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하지만 무슈 가르통은 내 말을 듣고도 요지부동이었다. 아예 못 들은 척을 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정확하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당신은 해고예요.”
힘주어 말하자 그의 이마에는 핏줄이 불쑥 솟아올랐다. 하지만 겁낼 것 없었다. 여긴 차이엘드 공작저이니.
터벅, 터벅-
그가 내 코앞까지 걸어와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로 나를 위협했다. 그럼에도 내가 주눅 들거나 위축되지 않자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해고라니. 그건 다이앤 백작 영애께서 결정하실 사안이 아닌 듯합니다만.”
안타깝게도 내가 작은 행동만 해도 ‘역시 미래의 공작 부인은 다르다’라며 추켜세워주는 건 차이엘드의 고용인이나 카일의 사람들뿐인 것 같다.
“결정권은 제게 있어요.”
“글쎄요.”
무슈 가르통이 비릿한 웃음을 지을 때였다.
“결정권은 전적으로 우리 미래의 공작 부인께 있지.”
자리를 비우고 돌아온 클레어가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짱을 낀 채 조금도 숙이지 않은 고개. 나도 저 포즈를 배워둬야 할 것 같다.
클레어는 내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뭘 하는지 봤더니만, 약혼반지의 차이엘드 문양이 위쪽으로 올라오도록 돌리고 있었다.
“레, 레이디 클레어……!”
“공작 부인께서 자네를 해고하신다잖아.”
클레어는 내 어깨를 다정하게 감싼 것과는 비교되는 차가운 얼굴로 문 쪽으로 턱짓했다. 그 기세에 눌린 무슈 가르통은 조수들에게 정리하라고 말하면서도 혀를 놀렸다.
“제국 최고의 디자이너인 제 드레스만이 차이엘드의 격식에 맞을 텐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클레어 앞이라 나한테 했던 것처럼 개무시는 못 하겠고. 어디 잘 되나 보겠다는 말은 하고 싶으시고. 남자의 얼굴이 딱 그랬다.
“아멜. 이럴 때 공작 전하라면 어떻게 말할 것 같아? 연습하는 셈 치고 한번 해 봐.”
클레어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속닥거렸다. 나는 카일이 어떻게 말할지를 곰곰이 상상하다 입을 열었다.
“글쎄요. 차이엘드에서 다른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선택하는 순간 그 디자이너에게 제국 최고라는 수식이 붙을 텐데.”
나는 상큼하게 웃는 것으로 무슈 가르통의 대답을 차단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짐을 정리해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어휴, 우리 아멜! 어쩜 배우는 것도 빨라!”
클레어가 나를 어린애 대하듯 마구 껴안았다. 최애에게 숨이 막힐 정도로 꼭 안기는 기분은……
“꺅! 다 언니가 잘 가르쳐주셔서 그래요!”
짜릿해! 최애가 칭찬해주니까 너무 좋아! 나는 클레어의 쓰다듬을 한껏 받으며 정신을 놓았다가 다시 현실을 직시했다.
“그런데 디자이너가 가버렸으니 드레스는 있는 것 중 하나를 입고 해야겠죠?”
“응? 무슨 소리야. 차이엘드의 약혼식인데. 모든 걸 바쳐 걸작을 완성할 테니 제발 자길 써 달라고 하는 디자이너가 백 명도 넘어.”
“그런데 왜 무슈 가르통을……”
“흠. 그건 내 실수.”
담백하게 실수를 인정하는 듯했으나 내게는 클레어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역시 사람 자르는 법 익힐 때는 실습이 최고야. 일부러 개념 없는 디자이너를 데려온 보람이 있어.」
언니…… 이거 사람 해고하는 법 알려주는 과외였어요?
***
차이엘드의 부와 권능은 드레스는 물론이요, 약혼식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순조롭게 준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약 2주 전, 무슈 가르통을 해고한 내가 내로라하는 백 명의 디자이너 중 하나를 고르지 못한 탓에 클레어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드레스 백 벌 주문하고 약혼식 날 끌리는 걸 입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아멜?”
“언니…… 드레스는 유행이라는 게 있잖아요. 몇 년만 지나도 못 입을 텐데.”
“어쩔 수 없네. 드레스 한 번씩 다 돌려 입을 때까지 나랑 같이 파티에 참석하는 수밖에.”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다.
“아멜. 이제 이것 중에 끌리는 걸 골라 봐. 약혼식 날의 직감을 따라야지.”
클레어가 흐뭇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녀의 뒤로는 머리 모양과 장신구를 전문으로 다루는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아름다운 드레스들을 하나하나 구경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저녁에 있을 약혼식에 늦을지도 몰랐다.
“음…… 이게 좋겠어요.”
상체는 몸에 쫙 달라붙게 피팅되어 내 끝내주는 몸매를 부각시키면서도 하체는 반쯤 피어난 장미꽃을 엎어 놓은 듯 화사한 살구색 드레스였다.
클레어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나를 치장시키기 시작했다.
보드라운 브러쉬가 분주히 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무슈 가르통이 내게 보였던 눈빛과 달리 차이엘드의 모두는 눈웃음을 띠고 있었다.
“누나 님, 잠시 손을 이쪽으로……!”
“누나 님! 머리를 손볼 테니 시선을 앞으로 고정해 주세요.”
역시 친절한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최고야. 프로들의 도움을 받은 덕에 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단장을 마칠 수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오른쪽으로 쓸어 느슨하게 땋아 내린 다음 작은 보석들로 장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가 막힌 어깨선이 드러나 거울을 보는 내 가슴이 저릿할 지경이었다.
“예쁘게 꾸며 주셔서 고마워요, 모두.”
“아, 아닙니다!”
“누나 님이 원래 아름다우셔서…….”
칭찬받으려니 민망하네. 나는 괜히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오늘의 일정을 물었다.
“약혼식은 6시에 호수 옆에 마련된 공간에서 진행됩니다. 다이앤 백작저의 사람들도 그 시간에 맞추어 모시고 올 겁니다.”
준비는 원래 4시까지였는데, 고용인들이 워낙 손이 빠른 덕에 2시가 조금 지난 지금 나는 완벽한 복장을 갖추었다.
2시간 정도가 붕 떠버렸다. 그냥 보내기엔 너무 긴 시간인지라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디 보자. 디저트를 흡입할 게 뻔하니 티타임은 보류. 호수를 구경하고 싶지만 카일이 약혼식 때 봐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할 게 뻔하니 보류.
이것저것을 제치고 나니 결국은 가벼운 산책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답답해서 그런데 잠깐 산책을 하고 오면 안 될까요?”
“하지만…….”
“한 시간만요. 응?”
“약혼식을 앞둔지라…….”
“응? 제발요.”
나는 내 주변에 있던 고용인들을 살살 꼬드겼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 넓은 공작저를 자유로이 산책했다간 약혼식에 맞춰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 해서 나는 카일이 업무를 보는 건물 주변으로 범위를 좁혔다.
“그럼 갈까요?”
차이엘드 공작저는 넓었기에 내가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건물이 아직 많았다.
기웃거리며 우편물을 받는 건물 근처를 지날 무렵, 나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저건……’
오줌이라도 마려운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바쁜 눈.
복장이 평범한 신사와 다름없었기에 그저 약혼식 시간을 착각해 공작저에 일찍 도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딱 좋았다.
황실 혈통의 특징인 은색 머리카락만 아니었다면.
‘저 인간이 여긴 왜……?’
베르들레반 드 하일. 황태자다. 물론 황태자도 차이엘드 공작가의 약혼식 초대장을 받긴 했을 거다. 공작저에 그가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행동이 이상했을 뿐이지.
베르드는 내가 지척에 있는 줄도 모르고 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차이엘드의 우편함에 넣었다. 담당 고용인이 아니면 열 수 없는 우편함에 말이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꿰어 넣고 주변을 둘러보는 척 자리를 벗어났다.
정체불명의 종이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추리하던 나는 서슬 퍼런 세 글자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설마 초대장?’
원작의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우편물.
베르드는 카일에게만 장소가 다르게 적힌 초대장을 보내고, 카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만 다른 장소에 나타났다가 웃음거리가 된다.
그리곤 깨닫는다. 베르드가 자신을 정말 ATM으로 보고 있음을.
이상하다. 원작대로라면 베르드가 카일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건 1년 후여야 하는데.
사건이 1년이나 앞당겨진 이유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움찔 몸을 감쌌다.
‘나, 나 때문인가?!’
얼마 전, 난 딸기 메뉴가 유명한 카페에서 베르드에게 면박을 줬다. 안 그래도 카일을 아니꼽게 생각하던 베르드는 나 때문에 더 카일을 미워하게 되었을 터.
화가 났을 테니 차이엘드 공작에게 엿을 먹이려고 마음먹었을 테고, 그래서 카일에게만 장소가 다르게 적힌 초대장을…….
“악!”
이럴 수는 없다. 카일이 그 초대장을 보는 순간 거대한 파멸 계획의 서막이 오르는 거라고. 안 돼!
목이 마르니 마실 것을 가져다 달라며 주변을 물린 나는 우편함으로 달려가 넓고 얇은 구멍에 손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역시나 내 손은 들어가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넣어 보아도 부러질 뿐 이미 우편함 안으로 들어간 초대장을 건져낼 수는 없었다.
“안 돼……”
“무슨 일이십니까, 누나 님?”
내가 우편함을 붙잡고 절망하고 있을 때 하일드 집사님이 나타났다. 나는 장난을 치다 나뭇가지를 안에 빠트렸다는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그 답이 가관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리로 들어간 우편물은 관을 타고 건물 안으로 이동합니다. 우편 담당 고용인들이 나뭇가지를 버렸을 겁니다.”
“그럼 다행…… 이 아니라. 혹시 우편물이 카일에게 가기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보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릅니다. 황가에서 온 것은 도착하자마자 공작 전하께 올리는 편이고.”
하일드 님의 답에 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
“메리필드 무역회사 투자 건은 오늘 안으로 처리하도록.”
재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카일은 그제야 고용인이 전달한 편지에 눈길을 주었다.
황가의 문양이 찍힌 봉인으로 미루어보아 분명 황가에서 온 것은 맞다. 하지만 황가의 심부름꾼이 공작저에 들어섰다는 보고는 받은 적이 없었다.
‘베르드가 직접 왔나 보군.’
결론 내린 카일은 편지를 그대로 집어 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유치한 변장 놀이를 하고 오지 않은 덕에 베르드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베르드는 약혼식이 진행될 호수 근처의 관상용 바위에 기대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불쑥 그림자가 드리웠다.
“……?”
카일의 몸이 만들어 낸 그림자였다. 베르드는 몸을 일으킨 다음 공작 전하를 반기는 척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하면 카일은 늘 픽 웃었다. 그러나 오늘은 싸늘한 얼굴이었다. 베르드의 머릿속에 한 가정이 들었다.
‘아멜리아가 일러바친 건가? 내가 자기를 돈줄로만 보고 있다고?’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그리 신빙성 있는 가정은 아니다. 베르드는 누군가가 괴물 공작을, 카일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카일이 내가 돈 때문에 치근덕대는 걸 모를 놈도 아니고.’
베르드는 카일과 같은 해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황가와 차이엘드 공작가는 가까웠기에 차이엘드 공작이 어떤 과정을 겪으며 성장해 왔는지 잘 알았다.
성장 과정을 안다는 것은 그의 약점을 안다는 것과 같은 말.
“카일. 왜 그렇게 험악한 얼굴을 해? 사람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베르드가 넉살 좋게 말했다. 이것이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약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다 가진 듯한 공작의 곁에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공작도 사람이기에 사람의 온기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그리워한다니. 우스운 말이지. 제 사람을 둔 적도 없으면서.’
베르드는 속으로 비웃으며 카일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쭉 함께해온 사람이다. 그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 공작은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리라.
그러나 황태자의 확신은 잠시 후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찌이익-
카일이 내용을 확인하긴커녕 봉인도 뜯지 않은 황가의 우편물을 찬찬히 찢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