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35화 (35/134)

#35

한동안 카일을 순진한 눈망울로 바라보던 바네사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곱씹곤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재수가…… 없다고요? 허, 참.”

“어떤 사고가 있었길래 내 약혼녀의 머리카락이 저만큼이나 잘려나간 것입니까.”

“그건…….”

바네사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아멜의 머리카락을 정조준해 껌을 뱉은 다음, 그것을 뗄 수 없어서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고.

……그것도 밀반입한 나이프로.

카일은 난처한 기색을 차마 숨기지 못하고 눈을 굴리는 바네사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이 이상 내 약혼녀에게 접근할 생각 마십시오.”

“…….”

카일은 냉랭한 눈을 하고 뒤돌아섰다. 바네사와 카일의 첫 만남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아멜이 알면 기함할 일이었다.

곧바로 구금실을 빠져나가려던 카일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구금실에서 이런 시선을 받을 일은 한 적이 없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카일은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름 모를 영애들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이들은 아멜에게 첫날밤 얘기를 들었던 영애들이었다.

‘황제가 미쳤군. 이렇게나 많은 영애들을 잡아들였다니. 하긴.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잃어버린 게 들통나면 황실은 끝이니.’

영애들은 아멜과 마찬가지로 죄가 없다는 소견을 받고 구금실을 빠져나가던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답답한 곳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카일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 다이앤 영애의 약혼자…….’

‘서로 첫눈에 반해서 사랑을 나누면 구금실까지 구하러 오는구나.’

‘아…… 로맨틱해!’

영애들은 머릿속으로 제각기 꽃밭을 그리고 있었다. 그 틈새로 아멜리아가 나타났다.

“서류 다 작성했어요, 카일.”

“마차는 저쪽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냉정한 얼굴 위로 형식적인 공손함만을 보이던 차이엘드 공작이다.

그런 그가 약혼녀를 발견하자마자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영애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서로 첫눈에 반한 사이는…….”

“멋지다…….”

카일이 그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 사이? 물론 자신은 아멜리아에게 첫눈에 반한 게 맞았다.

그녀가 심장에 쐐기처럼 깊게 새겨진 건 ‘그 말’을 해주었을 때였지만.

‘서로 첫눈에 반한 사이라면……’

서로. 카일은 그 기분 좋은 두 글자에 집중하며 아멜을 마차로 이끌었다. 슬쩍 보니 그녀는 이제 제법 편안하게 차이엘드의 마차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와줘서 고마워요, 카일.”

눈웃음을 지은 아멜은 잠시 후, 카일이 평소보다 들뜬 얼굴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왜 그래요?”

“누나, 영애들에게 무슨 말을 하신 겁니까.”

“…….”

아멜리아의 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레이나 영애에게 집중된 이목을 사로잡기 위해 첫날밤 이야기를, 그것도 날조해서 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해서, 아멜리아는 뭉뚱그려 대답하기로 했다.

“부끄러운 얘기인데, 들었어요?”

카일에게는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다. 녹갈색 눈동자를 슬쩍 굴리며 볼을 붉히는 누나라니.

“……처음 알았습니다. 제게 첫눈에 반하셨다는 거.”

“……?”

아멜은 화학성분 무첨가 화장품 CF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순수한 웃음을 짓는 카일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분명 오해가 있다. 오해가 있긴 한데……

‘우리 남주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오해인 게 중요한가? 이렇게 예쁘게 좋아하는데?’

평소였다면 재빨리 부정하거나 사족을 덧붙여 분위기를 흐렸을 아멜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카일을 감상했다.

***

며칠 후. 반 정도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이른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카일은 내가 이 시간에 일어난 것이 신기하다는 눈치다.

……평소에도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진 않았는데. 이 집 사람들은 너무 부지런하단 말이지. 부자가 괜히 부자가 아니야.

“누나. 어디 가십니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분실 사건 때문에 황궁에 조사받으러요. 오늘 꼭 오라네요?”

“제 일이 정오면 끝날 것 같은데. 같이 가는 건 어떻습니까?”

“음…… 잠깐 들를 곳도 있고 해서요. 카일이 저 때문에 일을 대충 끝내면 안 되잖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물론 카일은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일을 대충 끝내지 않을 것이다.

업무에 집중하는 눈을 보면 왜 그가 대부호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니까.

준비를 마친 나는 차이엘드의 아름다운 백마를 한껏 쓰다듬어준 다음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내게 모자를 들어 인사했다.

“누나 님. 황궁으로 갈까요?”

“그전에 잠깐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요. 수도의 중앙 시장으로 가주실래요?”

“누나 님도 참. 식료품 구입이라면 고용인에게 맡기셔도 됩니다.”

“그냥 시장이 보고 싶어서요. 혹시 알아요? 나중에 경영에 도움이 될지?”

“크으으…….”

마부가 가볍게 고삐를 휘둘렀다. 차이엘드의 사람들은 주인, 고용인 할 것 없이 항상 이랬다.

내가 이 집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이라는 떡밥을 흘리면 감동해 눈물을 머금었다.

나는 푹신한 등받이에 느른히 기대앉아 경치를 구경하다 가방 안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차이엘드의 마차는 흔들림이 무척 적은 편이니 퇴고하기 좋았다.

하일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그게 지금 내 직업이었다. 청탁받은 원고를 처음으로 마친지라 다시 읽고 고치는 일에 정성을 들여야 했다.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만큼 내 글이 ‘하일 타임스’의 명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내가 한차례 더 퇴고를 마쳤을 때 마부가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중앙 시장입니다.”

“고마워요. 금방 올 테니 잠시 쉬고 계세요.”

나는 원고를 가방에 넣은 채로 시장을 향해 달려갔다. 좁은 골목을 지나 골목 두 개를 넘어오니 바로 신문사 건물이 보였다.

이곳에 마차를 세워달라고 하면 편할 테지만 칼럼니스트 일을 한다고 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일단은 숨기는 실정이었다. 마부님은 내게 친절하지만 결국 차이엘드의 사람이니.

차이엘드의 약혼반지를 숨기기 위해 장갑을 낀 나는 머리를 올려 묶고 가방에서 착용자의 인상을 감춰주는 망토를 꺼내 두른 뒤 문을 열었다.

끼익-

하일 타임스의 1층 로비는 한가로웠던 걸로 기억한다. 사람이 없어 휑하다는 인상까지 주었지. 하지만 지금은 특종이라도 생긴 것처럼 모두가 분주했다.

초기 버전의 전화기가 끊임없이 울렸고, 전보도 속속들이 도착했다. 정식 기자들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로비 구석구석을 꼬리 밟힌 개처럼 쏘다녔다.

그 중심에 서 있던 프링글스 사장님은 머지않아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앤 스미스 양! 왔군! 기다리고 있었네. 자네 칼럼을 아주 기대하고 있어.”

맞다, 가명을 쓰고 있었지.

“칼럼 원고는 여기 있어요. 그런데 무슨 일 있나요?”

“일? 말도 말게. 방금 특종이 터졌어!”

프링글스 사장님의 콧수염이 들썩였다.

“황실의 보물인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얼마 전에 분실되었다고 하더군. 기사들을 동원해 숨기고 있던 게 파티에 참석했던 익명의 소녀에 의해 밝혀진 모양이야.”

쯧. 황제는 제 무덤을 판 셈이다. 평소 베푸는 연회처럼 입장객을 귀족으로 제한했더라면 귀한 보물을 분실한 사건을 어느 정도 은폐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여색에 눈이 멀어 평민 여자들까지 파티에 초대했으니 그 사실을 숨길 수 있을 리 없다.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라지.

그새 내 원고를 꼼꼼히 확인한 프링글스 사장님은 흐뭇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원고가 마음에 드시나 보다.

“앤, 대단해. 자네는 인재야. 고료는 어떻게 전달하면 되겠나?”

“감사합니다. 나중에 한 번에 수령할 테니 잠시간 맡아주시겠어요?”

“그러지.”

꾸벅 인사한 내가 다시 마차로 돌아가려 할 때, 빵모자를 쓴 청년이 후다닥 달려왔다.

“사장님, 아무리 광고를 붙여도 목걸이 사건에 대해 증언해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애석한 일일세. 이 건만 터트리면 우리 신문사는 주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텐데.”

입이 근질근질하긴 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이라면 내가 누구보다 실감 나게 증언할 수 있으니. 목걸이가 분실되던 순간을 똑똑히 보고 들은 게 나니까.

……지금 조사도 목걸이 사건 때문에 받으러 가는 거고.

하지만 괜한 오지랖으로 일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이 말을 듣기까지 말이다.

“광고지에 돈은 얼마든지 준다고 써 붙였나?”

“네. 말씀하신 대로, 회사의 사장님 지분을 모두 매각해서라도 거액의 보수를 지급한다고 써 붙였습니다.”

“…….”

내 머리가 자동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장님 지분이 대충 이 정도고, 카일의 서류에서 슬쩍 본 하일 타임스 사의 시장 가치가 그 정도니까…….

‘헉!’

이 돈이면 아버지가 보증 서서 진 빚의 절반 정도를 갚을 수 있었다!

‘완전 로또잖아! 일확천금!’

나는 청년 기자가 흘린 광고지 하나를 가방에 욱여넣었다.

***

하일 제국의 황제는 지금 몹시 난처한 상황이었다.

황실에 도둑이 드는 일이야 흔했다. 연회를 벌이면 항상 자잘한 잡기들이 사라졌고, 그것에 신경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황실에 돈이 없다지만 재떨이나 은촛대 같은 것은 다시 사면 그만이니.

‘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필 없어져도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없어졌다니.’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달랐다. 무려 황실에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사라졌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하필 불안불안하던 이때 없어질 건 또 뭐람.’

차이엘드 공작가가 황실의 돈줄이라면,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황실의 목숨줄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선대 황제가 동맹의 증표로 받은 귀한 보물이었다. 무려 아레테의 결정이 세팅되어 있으니 금전적인 가치야 말할 것도 없다.

‘백주가 이 일을 알았다간……’

백주라 불리는 켈트만 족의 수장은 호전적이었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렸기에 황제는 몸에 힘을 주었다. 켈트만. 그들은 하일 제국의 북쪽에 널리 분포해 사는 전투민족이다. 키가 제국민보다 한 뼘씩은 더 컸으며 골격 또한 남달랐다.

정복을 즐기는 탓에 무력으로의 위협을 일삼던 그들은 최근, 눈부신 상업화를 이루며 경제적으로도 저력을 과시했다. 안 그래도 하일 제국의 황실이 무너져간단 소리를 듣고 군침을 질질 흘리고 있을 것이다.

‘젠장. 이거 큰일 났군. 목걸이가 없어졌다는 소식이 백성들에게 퍼졌으니 켈트만이 쳐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켈트만이 하일 제국을 진작 무너뜨리지 않은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였다. 켈트만의 이전 수장과 선대 황제가 우정의 징표로 교환한 물건.

“이 물건이 있는 한 우리의 동맹은 깨지지 않는다.”

양국의 수장이 그렇게 말했으니 후손들은 지킬 수밖에 없다. 해서 켈트만의 백주는 하일 제국에 쳐들어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 목걸이가 사라졌다니.

‘내게 책임을 묻겠지……’

황제는 긴 시간 식음을 전폐하며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목걸이가 분실되었을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가장 현명했다.

물증인 목걸이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이미 암시장에 팔아치웠기 때문이라고 하면 될 일이 아닌가.

“흠…….”

황제는 수하를 시켜 얻어낸 명단을 살폈다. 목걸이 분실 사건 당시, 목걸이를 끼고 있던 그레첼 남작 영애와 붙어 있던 사람들이다.

“음?”

건조하게 움직이던 황제의 눈이 한 이름을 발견하곤 음침하게 휘었다. 아멜리아 다이앤. 어쩌다 이 영애가 또 엮여 들어왔는지는 모를 일. 하지만 지금만큼은 반가웠다.

황실에서 차이엘드의 영향력을 줄이고 보상금을 뜯어낼 기회.

차이엘드 공작이라면 약혼녀를 위해 억만금 정도는 거뜬히 쓸 터였다.

‘다이앤 영애가 범인으로 몰린다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차이엘드 공작이 대신 수사해줄 테지. 그렇지 않더라도 건방진 차이엘드의 약혼녀를 제거할 기회고.’

황제가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 차이엘드의 피앙세라고는 하나 고작 몰락한 가문의 여식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조사해 목걸이의 행방을 쫓는 건 불가능하리라.

“가고일 백작. 거기 있는가.”

황제는 아멜리아 다이앤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녀가 별수 없이 당할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그녀가 접촉한 상대의 마음을 읽는 아레테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 어리석은 황제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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