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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32화 (32/134)

#32

순간 순진한 영애들이 찻잔도 내려놓고 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작전 성공이었다.

원래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법이다. 내가 살던 21세기 대한민국도 그랬는데 책 속의 세계는 오죽할까.

물론 하일 제국은 방탕한 황제 덕에 성 문화에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원나잇 정도는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흠이 되지 않는다는 설정이라면 말 다 했지.

그럼에도 야릇한 이야기를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아니, 사실 남의 첫날밤 얘기는 음담패설에 도가 튼 사람이라고 해도 관심이 가리라.

남자라곤 모르는 순진한 영애들은 물론 내게 줄곧 시비를 걸어오던 레이나 영애까지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보였다. 귀여운 것들. 언니가 한 수 가르쳐 주마.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죠. 저와 카일은……”

역사적인 사건의 도입부를 설명하려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와 카일의 첫날밤은 과연 건전한가. 아니, 어린 영애들에게 들려줘도 될 정도로 바람직한 것인가.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절대 그렇지 않아. 술에 떡이 되어서 얼굴만 보고 남주를 덮친 건 불건전의 끝이었다.

해서, 나는 이야기를 조금 각색하기로 했다.

“저와 카일은…… 음…… 잔잔한 바람이 부는 호수에서 가릴 거 다 가리고 경건하게 마주쳤죠.”

“다이앤 영애, 방금 비가 내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망할. 이제부터는 창작의 영역이다.

“그럼요. 비가 내렸으니 우리의 옷이 젖었을 것 아니에요?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죠.”

“어머, 어머!”

“꺅!”

“그래서 호텔로 간 거예요. 우리 둘이.”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려고 하자 영애들이 도끼눈을 했다. 그중 하나는 내 어깨에 손을 턱 얹고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개연성이랑 감정선이 중요해요, 다이앤 영애.”

“아, 예…… 그, 개연성이랑 감정선이요……”

카일 얼굴이 개연성이자 감정선인데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얼굴이 다 했다고? 아니야, 불건전해. 어린 영애들의 가치관 형성에 좋지 않아.

나는 피식 웃는 것으로 여유 있는 척한 다음 구라를 쳤다.

“영애들은 첫눈에 반해본 적 없죠? 첫눈에 반하면 불꽃이 파박! 저와 공작 전하는 서로 첫눈에 반한 셈이죠. 그윽한 공작 전하의 눈빛이 아주 그냥……”

아니, 사실 술기운에 얼굴만 보고 침대로 데려갔다. 하지만 영애들은 ‘첫눈에 반한’ 것이 무척 달가운 눈치였다.

“호텔에 들어가 상호 동의하에, 올바른 피임 방법을 사용하여 서로에게 적절한 성적 자극을 줄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확인한 다음, 네. 그런 거죠.”

해맑게 말을 마치자 영애들이 나를 죽일 듯 노려봤다.

“다이앤 영애, 제일 중요한 부분이 생략된 것 같은데요.”

“호텔에 들어간 부분부터 다시 말씀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목소리 단호한 것 좀 보게. 하긴, 내가 생각해도 생략을 조금 심하게 하긴 했다. 조금만 더 들려줄까 싶었지만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내가 술을 진탕 마신 덕에 첫날밤이 기억나지 않는다. 거길 그렇게 해줄 때 기분이 좋았다, 조금만 더 해달라, 하는 말들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했던 건 기억나는데.

기억나는 디테일이 없으니 이번에도 남는 건 창작의 고통뿐이었다.

“날이 추워서 옷을 벗으니 금방 소름이 돋았어요. 그래도 괜찮았죠. 공작 전하께서 이름을 불러서 뒤돌아보는데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기더라고요. 귓가에는 뜨거운 숨결이……”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클레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름 모를 여성이 클레어와 내 사이를 휙 지나갔다.

빛을 받으면 은발이라고 착각할 만큼 밝은 백금발. 눈동자 색은 보지 못했지만 언뜻 하고 있던 목걸이가 내게 확신을 주었다.

방금 지나간 저 여인이 원작 여주, 바네사 메이브란테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 나는 홀린 듯 벌떡 일어나 그 여인을 쫓기 시작했다.

“아악 다이앤 영애! 여기서 끊으시면 어떡해요!”

“아멜, 어디 가?”

“클레어 언니, 뒷이야기 좀 마저 부탁드려요!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바로 따라 일어났으니 이 근처일 것이다. 여자는 걸음이 빠른 편이었지만 금방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분에 찬 레이나 영애가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바네사의 외모적 특징은 백금발에 푸른 눈. 하지만 그녀를 겉모습으로 구분하게 해주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책 표지에도 그려져 있던 것이라 똑똑히 기억한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원작 여주, 바네사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과거가 알려지지 않은 여주답게 어쩌다 그 물건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라는 건 저 화려한 목걸이의 별칭이다.

줄과 3단으로 늘어진 보석 부분은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지만, 중심부의 메인 보석 자리에는 내 약혼반지에 박힌 것과 같은 ‘아레테의 결정’이 들어간다.

내 추측이지만 제국 최고의 용병 집단, 아레티스트의 보스가 된 바네사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로 인해 아레테를 갖게 되었을 거다.

“다이앤 영애, 잠깐만요! 제 얘기를 끊더니 이젠 도망까지 치세요?”

“레이나 영애,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대화 나중에 나누어요.”

나는 나를 맹렬히 뒤쫓아 오는 레이나 영애를 무시한 채 계속 백금발 여인을 찾아 다리를 움직였다.

원작을 바꾼 지금, 바네사를 카일보다 먼저 만나보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

한참을 헤집고 다닌 끝에 나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한 여인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저기, 잠깐만요!”

내 목소리에 놀란 여자는 찬찬히 뒤돌아봤다. 그런데 눈동자 색이 갈색이었다. 갈색. 바네사의 푸른 눈동자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색인데.

……렌즈를 낀 건가? 아니지. 이 세계에 컬러렌즈 같은 게 있을 리 없는데.

“어머, 다이앤 백작 영애. 저는 그레첼 남작가의 여식 아리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자신을 그레첼 영애라고 소개한 여자는 내게 온화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적당히 예의를 갖추면서도 목걸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내 반지에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선 저건 분명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다. 원작 여주의 아이템.

그걸 왜 그레첼 남작 영애가 가지고 있는 거지?

“영애. 제게 볼일이라도?”

“아니, 그게…… 목걸이가 참 예쁘네요. 어디서 사셨어요?”

나는 최대한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물어봤다. 하지만 그레첼 영애는 물론 나를 뒤따라오던 레이나 영애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다이앤 영애, 혹시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모르세요?”

원작 여주의 상징. 아레테의 결정이 들어간 보물. 이게 끝 아니야?

“어머. 다이앤 백작 영애께서는 모를 수도 있죠. 경제적인 이유로 긴 시간 동안 황궁 출입이 어려우셨으니까.”

레이나 백작 영애가 내 속을 살살 긁어댔다. 짜증은 나지만 아는 게 없으니 가만히 듣는 수밖에.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황실의 보물이잖아요. 목걸이를 끼면 평소의 열 배는 아름다워 보인다던가.”

“아름다워…… 보인다고요?”

레이나 백작 영애가 설명해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의 용도는 이랬다. 평소에는 여자를 밝히는 황제가 가지고 있다가 밤에 침전에 들일 여성에게 수여한다. 그러면 목걸이를 받은 여인은 하는 수 없이 목걸이를 착용한다.

그럼 망할 황제가 열 배는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을 취한다. 같은 물건도 참 다양한 의도로 쓰이는구나 싶었다. 바네사에겐 그저 아레테를 위한 장신구 1 같은 느낌이었는데.

나는 그레첼 영애의 목에 걸린 값비싼 보석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럼 그레첼 영애는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레첼 영애의 목소리가 처량하게 떨렸다. 그레첼 영애는 슬쩍 봐도 황제보다 스무 살은 어려 보인다. 황제의 아들인 베르드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데.

……미친 거 아닌가? 하반신의 노예도 아니고, 딸뻘인 여자를 건드려?!

“그, 그레첼 영애, 죄송해요.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아닙니다, 다이앤 영애. 대화를 나누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그레첼 영애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떨었다. 황제의 침전에 들 여인만이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받는다.

그레첼 영애는 그것을 착용하고 있다. 즉, 오늘 밤 노망 난 황제는 그레첼 영애를 취할 것이다.

쓰레기. 인간말종. 미친놈. 양심도 없나.

그레첼 영애는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웃음과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리고 예쁜 영애가 황제와 동침이라니. 말이 승은을 입는 것이지 사형 선고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어머, 다이앤 영애! 아무리 목걸이가 탐나도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실례라고요.”

한참 감상에 젖어 있는 내게 레이나 영애가 말했다. 이 쪼그만 건 아까부터 왜 자꾸 내 신경을 긁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차이엘드의 피앙세인데 말이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와 바네사의 관계를 추격하는 일은 잠시 접어두고 이 점을 분명히 하고 갈 필요가 있겠어.

“레이나 영애. 마침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하는 말인데 제게 자꾸 이러시면 안 돼요.”

“왜요? 제가 뭘 했다고.”

“…….”

참자. 나는 어른이다. 얘보다 적어도 네 살은…… 잠깐. 레이나 영애도 성인이잖아?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이렇게 나와?

“레이나 영애. 아무리 저희 집안이 보증으로 쫄딱 망했다지만 엄연한 백작가예요. 제가 영애를 존중하는 만큼 영애도 저를……”

“어머. 이 이상 어떻게 다이앤 백작 영애를 존중해요?”

“저기 두 분, 싸우지 마시고……”

그레첼 영애가 난감한 얼굴로 우리를 중재할 무렵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

“꺄악!”

정전이었다. 불이 꺼지고 시야가 온통 어둠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민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들의 기척을 읽으려 가만히 숨죽였다.

“기, 기사들은 왜 없는 거죠?”

“여긴 기사 모형밖에 없어요, 레이나 영애……”

그레첼 영애의 말대로다. 주요 경비 인력들은 황제의 연회가 벌어지는 홀에 배치되었을 터.

우리를 둘러싼 정체불명의 침입자들은 네 명에서 다섯 명 사이.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스릉-

나는 기사 모형이 들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일대 다 전투라 이길 자신은 없지만, 방어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그레첼 영애, 가만히 있어요. 자세 낮추고요.”

내가 말하자 방금까지만 해도 내게 대들던 레이나 영애가 울먹였다.

“고마워요, 다이앤 영애……”

“네? 전 레이나 영애를 지켜준다고 한 적 없는데요?”

챙-!

레이나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검이 불쑥 뻗쳐 왔다. 나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막아 튕겨냈다.

아레테가 진화하기라도 했는지 몸이 아니라 검이 닿았는데도 상대방의 마음이 들려왔다.

「젠장. 바네사 님은 어디 계신 거야? 목걸이는 여기 있는데!」

「이 여자는 뭔데 내 검을 막은 거지? 이곳에 파견된 아레테스트는 우리뿐일 텐데.」

아레티스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 분명 여주가 소속된 용병단이긴 한데…… 왜 너희가 여기 있는 건데!

떨림이 느껴져 흘끗 내려다본 레이나 영애는 아연실색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아흑, 짜증 나…… 내가 왜 이런 사건에 휘말려야 해……?”

머리를 감싸고 벌벌 떠는 모습이 내 말을 끊고, 나를 개무시하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무섭겠지. 검술에도, 도망에도 능하지 않은 영애이니.

카강-!

칼날이 한 번 더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그것을 맞받아치곤 이를 악물었다. 뒤에서 레이나 영애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이앤 영애, 얼른 끝내버려요…… 응?”

서열 정리하기 딱 좋은 상황.

“레이나 영애. 제가 영애를 위해 싸울 이유가 있어요?”

“……!”

“딱 1분 기다려줄 테니 잘 생각해 봐요. 나한테 사과할 거 있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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