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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34화 (34/134)

#34

내가 처음으로 큰소리를 낸 탓인지 바네사도 움찔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내게 쏘아붙였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인성은 무슨. 그딴 건 돈 많고 여유 있는 너희 귀족들이나 챙기는 거지.”

“아…….”

“온화한 웃음이나 우아한 몸짓 같은 건 다 먹고살 걱정이 없을 때나 가능한 오만이라고.”

빙의 전, 학자금 대출을 갚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나는 어쩐지 바네사의 인성 파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타인에게 알량한 동정심을 품는 건 위험하다. 스스로를 지키려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필요하다면 말을 세게 해야 한다.

‘만만하게 보이는 순간 호구가 되니까.’

여유와 관용은 결국 돈과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목걸이 절도에 실패해 세계관 최강이라 불리던 아레테를 얻지 못한 지금의 바네사가 팍팍한 성격인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이해는 가는데…… 생각보다 차이가 심하네.’

나는 머리를 줴뜯으며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그러자 바네사가 내 머리카락을 향해 뱉은 껌이 손에 달라붙었다.

“이 껌, 어쩔 거예요?”

“뭘 그렇게 화내? 머리야 자르면 되잖아? 아, 귀한 신분이라 머리털 자르는 게 겁나시나?”

아무리 상대가 여주라고 해도 화를 참는 데는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아까부터 빈정거리는데, 나는……”

“잠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바네사의 눈빛이 바뀌었다. 내가 ‘나는’이라 말하며 빳빳이 편 채로 가슴에 댄 왼손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차이엘드의 문양이 박힌 약혼반지를 낀 왼손에 말이다.

“너, 손에 낀 거……”

나는 바네사가 내 약혼반지를 편하게 보도록 왼손을 주먹 쥐어 내밀었다. 사실은 속마음을 편히 읽으려는 조치였다. 바네사가 내 손을 이리저리 돌려볼 때마다 속마음이 들려왔다.

「이건…… 그 차이엘드의 문양이잖아?」

「차이엘드에서 약혼할 만한 남자는 카일리안 차이엘드 하나.」

「그럼 이 여자가 인생역전 신화의 주인공, 아멜리아 다이앤?」

그래, 이 화상아.

내 정체를 알아챈 바네사는 재빨리 눈빛을 바꾸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게 엿을 먹이던 인간이 사슴처럼 초롱초롱한 눈을 했다.

“어머…… 실례가 많았어요, 다이앤 백작 영애.”

“…….”

“에이, 머리카락은 제가 잘라드릴게요. 어차피 아래가 상해서 자르셔야 했을 거예요. 아, 쿠키 잘 먹었어요! 다이앤 영애가 주셔서 그런지 너무너무 맛있더라고요.”

바네사가 환하게 웃자 실내가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예쁘다. 아름답다. 근데 인성이 쓰레기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부드러운 손길로 껌이 붙은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게 꼭 천사 같았다.

바네사는 몰래 숨겨 가져왔던 단검으로 껌이 붙은 내 머리카락을 단칼에 잘라주었다.

“어쩜 영애는 머릿결도 고우세요.”

호호 웃으며 하는 칭찬 속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흠……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없으면 내 계획은 물거품이야. 그럼 이 돈 많은 언니에게 빌붙는 게 현명하겠어.」

「그래. 아레테를 못 얻으면 어차피 아레티스트에서 일 못 하잖아. 이 여자 꼬드겨서 한 자리 잡자.」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얼른 구금실에서 나가기만을 빌었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를 읽으며 느꼈던 일말의 감동이 싹 씻겨나가는 기분.

여주에게 천사 같은 모습만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이런 시커먼 속을 가진 바네사를 카일과 엮어줄 생각을 했다니.

“그런데 언니는 왜 들어온 거예요?”

“언니라고 부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다이앤 영애.”

생글생글. 바네사의 웃음은 계속 보고 있으면 가슴이 간질거릴 만큼 예뻤다. 카일이 보자마자 넘어간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다이앤 영애, 어쩌다가 이곳에 오신 거예요?”

이 순간 내 욕망은 하나였다. 바네사를 엿 먹이고 싶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지키려 아레티스트들을 상대하고 나니 용의자라며 잡아 오지 뭐예요? 착오가 있었던 것 같으니 금방 나갈 수 있겠죠.”

손으로 내 머리를 살살 빗던 바네사가 순간 힘을 콱 주었다.

“아레티스트들을 상대…… 하셨다고요?”

「썅. 목걸이를 못 훔친 게 이 여자 때문이었어? 죽일까?」

다 들린다, 다 들려.

“네. 한주먹거리더라고요.”

나는 최대한 재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열 받은 바네사가 가슴을 팡팡 두드리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하지만 바네사의 사고는 내 예상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이 여자, 보기와는 다르게 싸움도 꽤 하나 본데? 역시 이쪽에 붙어야겠어.」

「남자든 여자든 내가 꼬시면 다 넘어와. 이건 확실해.」

……나한테 붙을 생각 말아라, 이 여우 같은 여주야.

나는 바네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재잘대는 것을 깡그리 무시하며 창밖만 바라봤다. 얼마나 긴 시간을 멍때렸을까. 구금실을 지키는 기사가 다가와 말했다.

“아멜리아 님, 면회입니다.”

“면회요?”

“예. 따라 나오시지요.”

황실 기사단 소속 기사는 바네사가 따라 나오지 못하도록 저지하곤 나를 구금실 바깥으로 데려갔다.

원래 면회는 안에서 이뤄져야 하지만 이젠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내게 온 면회인이……

“누나. 괜찮으십니까?”

카일리안 차이엘드니까.

카일을 보는데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가 이렇게 예쁘고 순진하고 돈 많고 섹시한 데다 밤일까지 잘하며 몸까지 완벽한, 어디 하나 빠지는 것 없는 남주를 고작 ‘원래 이렇게 될 이야기였어’하는 이유로 인성 쓰레기 여주와 엮어주려고 했다니.

지난날의 마음고생과 왜 그랬는지에 대한 후회가 밀려와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는 카일이 껴안아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어흐흑, 카일……”

“바로 달려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내가 미쳤지. 이렇게 탄탄하고 아름다운 몸과 낮에 보면 귀엽고 밤에 보면 섹시한 얼굴을 가진 영앤 리치, 톨 앤 핸섬 남주를 남 줄 생각하다니. 그것도 인성 쓰레기 여주에게.

카일은 일전에 다이앤 백작저 앞에서 했던 것처럼 코트 앞 단추를 푼 다음 나를 옷 안으로 감싸 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들려와 마음이 가라앉았다.

“누나, 많이 힘드셨습니까.”

「……나한테 어리광부려 주니 좋긴 하지만.」

속마음에 맞추어 카일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예술점수 만점을 받고도 가산점까지 능히 받아낼 얼굴을 조물대며 말했다.

“카일…… 저는 아무에게나 카일을 넘겨주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쁘지만 한 군데가 틀린 것 같습니다. 아무에게나가 아니라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마십시오.”

“…….”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방금까지 여주에게 당했던 충격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곤 카일의 체온을 느꼈다.

지금은 그저 계속 이 자세로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람이 다가오든 말든 내가 꼭 껴안고 놓아주지 않자 카일은 웃음을 머금었다.

“하일드,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나 님의 혐의가 없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전처럼 가끔 황궁에 불려와 조사를 받아야겠지만 이제 누나 님은 차이엘드의 공식 피앙세이니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공작저로 돌아가시지요. 클레어 님이 이동 마법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차이엘드의 일 처리는 참으로 빨랐다. 카일은 알겠다고 대답하곤 내 손을 잡았다.

“얼른 서류를 작성하고 공작저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새 많이 야위셔서…… 이건 뭡니까.”

사근사근 말하던 카일의 말투가 일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손이 뻗쳐 오더니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바네사가 껌을 붙여버린 탓에 잘라냈던 그곳이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네사가 밉긴 하지만 지금 카일은 사람을 죽일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작은 사고가 있었어요. 서류 작성하러 갈까요? 얼른 쉬고 싶어요.”

***

카일은 아멜이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안면이 있는 구금실 직원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구금실로 향했다.

보안은 삼엄했다. 하지만 황실이 재정난에 시달려 몇 개월 동안 기사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못했을 때, 자금을 지원해 그들의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해준 것이 차이엘드였다.

그러므로 기사단이 경비하는 곳 중,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들어가지 못할 곳이란 없었다.

“오셨습니까, 공작 전하. 다이앤 백작 영애는 서류를 작성하고 계십니다.”

“제 약혼녀가 머물렀던 구금실을 보고 싶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면 됩니다.”

카일은 기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일드에게 들은 바로는 황제의 어이없는 명령으로 잡혀 들어온 영애들 중 대다수가 차이엘드의 마차가 황궁에 도착함과 동시에 풀려났다고 했다.

‘……조만간 황제 폐하와 이야기를 나눠야겠군.’

국가도 경영이었다. 방해되는 자는 굳이 놔둘 필요가 없었다. 깔끔하게 생각을 정리한 카일은 기사단장이 문을 열어주기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구금실을 들여다보았다.

“…….”

“어머…….”

비어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안에는 여인이 있었다. 그것도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

껌을 씹으며 러그 위에서 뒹굴뒹굴하던 바네사는 카일을 발견하곤 언제 그랬냐는 듯 몸가짐을 단정하게 했다. 상대는 카일리안 차이엘드. 제국이 아니라 대륙을, 이 세계를 주무르는 남자.

비록 아멜리아 다이앤에게 선수를 빼앗겨 품절남이 되었다지만 잘 보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

‘뭐, 약혼 관계라는 건 유리보다 깨지기 쉬운 거니까. 한번 꼬드겨 봐?’

바네사는 자신의 외모에 꽤나 자신이 있었다. 목소리에도, 눈빛에도, 그리고 무엇이든 용서해주고 보듬어줄 것 같은 따스한 웃음에도.

“바네사 메이브란테가 차이엘드 공작 전하를 뵙니다.”

낭랑한 목소리였다. 카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머리로는. 아멜리아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한 번쯤 뒤돌아봤을 법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거슬렸다. 곱게 머리를 조아리는 바네사의 태도가 아니라, 아멜리아와 단둘이 시간을 보냈을 바네사 자체가.

‘누나랑 단둘이 구금실에서 시간을 보내다니.’

나도 못 하는 건데. 뚱한 얼굴을 하려던 카일은 곧 무언가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쓰레기통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구금실 바닥에 어질러진 쓰레기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지 않아도 보이는 누군가의 머리카락 뭉텅이.

그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어쩌다가 머리카락을 뭉텅이로 자르게 되었는지 유추하는 것은 쉬웠다.

“공국을 다스리는 공작 전하를 뵈니 영광입니다.”

바네사가 손수 잘라낸 아멜리아의 머리카락 뭉치를 드레스 안으로 슬쩍 감추며 말했다. 껌이 착 달라붙어 있어 움직이기가 쉬웠다.

카일의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젠장. 나한테 안 넘어올 리가 없는데.’

바네사는 손톱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늘은 왜인지 되는 일이 없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훔쳐 아레테를 부여받은 다음, 아레티스트의 간부가 되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물 건너갔다.

호구 잡기 좋아 보이던 아멜리아 다이앤이라는 여자는 여간 쌀쌀맞은 게 아니다.

뭐, 살짝 밉보일 행동을 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이 천사 같은 미모로 충분히 넘길 만한 일이다. 아마 쌀쌀맞은 데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카일은 침묵을 지키는 척 얌전을 떠는 바네사를 가만히 눈에 담다 관두었다. 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누나와 단둘이 구금실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냈을 것만 생각해도 짜증이 난다.

그런데 한 올 한 올이 소중한 누나의 머리카락을, 누나가 내려다볼 때면 물결치듯 아름답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 몽실몽실해서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 소중한 머리카락을 뭉텅이로 잘라버리는 우를 범한 인간이다.

‘……죽일까.’

담백하게 생각한 카일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중에 누나가 행방을 물으면 곤란해질 것이다. 미움받기 싫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라고 했습니까?”

카일이 물었다. 바네사는 월척이 낚싯대의 미끼를 덥석 물었을 때와 비슷한 쾌감을 느끼며 온화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러합니다.”

“조사관. 특별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 미모를 보고 어떻게 그냥 지나가. 당장 꺼내주고 싶겠지. 바네사가 씩 웃을 때였다.

“바네사 메이브란테를 특히 철저히 조사해 주십시오.”

“……네?!”

바네사가 맹한 음성을 흘렸다. 카일은 팔짱을 낀 채로 건조한 얼굴을 했다.

“가식 떠는 거, 다 보입니다.”

“……제게 드는 마음이 고작 가식 떤다, 그것 하나입니까?”

카일은 바네사의 물음에 솔직하게 답해주기로 했다.

“재수 없기도 하고.”

너무 솔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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