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가차 없이 자신이 보낸 우편물을 찢어발기는 대담한 행동에 당황한 베르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못한 채 카일을 노려봤다.
“너, 너 지금……!”
“베르드.”
카일이 업무차 미팅을 할 때처럼 형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리곤 갈가리 찢은 우편물을 베르드의 손에 툭 얹었다.
“저를 돈줄로 보는 건 괜찮습니다. 진작 알고 있기도 했고.”
“……!”
“하지만 제 약혼녀에게 당신이 나를 돈줄로 보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건 도가 넘는 행동이었습니다.”
황태자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언제나 자신을 마주할 때면 풀어진 얼굴을 하던 카일이 싸늘함과 경멸을 대놓고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건 황가에 대한 능멸이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황가는 눈앞의 남자가 없으면 나앉을 테니.
베르드는 몹시 분했으나 현실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멜이랑 장난친 건데, 그게 네 귀에 들어갈 줄이야. 미안…….”
카일이 말허리를 잘랐다.
“제 약혼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그녀에게 접근하지도, 그녀를 건드리지도 마시고.”
“……공작 전하께서 집착이 심하시네.”
“제가 집착이 심한 건 제 사람이 되어 돈을 퍼다 쓰기 위해 필사적으로 위선을 떨었던 황태자 전하께서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카일. 방금 그 말, 취소 안 해?”
“차이엘드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아는 당신이 이런 실수를 할지 몰랐는데.”
순간 황태자의 시야에 카일의 옷에 박힌 차이엘드의 문양이 들어왔다.
방패 위, 앞발을 든 두 마리의 짐승.
원하는 것이 있다면 죽이고 찢어발겨 얻어내라는 말을 수천 번도 넘게 들었을 차이엘드의 생존자. 그것이 눈앞에 있는 괴물 공작의 정체였다.
덜컥 겁먹은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황태자가 혀를 짓씹을 때였다.
“……!”
멀리서 아멜리아 다이앤이 뛰어오고 있었다. 지금은 카일보다 베르드가 더 그녀를 반겼다. 구원자가 따로 없었다.
베르드는 카일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보곤 자존심도 버리고 슬쩍 물었다. 냉혹한 현실은 현실이니까.
“우리가 싸운 건 싸운 거고, 황실 예산에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툭.
베르드가 친구에게 장난을 치듯 카일의 어깨를 건드렸다. 카일은 아멜을 향해 환한 웃음을 띤 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베르드. 저는 제 개들을 굶기지 않습니다.”
“…….”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웃는 얼굴로 자신의 개가 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내 개가 될 생각이 있다면 약혼녀가 내게 도착하기 전에 당장 꺼져.”
공작은 개를 제법 잘 다뤘다.
***
“카일, 헉, 헉……”
전력 질주를 한 나는 말을 잇지도 못하고 한동안 카일의 어깨를 붙잡은 채 숨을 골랐다. 이 불편한 옷을 입고 뛰었더니 죽을 것 같네.
“누나, 괜찮으십니까?”
카일은 어딘가에서 물을 가져다 내게 주었…… 는데 나는 그만 컵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세상에나.
“……누나?”
카일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내 눈이 광명을 찾았다. 순간이나마 시력이 좌우 3.0을 찍은 기분이었다. 약혼식 날이라지만 이렇게 바람직한 모습이라니.
늘 자연스레 내리고 있던 새카만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린 덕에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선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났다.
옷도 평상시에 입은 것과 다른 턱시도 비슷한 것을 입어주셔서는. 혼자서만 웨딩 화보 속의 배우 같은 모습이라니.
“드시기 싫습니까?”
“먹기 싫냐니…… 지금 당장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서 잡아먹고 싶은걸요. 하일드 집사님한테 카일이 차려입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어쩜 이렇게 예쁠까. 제가 아름다운 것에 유독 약한 편이긴 하지만 이번엔 도가 지나치네요. 저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굳―이 드시기 싫냐고 물어봐 주셨으니 역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서 잡아먹는 게 좋…… 잠깐.”
“……목이 마르실 것 같아서.”
“역시 물 얘기였죠?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나는 카일이 건네준 물을 마시며 이 물이 어디에서 왔는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카일이 약혼의 순간에 공개하겠다며 애지중지 감추고 있던 호수였다.
차이엘드의 부지런한 고용인들이 저녁 식사 준비를 거의 마쳤기 때문에 호숫가는 파티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여기까지 뛰어오신 겁니까?”
“네. 카일이 이쪽으로 갔다고 해서……”
“저를 보러?”
카일이 초롱초롱 눈을 반짝였다. 사실 황태자와 황태자의 초대장이 걸려서 따라온 것이지만 약혼식 날의 분위기를 굳이 깰 필요는 없으리라.
“호수 구경시켜달라고 조르려고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카일은 흠칫 놀랐다. 약 한 시간 후에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었겠지만 이 드넓은 조형물을 숨기는 건 불가능할 테니.
“그럼 같이 걷겠습니까?”
카일이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우리의 틈새 산책 겸 호숫가 구경이 시작되었다.
호수는 사유지에 판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넓었다. 맑은 물과 하나하나 검수해 들여온 듯한 흰 자갈이 뜨거운 햇살 아래 찬란하게 반짝였다.
걸을 때마다 주변의 나무들이 솨아아 흔들렸다. 카일은 내게 날아오는 나뭇잎들을 능숙히 잡아채며 말을 이었다.
“누나. 마음에 드십니까?”
“엄청 마음에 들어요. 특히 물 위를 헤엄치는 저 백조들이…… 저거 백조 맞죠?”
일단 하얗고 아름다워 백조라고 판단하긴 했는데 작다. 다리도 짧고. 우아한 것만 보면 영락없이 백조인데 말이다.
“오리입니다. 하얀 오리. 백조를 더 좋아하십니까?”
“말도 안 돼. 저렇게 예쁜 게 오리라고요?”
“네. 좋아하실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어렸을 때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읽었을 땐 오리와 백조를 어떻게 헷갈리냐며 코웃음을 쳤는데 지금 보니 왜 그랬는지 알겠다. 오리가 이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
나는 눈짓으로 마음에 드냐고 묻는 카일을 향해 활짝 웃었다.
“완전! 마음에 들어요! 게다가 호수 이름이 아멜리아 호수잖아요?”
카일은 부끄러운 일을 들킨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자기가 아멜리아 호수라고 이름을 지어 놓고 부끄러운가 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좋아하는 거 예쁘다.」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아이 이름으로도 호수를 만들어 줘야겠어.」
“정말 예뻐요, 카일. 고마워요.”
「…….」
팔짱을 끼고 걸으며 호수의 수풀과 자갈, 수면에 비친 하늘을 칭찬할 때마다 카일의 속마음은 혼돈에 빠졌다가 백지장이 되길 반복했다.
나는 냉철하기로 유명한 파멸 예정 남주가 덜컥 생각을 멈춰버리는 게 재미있어 끊임없이 칭찬과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호수를 반쯤 걸었을 때였다. 카일은 무언가 중대한 발언을 할 것처럼 걸음을 늦추다 이내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누나. 아름다운 호수는 여기 있습니다.”
나는 기대감에 빠졌다. 카일이 ‘짠 사라졌습니다!’ 하고 외치면 호수가 사라지는 마술이라도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예상과는 달리 카일은 찬찬히 내 허리를 감아 안았다. 늘 물 흐르듯 하던 애정 행각인데도 오늘따라 망설이는 눈치다.
“아멜리아 호수는 항상 여기에 있을 겁니다.”
“…….”
“언제든 공작저에 오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영원히 기억해주십시오.”
아련한 목소리였다. 나는 카일이 무슨 걱정을 하며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체 베르드는 카일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카일 눈빛만 보면 내가 당장 내일 떠날 것 같잖아?’
그러나 이미 나는 사랑받으려 애쓰고 조금의 애정표현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는 카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가 떠날 거라는 걱정은 말아요. 저는 카일 곁에…… 읍”
카일이 그 새를 못 참고 고개를 푹 숙여 키스했다. 예장까지 한 터라 기술점수 10점에 예술점수 10점을 더해주고 싶을 만큼 훌륭한 입맞춤이었다.
내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입술을 깨물고 살결을 녹이듯 입에 머금는 게 느껴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짧게 끝나리라 예상했던 입맞춤이 점점 길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고용인들의 소곤거림도 들려왔다.
“어머, 누나 님…… 갑자기 어디 가셨나 했더니.”
“약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두 분 어쩜…….”
하나같이 제 일인 양발을 동동 구르며 행복에 도취된 목소리였다. 카일은 픽 웃으며 입술을 뗐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방금 누나 입으로 안 떠난다고 했어.」
「……꿈인가.」
「내 곁에…….」
「……꿈이 아닌 것 같은데.」
카일은 만족감을 여실히 드러내며 내 손을 꼭 잡고 묻지도 않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과묵한 편인 그가 대화를 이어가려 웃는 게 보기 좋았다.
“그런데요 카일. 아까 황태자 전하랑 둘이 계시지 않았어요? 무슨 말 했어요?”
초대장이 갑자기 생각나 물은 말이었는데 카일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개, 라고 대답해야 하나.」
나는 눈빛으로 카일을 재촉했지만 카일은 말을 아꼈다. 그렇다면 주워들은 속마음을 이용하는 수밖에.
“아까 언뜻 듣기로는 개 얘길 한 것 같던데.”
“……누나는 청력이 좋은 편인 것 같습니다.”
“진짜 개 얘기했어요?”
“음…… 애완견을 기를까 하고.”
애완견이라니. 나는 눈을 반짝이며 흥미를 보였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개를 기르고 싶었다. 그 꿈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좋아요. 완전 좋아요! 매일 산책도 시켜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뽀뽀해줄 거예요.”
“…….”
“카일?”
“생각해보니 제가 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웬 개털 알레르기. 접촉하지 않아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질투하는 게 귀여우니까 이번만큼은 넘어가기로 했다.
……차려입은 카일의 미모가 무척 훌륭하기도 하고.
우리는 공작저로 돌아가 기다리는 대신 약혼식이 시작될 때까지 호수 주변을 걸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몇 번이고 돌아오고 싶다고 무심결에 생각할 만큼.
시간이 지나자 약혼식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차이엘드 쪽에서 부른 사람들은 대부분 시커먼 정장을 입고 있어서 약혼식이 마피아 집단 정기 모임처럼 보였다.
“아멜리아야!”
“우리 딸!”
다이앤 백작 부부가 도착하자 약혼식이 시작되었다. 조촐하게 하고 싶다는 내 부탁을 받아들여 차이엘드치고는 소박한 규모였지만 주변 장식들이 황실의 추수 연회보다 화려했다.
양가의 초대를 받고 온 손님들이 훌륭한 음식을 나눠 먹고 차이엘드와 다이앤의 약혼을 축하했다.
식사 후, 어스름이 내린 호숫가를 테이블 위의 촛불이 밝혔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특히나 내 왼손을 잡은 카일에게 집중되었다.
“아멜리아 다이앤. 당신을 내 신부로 맞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카일이 손등에 키스했다. 이렇게 예쁜 남자를 사람들은 어떻게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누나, 사랑해.」
카일의 속마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자각했다. 파멸 예정 남주와 약혼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행동이 앞으로 일어나야 할 일의 큰 줄기를 바꿔버렸다는 것을 머지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