸이에서도, 장갑에서도 반복되었다. 클레어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빠져나간 뒤로는 아예 대놓고 날 무시하는 게 느껴졌다.

“영애. 드레스를 맞춰본 적이 없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제 선택이 옳습니다. 설마, 가격표를 보고 겁내시는 건 아니겠지요?”

“잠깐만요. 아까보다 ‘0’이 하나 더 늘었잖아요.”

“어머, 아까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지금 가격이 맞는 가격이니 확인해 주시길. 어차피 지불은 차이엘드에서…… 큼큼.”

이 사람 좀 보게.

이제야 알겠다. 내가 드레스를 모른다고 무시하는 것도 있지만, 돈을 내는 게 내가 아니라 차이엘드인 걸 알고 이리 행동한다는 것을.

물론 사실이긴 했지만 지금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취급을 받으리라.

“무슈 가르통.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께서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인데요.”

나는 최대한 또렷한 얼굴을 하고 그가 내게 권하던 부채를 집어 들었다. 차이엘드의 약혼반지가 있는 왼손으로 말이다.

“이 반지가 제 손에 있는 한 저를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이게 이 세계관의 절대 반지거든.

“아, 무슈 가르통은 이미 늦으신 거, 알죠?”

나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는 다른 디자이너에게 맡겨도 충분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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