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레이나 영애의 몸이 움찔 떨렸다. 파티 홀이었다면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다섯 명의 침입자에게 둘러싸인 상황. 레이나 영애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자존심을 내려놓고 내게 절했다.
“죄, 죄송해요, 다이앤 영애…… 제가 어려서……”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잖아요. 그딴 말로 사람 열 받게 하지 말고. 한 번만 더 속 긁는 소리 해 봐.”
“흑…… 알았어요. 미안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제발……”
“영애가 그렇게 징징대지 않아도 상대할 거니까 걱정 말아요.”
카강!
칼날과 칼날이 맞부딪쳤다. 내 아버지 페르슈 다이앤은 전설이라 불리우던 총기사단장. 물론 그 사실이 내 전투 능력을 높여주진 않는다. 검술은 철저히 연마한 만큼만 발휘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검술이 아니라 허세의 영역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나는 칼을 다잡으며 소리쳤다.
“너희가 아레티스트 소속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어떻게……!”
그야, 속마음이 들리니까.
“내 아버지는 전설이라 불렸던 전직 총기사단장인 페르슈 다이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상대가 되지 않아.”
단언컨대 허세와 센 척의 정점이라던 중학교 2학년 때도 이런 말은 해본 적이 없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을 터.
내 허세에 아레티스트들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겨누었다.
챙-!
있는 힘을 다해 내리치자 방심하고 있던 상대의 검이 뒤편으로 날아갔다. 다음 상대가 곧장 내게 주먹질을 했지만 옆구리를 스칠 뿐이었다.
「젠장, 주먹을 너무 깊이 휘둘렀어! 이 자세는 얼굴 쪽 방어가 약한데!」
공략 감사합니다.
나는 속마음을 읽어낸 대로 남자의 얼굴에 묵직한 주먹을 내리꽂은 다음, 가드가 풀어진 틈을 타 뒷목을 손날로 가격했다.
쿵. 남자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나는 속으로 ‘죄송’을 세 번 읊조린 다음 쓰러진 남자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더 할까?”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자 남은 셋 중 하나가 견제하듯 검을 휘둘렀다. 그 맥 빠지는 일격을 세로로 막아낸 나는 이번에도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무슨 놈의 백작 영애가 싸움을 이렇게 잘해? 공격계 아레테 보유자인가? 그렇다면 큰일인데……!」
오케이. 공격계 아레테 보유자를 만나면 큰일이란 말이지?
“알고 있겠지만, 나 아멜리아 다이앤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공격계 아레테 보유자다. 이 이상 봐주는 일은 없을 거야.”
아레티스트들은 복면 위로 드러난 눈동자를 굴려 빠르게 의견을 교환하더니 곧 저 멀리 사라졌다. 어둠에 휩싸였던 시야가 다시 밝아진 것도 이쯤이었다.
검을 거두자 뒤에서 짝짝짝 박수가 들려왔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레이나 백작 영애와 그레첼 남작 영애였다.
“쯧. 상대도 안 되는 것들이.”
허세 충만한 마무리 대사를 내뱉자 레이나 영애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아무래도 하일 제국 영애들 사이에서 여기사 낭만 소설이 유행 중이라는 게 사실인가 보다.
“저, 다이앤 백작 영애……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안 돼요. 깍듯하게 예의 차려요.”
“넵.”
속이 다 시원하네. 그레첼 남작 영애 또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곤 내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다이앤 백작 영애.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허전하다. 없다. 없어……!
“그, 그레첼 영애!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어디에 있어요?”
“네?!”
그레첼 영애가 당황해 몸 이리저리를 훑어보았으나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황가의 보물이라고 하는 만큼 크기가 꽤 커서 영애가 몸에 지니고 있다면 숨기는 게 더 어려울 목걸이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충격을 받은 그레첼 영애는 이마에 손등을 짚고 뒤로 쓰러졌다. 나를 당황하게 하는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거기 세 분! 꼼짝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필요할 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 셋을 에워쌌다. 처음에는 분명 보호해주려는 의도였는데,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상황을 파악하자 그들의 태세는 바뀌었다.
“하르모니아 목걸이 분실 사건의 용의자로 긴급 체포합니다. 다이앤 영애, 레이나 영애, 그리고 그레첼 영애. 따라오십시오.”
그렇게 나는 하일 제국 최초로 황궁 구금실에 두 번 잡혀 들어온 영애가 되었다.
***
아멜이 황궁 구금실로 끌려가기 약 삼십 분 전.
클레어 차이엘드는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겉만 봐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포커페이스지만 속은 복잡했다.
‘아멜이 왜 갑자기 사라진 거지? 게다가 뒷이야기를 마저 부탁한다니……’
초롱초롱.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영애들이 눈빛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아멜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되도록 완벽하게.
“……무슨 얘기 해줄까요?”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클레어 차이엘드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한데 직접 이야기를 해주겠단다. 그것도 야한 이야기를.
영애들은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려 팔을 꼬집다, 행여 그녀의 마음이 변할까 봐 말을 이었다.
“다이앤 영애께서는 첫날밤 얘기를 하고 계셨습니다.”
“첫날밤?”
클레어는 자신보다 열 살은 더 어린 귀여운 영애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실전으로 경험해 보면 될 것을 왜 굳이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단 말인가.
“그래요. 나도 해줄게. 몇 번째 첫날밤 얘기?”
클레어의 첫날밤은 아멜과 그 스케일이 달랐다.
영애들은 꺅,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클레어의 15번째 첫날밤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클레어는 아멜과 달리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느 나라를 가나 수도 남자들은 허세가 심해. 실력은 형편없으면서. 뭐, 내가 만났던 남자는 실력도 꽤 괜찮았지만.”
침대에 올랐다. 하이힐이 벗겨져 침대 아래로 떨어졌고, 클레어가 드레스를 한 벌 버리게 되었다며 아쉬워하는 지점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파밧-
시끌벅적하던 연회 장소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갑자기 불이 꺼져 장식용으로 켜둔 촛불만이 위태롭게 주변을 밝혔다.
“황제 폐하, 어서 이쪽으로!”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재빨리 황제를 보호했다. 유난을 떤 보람도 없이 불이 금방 들어왔지만.
“미안. 얘기는 다음에 이어서 해줄게.”
불안감을 느낀 클레어는 곧장 차이엘드의 사람을 시켜 사태를 파악했다. 처음에는 원인 모를 정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보가 더해질수록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웠다.
‘아레티스트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노렸다고?’
“추가 정보가 있으면 보고하도록 해요. 아멜 위치는 아직도 못 파악했어요?”
“그것이, 곧장 파악하긴 했는데……”
“얼른 말해.”
“황궁 구금실에 계신답니다.”
“……또?”
클레어는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는 아레테까지 사용해 가며 황궁 구금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황실 소속 기사단 단원들이 창으로 그녀의 앞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클레어는 건조한 표정 그대로 혀를 짓씹다 한 걸음 물러났다. 이럴 때는 차이엘드 공작이 직접 움직이는 게 더 빠르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브루노. 공작저로 이동시켜 줄 테니까 공작 전하께 가서 말을 전해요.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클레어 님.”
클레어는 자신을 따라온 차이엘드의 고용인에게 이동 마법을 걸어주었다.
***
나는 문에 뚫린 작은 창문을 보며 탄식했다. 두 번째 구금이라니. 물론 이번에도 차이엘드의 재력 덕에 편하긴 했다.
다른 구금실과는 달리 내 구금실만 지푸라기가 아닌 캐시미어 러그가 깔려 있다. 의자에는 요추 쿠션이 달려 있고, 언제든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침구 세트까지 구비되어 있다.
‘……특혜를 받아서 좋긴 한데, 구금실은 이제 그만 오고 싶단 말이야. 아무리 독방이라고 해도 싫다고.’
구금실에 입성한 지 약 30분.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많은 영애들이 잡혀 들어왔다. 내 프리미엄 구금실은 사방이 벽돌이라 잘 들리지 않지만 그녀들은 하나같이 억울하다는 눈치였다.
“제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에 손을 대다뇨…….”
“그런 목걸이는 본 적도 없어요! 맹세합니다!”
“어머, 지금 저를 도둑으로 몰아가시는 거예요?”
듣자 하니 값비싼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사라진 것에 격노한 황제가 아주 조금의 혐의라도 있으면 모조리 집어넣으라고 한 것 같다. 오죽하면 기사들이 구금실에 자리가 없다고 투덜댈까.
나는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영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그러다 드디어 발견했다.
백금발에 푸른 눈. 수수한 옷을 입었으나 화려한 인상을 주는 미녀를.
“……!”
나는 헐레벌떡 문을 열었다. 구금실인데 안에서 어떻게 문을 열 수 있냐고 묻는다면 차이엘드의 힘이라 하겠다.
“저기, 기사님. 방금 구금실에 자리가 없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만……”
“저만 특혜를 누리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아서요. 저도 2인실 쓸게요.”
“흠……”
기사는 끝없이 늘어진 영애들의 줄을 보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는 구금에 필요한 서류를 재빨리 작성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
이런 미친. 드디어 여주를 찾았다! 해냈어! 나는 웃음을 꾹 삼키며 바네사를 프리미엄 구금실로 안내했다. 웬만한 가정집보다 훌륭하게 꾸며진 구금실을 본 바네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썅, 이게 다 뭐야? 끝내주네?”
“……?!”
“이런 특혜를 받다니 당신 끗발 장난 아닌가 봐?”
이건 아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어.
썅, 이라니.
내가 읽은 착하고 수줍음 많으며 태평양 같은 포용력을 지닌 여주가 할 말이 아니다.
착하면 욕도 못 하냐? 물론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방금 바네사가 뱉은 ‘썅’은 감칠맛이 있었다. 영혼에서 우러나온 ‘썅’ 이었다고.
……동명이인이겠지. 그럴 거야. 여주와 외모와 이름이 똑같은 건 우연일 거라고.
“저기, 바네사라고 하셨죠? 이거 드실래요?”
나는 애써 웃으며 바네사에게 쿠키를 권했다. 내가 구금실에 들어서자마자 기사들이 몰래 가져다준 것이었다. 바네사는 눈썹을 으쓱하며 쿠키를 받아들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야, 접시째 내놔.”
“……예?”
“넌 저녁 먹었을 것 아냐. 난 평민이라 연회에서 음식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아니 무슨 평민이 백작 영애한테 반말을 그렇게……”
“안 닥칠래? 깜빵에서 신분이 어디 있어?”
“여기 구금실인데……”
바네사는 예쁜 백금발을 꼬던 손으로 쿠키를 집어 들더니 나를 향해 씩 웃었다. 그래, 그래! 여주인공다운 온화한 미소!
퉷-
“……?!”
“이거나 먹어라.”
일순간 내 머리카락에 씹던 껌을 뱉은 바네사는 중지를 세워 보이곤 쿠키를 접시째 빼앗아갔다.
그러니까. 지금 여주…… 로 추정되는 인물이 쌍욕을 하고 내 머리에 껌을 뱉은 다음 엿을 날렸다. 이게 무슨 일이람. 여주 아니겠지?
“저도 쿠키 하나만……”
“시끄러워. 어딜 감히.”
탁!
바네사가 쿠키를 탐하는 내 손을 쳐냈다. 순간 그녀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젠장. 목걸이를 훔칠 수 있었는데 백작 영애가 튀어나와 방해했다고? 말이 되는 변명을 해야지.」
「아, 짜증 나. 목걸이를 못 훔쳤으니 아레테를 못 얻는단 거잖아. 아레티스트에서 알바하는 건 이번 달까진데.」
“…….”
알바라니. 거기 보스여야 하는 당신이 왜 거기서 잘릴 걱정을 해! 파멸 남주의 전쟁 의뢰를 들어준 다음 같이 꽃길 걸어야지!
내가 간절한 눈을 하든 말든 바네사는 쿠키를 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쳇.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잖아.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없으면 잘생기고 돈 많고 밤일 잘하는 남자를 후리는 건 불가능한데.」
생각을 읽고 나니 어이가 없어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자 바네사는 내게 중지를 척 세워 보였다.
“뭘 봐? 불만 있어?”
이건 아니다. 내가 알던 여주가 아니라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너…… 너, 인성이 왜 이따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