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약혼식 후, 나는 차이엘드 공작저에 들어앉아 살기 시작했다. 물론 방은 카일이랑 같이 쓰는 중이었다.
개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각방을 쓰자고 했다가 하늘이 무너지는 걸 본 얼굴을 하길래 철회했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하일드 집사장님의 말에 따르면, 내가 차이엘드 공작저에 들어온 후로 공작저에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단다.
내가 말하자니 부끄럽지만 고용인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다고 한다. 카일과 클레어만 공작저에 있을 땐 숨소리도 죽여서 내야 할 만큼 둘의 신경이 날카로웠다고 한다.
……내가 들어오면 펌프가 터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해도 그럴 수 있다며 웃어넘긴다던가. 이러니 무슨 사이비 종교 지도자 같잖아.
또 다른 변화는 클레어와 카일, 그리고 내가 아침 식사를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원작을 읽은 나는 이 변화가 둘에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았다.
카일은 클레어의 얼굴을 보는 일 자체를 꺼렸다. 클레어 또한 카일과 엮이는 것이 싫어 줄곧 별궁에만 머물렀고. 그런 둘이 나 때문에 아침 식사를 같이하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 이참에 남주와 내 최애의 감정적 교류를 유도해보는 것도 좋겠지. 둘의 사이가 완전히 가까워지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는 건…… 그래. 세상에 둘만 남겨졌는데 하나가 피가 부족하면 기꺼이 수혈 정도는 해줄 정도? 꼭 세상에 둘만 남는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차이엘드라면 어디에선가 혈액을 사 올 테니까.
“누나. 입에 안 맞으십니까?”
“아니에요. 얼마나 맛있는데요.”
나는 금박이 얹힌 디저트를 찬찬히 음미하는 중이었다. 금을 먹을 수 있다는 건 또 처음 알았네. 내가 숟가락으로 금박을 톡톡 건드리자 카일이 흐뭇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금이 마음에 드십니까?”
“금이야 좋긴 하죠.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차이엘드에 금이 많아요?”
내 대답에 클레어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었다. 그 후에 나온 답이 가관이었다.
“아멜. 차이엘드는 대륙 금광의 90%를 보유했어.”
“금광이라면…… 그 금 캐는 곳이요?”
“물론 금도 많지. 금을 가공하는 회사도 많고.”
금광이 많다니. 생각해본 적도 없다. 금이 많냐는 질문은 나 같은 서민들이나 하는 것이었어. 이 집안은 항상 내 상식보다 더 부유하다.
「선물로 금광을 드리는 게 좋겠어.」
카일이 참으로 대부호다운 생각을 하는 게 들려올 즈음이었다.
“식사를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황실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하일드 집사님이 은쟁반에 황실 문양이 찍힌 편지봉투 하나를 들고 왔다. 초대장 일이 생각나 반사적으로 움찔한 나는 카일에게 바짝 다가가 물었다.
“카일. 그 편지…… 제가 열어보면 안 될까요? 제가 언제 황실에서 온 편지를 열어보겠어요?”
초롱초롱. 나는 진심으로 편지 개봉을 원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일단 열어본 다음 망할 황태자의 초대장이면 실수인 척 촛불 쪽으로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카일이 냉큼 편지를 내주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의외였다. 좋아. 다른 작전으로 간다.
“저도 이제 차이엘드의 사람이잖아요. 안…… 될까요?”
“안 될 리가.”
즉답이었다. 나는 ‘아멜리아 차이엘드……’를 무한 반복하는 카일의 속마음을 뒤로한 채 편지를 개봉했다.
음, 그래, 좋아. 일단 황태자의 초대장은 아니었다. 초대장이긴 초대장인데 카일에게 온 것이 아니기도 했고.
“어머, 죄송해요. 이거 언니한테 온 거예요.”
남의 편지를 뜯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받아든 클레어는,
“어머 우리 아멜은 편지도 잘 뜯네. 어쩌면 좋아. 선물 줘야겠다.”
마냥 기특하다는 눈짓만을 보내왔다. 편지 잘 뜯었다고 선물이라니. 내가 유치원생도 아니고. 뭐, 일단 주시면 감사히 받겠지만.
클레어의 붉은 눈동자가 초대장의 문장을 따라 옆으로 이동했다. 눈웃음을 머금었던 눈가가 점점 정색으로 물들다 아예 굳어버렸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초대장의 내용이 거지 같았으니까.
클레어가 받은 건 수도의 미혼 여성들을 위한 연회를 벌일 예정이니 꼭 참석해달라는 황제의 초대장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신분 고하를 막론한 미혼 여성들이 겪는 고충을 생생하게 듣고 정책 마련에 힘쓰겠다는 좋은 의도였지만 제국의 누구라도 알 거다. 여자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황제가 뜬금없이 연회를 벌이는 진짜 이유를.
「그 영감탱이가 진짜…… 여인들에게 나가는 예산을 줄였더니 정치 자금으로 여인들을 불러모아? 신분 제한도 없이?」
카일이 웃으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렇다. 황제가 미혼의 여성들을 황궁에 불러모으는 진짜 이유는 정책 운운하며 눈요기를 하려는 것.
일국의 수장이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나와 카일도 화가 나는데 수도에 거주하는 미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딴 초대장을 받은 클레어의 기분은 오죽할까.
“언니……”
나는 우는소리를 하며 클레어의 어깨를 꼭 안았다. 그러자 터프한 내 최애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썅…… 아멜이 있어서 화를 낼 수도 없고.」
이 필터링이라곤 없는 욕설, 짜릿해. 이 맛에 최애 파지. 클레어는 식탁 아래로 초대장을 구기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거지 같긴 하나 어쨌든 황제의 초대장이다. 황제는 관심종자라 자신이 연 파티나 연회에 누가 오고 누가 안 오는지에 무척 집착하고.
현실적으로 연회에 불참하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럼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혼자 가긴 싫은데. 이딴 불순한 파티에 아멜에게 같이 가자고 할 수도 없고.」
어찌 되었건 약혼을 한 몸인지라 해당 사항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발상을 전환해보기로 했다. 내가 아는 책 속 등장인물 중 ‘수도에 거주하는 미혼 여성’은 클레어뿐이 아니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 소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여주인공. 그녀 또한 초대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네사라면 초대장을 받지 못했어도 수를 써 구했을 거야. 파티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미혼 여성들이 초대되는 자리이니 카일이 끼어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클레어라는 뒷배를 안고 슬쩍 파티에 들어가 바네사가 왔는지, 안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카일. 부탁이 있는데요……”
“차이엘드 금광을 지금 갖고 싶으십니까?”
“아니,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서요.”
“며칠간 여는 게 좋습니까? 특별히 초대하고 싶은 분이라도?”
“차이엘드에서 연회를 열고 싶다는 게 아니라, 클레어 언니가 초대받은 황제 폐하의 연회에 가고 싶어요.”
카일도, 클레어도 우뚝 굳었다. 그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기획 의도부터 불순함이 팍팍 드러나는 파티에 간다는데 얼마나 어이없을까.
“아멜. 안 돼. 혼자 다녀올게.”
클레어가 먼저 나를 저지했다.
“하지만…… 언니랑 같이 연회에 참석하고 싶은걸요?”
“…….”
오케이. 반대 세력 하나 제쳤고. 문제는 카일인데 어떻게 구워삶는담. 나라도 내 애인이 여자 밝히는 놈이 베푸는 연회에 간다면 싫어하겠다.
“카일, 부탁이에요. 응?”
“이번만큼은 정말 안 됩니다.”
“하지만……”
울먹거림도 효과가 없다니. 그동안 너무 써먹어서 면역이라도 생긴 것인가.
하는 수 없이 나는 이번에도 낯간지러운 대사를 읊기로 했다.
“설마 제게 해코지를 하겠어요?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아내가 될 사람인데.”
“…….”
카일이 입을 떼려다 겨우 정신을 부여잡은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콧소리를 섞어가며 2차 애교를 퍼부었다.
“미래의 차이엘드 공작 부인이잖아요. 저 못 믿어요?”
“…….”
“저도 레이디들에게 남편 자랑하고 싶단 말이에요. 응?”
남편이라는 글자에 꾹꾹 힘주어 말한 보람이 있었다. 카일의 머릿속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남편……」
「……방금 누나가 정말 남편이라고 하셨나?」
「차이엘드 공작 부인……」
뺨이 아니라 귀까지 빨갛게 익어 김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원하신다면 다녀오십시오, 부인.”
그렇게 말한 카일은 제 입에서 ‘부인’이라는 낯간지러운 단어가 튀어나온 것에 상당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나는 순진한 남주에게 나쁜 짓을 하도록 시켰다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끼곤 씩 웃었다.
“고마워요, 카일. 초대장은 오늘 중으로 구해다 주세요.”
***
그리고 얼마 후. 약혼식 때 입지 못한 99벌의 드레스 중 하나를 골라 입은 나는 클레어와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
“아멜, 이젠 제법 여유로워 보이는데?”
“그렇게 보여요? 다 언니가 잘 가르쳐주신 덕이에요.”
비록 다신 일어나지 못하도록 짓밟아야 한다는 말에 하일 황실의 미래를 걷어차는 참사가 일어나긴 했지만.
마차가 움직이고 어느덧 황궁이 보이는 위치에 다다르자 자연스레 그녀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 소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여주인공.
여주인공이라는 포지션에도 불구하고 바네사의 과거는 원작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성격도 ‘이거 연기 아니야?’ 싶을 정도로 카일에게 따스하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그래, 뭐. 여주인공들이야 다 착하지. 카일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나중엔 그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하나뿐인 연인이 될 테니까.
바네사의 외모적인 특징은 백금발에 푸른 눈. 수수한 옷을 입어도 화려해 보일 정도의 미인이라는 묘사가 기억에 남는다.
원작의 작가가 밀었던 주인공들의 설정은 ‘서로의 과거는 잊고 앞으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연인.
그래서일까. 바네사의 과거는 더더욱 나오지 않는다. 바네사에 대해 확실한 것은 딱 하나. 그녀가 작중 최고의 무력 집단인 ‘아레티스트’의 보스라는 것이다.
아레티스트는 하일 제국에 거점을 두고 있는 용병 집단으로, 아레테를 보유한 자들만 간부가 될 수 있다.
원작에서 카일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고용한 용병 중 하나가 아레티스트의 보스, 바네사였다.
바네사는 카일의 의뢰를 승낙하고 그가 바라던 파멸을 가져다준다. 그 과정에서 아레티스트에 몸담았던 것에 대해 현타를 느끼고 조직을 탈퇴. 카일과 행복을 찾아간다는 게 그녀의 서사였다.
‘……좋아. 일단 백금발 미인을 찾자.’
하지만 황제의 미혼 여성 대상 연회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초대받은 미인들을 초대한 탓에 백금발이 꽤 많았다.
젊은 여자들이 바글바글한 곳에 황제가 음흉한 웃음을 머금고 지나다닌다는 사실이 클레어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아멜. 저기 있을래? 난 저 영감탱이랑 얘기 좀 해야겠어.”
그렇게 우리들의 듬직한 클레어는 홀로 황제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름 모를 영애들이 숨죽이고 있는 조용한 구석 자리에 끼어들어 백금발에 푸른 눈을 본 적이 있냐고 물으려 했다.
“어머, 다이앤 백작 영애 아니세요?”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레이나 백작 영애. 그리고 그 벗들이 슬쩍 다가와 내 옆자리를 차지하지만 않았어도 수사가 수월할 텐데.
“안녕하세요, 레이나 영애. 반가워요. 그런데 여러분, 혹시……”
“다이앤 영애. 약혼 축하드려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백금발……”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서 큰 선물을 해주셨다죠?”
“네. 호수를 받았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호수처럼 푸른 눈……”
“그렇게 큰 선물을 받으셨으니 후사 문제에 신경이 쓰이겠어요.”
이런 식이었다. 내가 자리를 오래 지키고 있던 영애들에게 바네사처럼 생긴 사람을 보았느냐고 물을라치면 레이나 영애가 내 말을 끊으며 제법 무례한 질문을 해댔다.
웃으며 넘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후사 문제요?”
“네. 사실 여자는 나이가 들면 아이를 갖기 힘들다잖아요?”
저기, 저 아직 스물넷인데요. 물론 이 세계 기준에선 결혼이 조금 늦은 편이지만 노산을 걱정할 나이까진 아니라고!
레이나 백작 영애는 내 말허리를 자르는 데에 재미가 들린 것인지, 내가 숨을 내쉬려 입만 벙긋해도 화수분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러면 숫기 없는 순진한 영애들은 레이나 백작 영애의 이야기에 홀려 내 질문을 듣지도 못했다.
“레이나 백작 영애. 잠시만……”
“어머, 한참 재미있었는데. 더 재미있는 얘기라도 해주실 건가요?”
나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자기도 결혼 안 했으면서 남의 후사를 걱정하고, 말허리까지 싸그리 잘라먹은 복수를 해주마.
레이나 영애가 내게 이러는 이유는 하나. 카일을 짝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이나 영애를 엿먹이면서도 순진한 다른 영애들의 시선을 잡아끌 만한 얘기를 해야지.
“결혼은커녕 청혼도 받은 적 없는 우리 레이나 영애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라…….”
나는 생긋 웃었다.
“첫날밤 얘기해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