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황궁에 도착한 나는 거리낌 없이 구금실에 들어섰다. 차이엘드의 금화가 팍팍 들어간 덕에 제2의 집이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편안했다.
“다이앤 영애. 오랜만입니다.”
“아하하…….”
물론 구금실 사람들과 안면을 튼 것도 모자라 친분을 쌓아가고 있는 건 자랑할 일이 아니었지만. 자고로 인생은 인맥이라고 했다. 언젠간 도움을 주고받을 일이 있겠지.
“자, 그럼……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편안히 대답해주십시오. 아, 의자 높이는 괜찮으십니까? 커피 더 드릴까요?”
조사관님이 무척 살갑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곤 그의 조사에 성실히 임했다.
아까 하일 타임스에서 난리를 칠 때도 느낀 거지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황실에 무척 중요한가 보다. 내가 아는 건 그 목걸이가 여주, 바네사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라는 것뿐인데.
“조사관님.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하하하! 영애도 참, 농담에 재능이 있으시다니까. 황궁에 출입하는 귀족 중 그 목걸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
조사관님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집은 연대보증을 잘못 서서 황궁 출입을 못 했으니 내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거군.
“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모를 수도 있죠. 무지는 죄가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되었다. 아레테의 결정이 박혀 비싼 줄은 알고 있었지만 동맹의 의미가 있다는 건 모르던 사실이다.
‘가만. 켈트만과의 동맹이 걸린 문제라고?’
켈트만은 북방의 전투민족인데, 후에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거대한 자본을 움직여 일으킬 파멸 전쟁에 큰 공헌을 했다.
자고로 전쟁처럼 세상이 흉흉할 때 도움이 되는 건 돈이나 인맥이 아니다. 바로 개인이 가진 물리적 힘이지.
켈트만 족은 무기가 없어도 강하다. 그런데 영리한 파멸 남주는 그들에게 무기와 독을 제공했다. 자신을 고작 돈 취급했던 모두를 쓸어버리라고.
그리하여 파멸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이젠 카일 서사에 더 이입되네.’
아무튼. 하일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켈트만의 수장 지디마와 그 자식들은 이때다 하고 쳐들어와 제국을 가루로 만들었다.
제국의 중심인물들을 처리한 건 아레티스트의 보스, 바네사였지만 그 아래를 쓸어버린 건 지디마와 자식들, 특히 딸인 리엔 공주였다.
‘으으…… 미치겠네. 파멸 하나 지나니 또 파멸이야.’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격으로 바네사가 아레티스트의 보스가 되는 것을 막긴 했다.
그녀 대신 아레티스트의 보스가 될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바네사가 카일에게 파멸을 선물하는 엔딩은 막았다.
‘그런데 이제는 켈트만이라니.’
남은 조사 시간을 버티는 게 고역이었다. 표정이 풀어지지 않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조사관님은 내게 많은 것을 물었다.
띠링-
기계식 타이머가 울렸다. 어느덧 내게 할당된 조사 시간이 끝났다는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반투명한 유리창 너머에 바네사와 레이나 영애, 그레첼 영애가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서대로 조사받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큰 의미는 없겠지만.”
“무슨 뜻인가요?”
“황제 폐하께서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와 관련 있는 자들을 엄중히 처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들 중 진짜 범인은 사형을 언도받겠지요.”
조사관님이 슬쩍 흘린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 가장 많은 의심을 산 것은 목걸이를 하고 있던 그레첼 남작 영애란다.
“목걸이를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겠지요.”
그들도 알고 있긴 한가 보다. 새파랗게 어린 영애가 황제의 승은을 받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지. 아직도 몸을 바들바들 떨던 그레첼 영애의 모습이 떠오른다.
“조사를 조금 더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툭 내뱉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목걸이가 없어진 직후 나는 그레첼 영애와 살갗을 스쳤다.
자연스레 그녀의 마음이 들렸는데, 영애는 족쇄나 다름없는 목걸이가 사라졌는데도 누구보다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범인일 확률은 희박했다.
“흠. 그럼 다이앤 영애가 생각하시기엔 누가 범인인 것 같습니까?”
“글쎄요…….”
난감한 질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목걸이는 바네사가 훔쳤을 것이다. 아레티스트들을 다섯 명이나 데려왔으니 작정한 거겠지. 속마음을 읽었을 때도 바네사는 목걸이를 훔칠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니야. 바네사는 목걸이를 훔치지 못했다고 불평했어.’
원래 바네사가 훔치려 일으킨 소란을 틈타 또 다른 누군가가 목걸이를 훔쳤다. 그러니 바네사는 진짜 범인이 아니다.
‘레이나 영애도 아닐 텐데.’
레이나 영애야말로 진작 구금실을 벗어났어야 했다. 조사관님께 밉상 짓을 해 구금이 연장되었다는 말은 어딘가 설득력이 있지만.
레이나 영애는 얼굴도 못 들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다. 내가 아레티스트들과 싸울 땐 아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머리를 파묻었다.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게 다행스러울 지경.
레이나 영애나 그레첼 영애, 바네사가 범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니 걸리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목걸이의 그 특성을 이용하면 수사가 빠를 텐데……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특성인가?’
선심 쓰듯 귀한 정보를 제공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니 섣불리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나는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목걸이를 훔친 게 대체 누구일까요?”
말을 막 마쳤을 때였다. 조사실 문이 끼익 열리더니 점잔을 뺀 남자가 들어왔다. 차림새를 봐서는 귀족. 그것도 꽤 고위직을 맡고 있는 귀족인 듯했다.
“가고일 백작님!”
“조사관. 자네 생각에는 누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가?”
백 년 묵은 두꺼비 같은 미소였다. 나는 그를 알았다. 가고일 백작. 망나니 호색한 황제의 최측근. 책 속에도 짧게 언급되는 인물이었다.
“어허, 이 사람아. 얼른 대답해. 누가 용의자라고 생각하나?”
조사관님은 내 약지에 있는 차이엘드의 약혼반지와 가고일 백작의 얼굴을 난감한 듯 번갈아 바라봤다.
“그것이……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조사관님이 고개를 숙였다. 백작은 가지런히 손질한 수염을 쓰다듬다 나를 힐끗 봤다.
……날 왜 보는 거지? 불안하게.
“다이앤 영애. 하나 묻겠습니다. 영애의 집안은 페르슈 다이앤 백작의 연대보증으로 거액의 빚을 떠안게 되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가 하사하신 영지도 모두 저당 잡혔고요. 치장과 마차 유지에 필요한 돈이 없어 황실 출입도 번번이 거절당하는 실정입니다.”
“…….”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가고일 백작은 조사관에게 말을 붙였다.
“어떤가. 고가의 물건이 눈앞에, 그것도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다면 탐내기 딱 좋은 상황에 처해 계신 것 같은데.”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성역 없는 공정한 수사를 하자는 겁니다.”
“…….”
“조사관. 황제 폐하께서는 다이앤 백작 영애를 집중적으로 수사하시길 원하시네.”
가고일 백작이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주어 말했다. 조사관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공정한 수사라면서 집중적으로 날 조사하라는 말은 대체 무슨 어폐인지.
“가고일 백작님. 저는 목걸이를 훔친 적이 없습니다.”
“영애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어떤 도둑도 제 손으로 물건을 훔쳤다고 떠벌리지 않습니다. 물증이 나오기 전에는 말이지요.”
파산한 집안의 딸이라는 이유로 용의자 취급을 받는 것도 모자라 이젠 도둑이란다. 나는 인내의 한계를 느꼈다. 입술을 맞무는 날 보더니 가고일 백작이 말했다.
“영애. 억울하십니까? 우셔도 됩니다. 모두에게는 비밀로 할 테니.”
“…….”
“억울하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영애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훔친 게 누구인지 직접 밝혀내십시오.”
자기가 말하고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가고일 백작은 품위라곤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영애에게는 차이엘드라는 막강한 뒷배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보니 영애가 어떻게 차이엘드 공작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겠습니다.”
가고일 백작의 시선이 내 얼굴과 가슴을 끈덕지게 훑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애당초 가고일 백작은 황제의 명을 받고 나를 용의자로 지목하러 온 것일 터.
동시에 확신이 들었다. 현 황제와 그의 측근은 썩었다. 카일을 돈줄로 아는 베르드는 현 황제와 가고일 백작에게 비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다이앤 영애. 목걸이가 사라졌을 당시 가장 가까이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없었더라면 그레첼 영애와 레이나 영애가 위험에 처했을 겁니다.”
최대한 지우려 애썼으나 가고일 백작은 내 눈에 서린 분노를 알아챈 듯했다. 그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올라갔다.
“영애께서 국가 간의 정세를 잘 모르시는 듯하여 하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주 큰 외교적 위기가 닥쳤음을 의미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그 이유가 황제의 연이은 방탕한 생활 때문이라는 것도. 애당초 선대 황제끼리 맺은 화친이 흐지부지된 건 켈트만의 야욕 때문도 있겠지만 황가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애는 하일 제국 귀족의 여식입니다. 차이엘드 공작가도 하일 제국의 아래에 있지요. 하일 제국의 귀족들이 귀족 대접을 받는 건 제국이 살아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
“그러니, 요상한 방법으로 황가를 몰락시키겠다는 허튼 생각은 하지 마시길.”
가고일의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가방 안에 든 광고지를 떠올렸다. 하일 타임스에 원고를 주러 잠깐 들렀을 때 가방에 욱여넣은,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
하일 타임스뿐만이 아니다. 제국의 온 언론이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이 어찌하여 일어난 사달인지 알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욕구 아래 깔린 생각은 단 하나.
‘여자 밝히는 황제가 뭘 어떻게 했길래 나라의 보물을 분실해 켈트만 족의 위협을 받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 하겠지.’
가고일 백작이, 황가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백성들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지만 책 밖의 세계에서 온 나는 안다.
본래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들이 분노하는 게 가장 무섭다는 것을. 잃을 게 없는 자들이 뭉치면 세상을 바꾼다.
가고일 백작은 켕기는 것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조사실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영애, 허튼짓하지 마십시오. 결백을 증명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실 겁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아무래도 이 백작님은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의 생각과 달리 내게는 있었다. 진짜 범인을 잡아낼 아레테라는 힘도, 썩어 빠진 황제를 갈아치울 묘책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