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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37화 (37/134)

#37

가고일 백작은 성공적인 협박에 만족하며 구금실을 나섰다.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케이지 안의 동물을 보는 듯해 기분이 언짢았다.

저런 남자가 황제의 최측근이라니. 이 황가는 하일 제국의 재앙이다. 절대 저 사람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

“다이앤 영애. 괜찮으십니까? 나 원 참…… 가고일 백작은 뭐 저리 불쑥 찾아와서는.”

조사관은 가고일 백작이 사라진 자리를 향해 침까지 뱉어 가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런 사람이 자신보다 윗사람이라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게요. 갑자기 오셔서 저리 말씀하시니 무섭네요.”

나는 적당히 공감하는 척 운을 뗀 다음 본론을 꺼냈다.

“조사관님, 그래서 말인데요. 부탁을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공작 전하를 불러주시겠어요? 오늘은 오전이면 업무가 끝날 거라고 하셨거든요. 가고일 백작께서 으름을 놓아 혼자 돌아가기 무서워서…….”

나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조사관님은 높은 벼슬이라도 받은 듯 얼굴을 환히 밝혔다. 카일이 나를 보호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경 써 주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리라.

“다이앤 영애, 편히 앉아 계십시오! 금방 전하고 오겠습니다!”

조사관에서 큐피드로 전직했다는 사명감을 품은 것일까. 조사관님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릿하게 움직여주었다. 나는 그가 완전히 퇴장한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오자 바네사와 레이나 영애, 그레첼 영애가 손이 묶인 채로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도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가고일 백작의 협박을 들은 듯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이앤 영애, 괜찮으세요?”

그레첼 영애가 내게 물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사라져 가장 곤란한 것이 본인일 텐데 내 안위를 먼저 살펴 주다니. 목걸이를 마지막에 가지고 있던 게 이 친절한 영애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목걸이를 찾을 건데 그레첼 영애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곤란하니까.

“전 괜찮아요. 그나저나 가고일 백작님이 하신 말은 다들 들으셨나요?”

내가 묻자 세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일 백작은 내게 목걸이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우겠다는 말을 아주 점잖게 하고 갔다. 그 말을 들은 영애들의 얼굴을 하얗게 질리는 것도 당연하다.

차이엘드의 보호를 받는 나를 협박할 정도이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자기들의 신세야 뻔하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가고일 백작은 황제의 명을 받은 게 분명하므로 그 판단은 사실이었다.

황제와 백작이 원하는 것은 뻔했다. 내게 죄를 뒤집어씌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분실이라는 위험한 상황을 차이엘드에 툭 넘기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그렇게 하면 켈트만도, 백성들의 분노도 차이엘드가 막아줄 테니 참으로 경제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는 가고일 백작과 황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지만.’

오히려 이건 여색에 미쳐 온갖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황제를 갈아치울 좋은 기회였다.

아무리 내가 책에 빙의한 사람이라 황제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더러운 행위들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니. 나는 이 기회에 황제도 손보고 싶었다.

“가고일 백작은 아무래도 목걸이가 없어진 순간 그레첼 영애와 같이 있었던 우리들을 의심하는 것 같았어요.”

내가 우울한 어조로 말하자 레이나 영애가 깜짝 놀랐다.

“잠깐만요. 괴한의 습격을 받고 목걸이가 사라지던 순간이라면 저도 같이 있었잖아요.”

“레이나 영애도 의심받겠죠.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켈트만과의 외교적인 문제까지 겹쳐 누군가는 목걸이 분실 사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니까.”

“……!”

레이나 영애가 움찔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슬쩍 내 손을 스쳤다. 깊은 초조함이 서린 속마음이 들려왔다.

「어떡해. 우리 가문은 내가 무죄라는 걸 증명할 힘이 없는데……. 하르모니아의 목걸인지 뭔지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중요하다는 말은 여러 번 듣긴 했지만…….」

지금,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나는 인간 거짓말탐지기인 셈. 짐작하고 있었지만 레이나 영애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가 걱정하는 건 다른 쪽이었다.

「내가 잡혀가면 내 동생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언니가 황실 보물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면 혼삿길도 막힐 텐데…….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겠지?」

레이나 영애는 내게 그렇게 대들었음에도 결국 가족을 걱정하는 백작가의 맏딸이었다. 속으로 가족과 가문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녀의 눈에는 절박감이 가득했다.

“레이나 영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날 같이 있었던 우리가 서로를 믿는 게 먼저일 것 같아요.”

“그럼요. 그래야죠. 저는 그레첼 영애와 다이앤 영애를 믿어요.”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다루기가 쉬운 법. 레이나 영애는 겉으로도, 속으로도 내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었다.

이로써 황제와 가고일 백작이라는 거대한 적에게 맞서기 위한 우군을 둘 만들었다. 물론 싸움이라곤 영애들끼리 머리채를 줴뜯는 것밖에 모를 둘을 대신해 물밑으로 싸우는 건 내 몫이겠지만.

“뜻이 통해 다행이에요.”

나는 대화의 끝이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레이나 영애도, 그레첼 영애도 비슷한 안도감을 내비쳤다. 웃지 못하는 것은 벤치의 끄트머리에 앉은 바네사뿐이었다.

“저기, 다이앤 영애님…….”

“네?”

부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투로 대답하자 바네사의 얼굴에 수심이 서렸다. 이런 격한 반응을 보여주시니 바네사에게는 나라는 패가 정말 아쉬운 게 틀림없다. 원래 아쉬운 사람이 먼저 잡는 게 세상의 이치니까.

바네사는 천사 같은 얼굴로 울먹였다.

“저, 저는요? 저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생겼는데……. 저는 영애님들과 달리 평민이라…… 흐윽, 제가 잡혀 들어가면 제 동생들은 굶어 죽을 거예요…….”

“어머나 딱해라…… 바네사, 잠깐 저랑 얘기 좀 할까요?”

동생이 굶어 죽긴 무슨. 부모님을 일찍 여읜 외동딸인 거 다 아는데.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바네사를 취조실 안으로 데려왔다.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면 바깥에 있는 레이나 영애나 그레첼 영애에게는 들리지 않으리라.

둘 뿐인 공간임에도 바네사는 나를 향한 간절한 눈빛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원작 여주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 것일까. 역시 인성은 물질적 여유에서 나온다는 말이 맞았다.

“바네사. 할 말이 있어요.”

“뭐든 말씀하세요! 저는 다이앤 영애를 도울 생각뿐이랍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훔치지 못해 아레티스트의 보스가 되지 못한 지금, 바네사는 정말 내게 붙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내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는 아레테 없이도 아레티스트라는 용병 집단에서 살아남았을 만큼 무예에 출중했다. 게다가 아레테는 세계관 최강.

몇 가지만 확인한다면 내가 앞으로 벌일 계획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경호로 쓰기 딱 좋았다.

“바네사. 혹시 ‘아레테’에 대해 잘 알아요?”

“……!”

눈동자가 동요한다. 당연한 일이지. 바네사는 누구보다도 아레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니. 되려 내게 그 이능력에 대해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떨렸다.

“제가 아레테 보유자거든요.”

“어쩐지, 미모가 범상치 않으신 것이…… 어딘가 비범한 분이시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바네사는 열심히 세 치 혀를 놀려 나를 녹였다. 그 모습이 심히 아름답지만 넘어갈 수는 없는 일.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바네사에게 툭 내뱉었다.

“저는 닿는 상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뭐, 뭐라고요?”

“공작 전하께서 선물해주신 약혼반지에 아레테의 결정이 박혀 있거든요.”

“……!”

“처음에는 신체 부위가 직접 닿은 사람의 마음만 읽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레테에 제법 익숙해진 건지 물건이나 무기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더라고요.”

바네사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이런 아레테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곤 예상치 못한 눈치.

나는 보란 듯 눈썹을 으쓱이며 바네사의 손등에 내 손등을 댔다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꼬집듯 잡았다.

「공작이 이 여자한테 진짜 미치긴 했나 봐. 그 비싼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약혼반지를 주다니.」

「하긴. 그 귀한 보석들을 독점 판매했던 게 차이엘드지만……」

「아무튼, 이 여자가 있는 한 공작을 꼬시는 건 절대 불가능해.」

“그럼요. 제가 있는 한 카일을 꼬시는 건 불가능해요.”

내가 읽어낸 속마음에 대한 답을 입 밖으로 내자 바네사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자고로 속마음이란 인간이 이성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순간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는 법.

「썅…… 게다가, 뭐? 마음을 읽어? 정신계 아레테 보유자에 대해서는 마라바스에게도 들은 적이 없는데. 이 여자는 대체 뭐지?」

“정신계 아레테가 귀해요? 처음 알았네.”

“으……!”

바네사는 제 속마음을 속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미 당황한지라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넘쳐 흘렀다.

「안 돼. 그럼 이 여자는 내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훔치려다 실패한 것도 알 거 아냐.」

“당연히 알죠. 훔치다 실패한 거. 그래서 바네사를 따로 보자고 한 거예요. 아, 내 계획에 동의하지 않으면 당신이 목걸이를 훔치려 연회에 참석했다는 증거쯤은 확보할 수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바네사는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다 꼬리를 내렸다. 그녀가 속으로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젠장. 무조건 이 여자한테 붙는다. 그래야 살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 바네사는 이 마음도 내가 읽었을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나는 모르는 척 은밀한 목소리를 냈다.

“바네사. 제가 위험한 일을 하나 벌일 계획이라 경호원이 필요하거든요. 미리 말하지만 제가 쓸 수 있는 돈이 한정되어 있어서 월급은 많이 못 줄 거예요.”

“영애. 우리 사이에 돈이 문제인가요? 영애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저는 무급으로도 일할 수 있답니다.”

바네사가 즉각 답했다. 우리 사이는 무슨 놈의 우리 사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용건만 빨리 끝내기로 했다. 슬슬 카일이 도착할 시간이고, 그 전에 바네사와 합의를 봐야 할 테니.

“바네사. 내 경호원이 되면 내가 하는 일들은 모두…….”

“함구하겠습니다!”

“…….”

원작 여주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던가. 역시 돈이 없으면 사람은 비굴해진다. 바네사는 말로도, 속으로도 내 경호원이 되기만을 원하고 있었다. 어떤 심경인지는 알 만하다. 나도 그걸 노린 거니까.

“다이앤 영애. 저 같은 경호원은 찾기 힘드실 거예요. 여자이면서 46대 1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만한 인재가 어디 흔한가요?”

“46대 1이요? 46명 중 하나는 아니었죠?”

“섭섭한 소리. 당연히 저 혼자 46명을 상대한다는 거죠. 아, 앞으로 주인님이라고 부를까요?”

“음……. 호칭은 지금처럼 하는 게 좋겠어요. 바네사. 나는 당신을 차이엘드 공작저로 데려갈 거예요. 물론 카일이 허락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카일이 내 부탁을 들어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 차이엘드의 마차가 급히 들어왔다는 기별이 들려왔으니까.

“카일에게는 우리가 예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말해둘게요.”

“저도 공작저에 들어가는 건가요?”

“그럼요. 당분간은.”

황제의 치졸한 성격을 생각했을 때, 황실에서는 나를 감시하려 사람을 보낼 게 분명했다. 차이엘드의 경비가 아무리 삼엄하다고 해도 고도로 훈련받은 황실의 요원들이라면 감시 정도는 쉬울 테니.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을 종결짓고 하일 타임스에 특종 기삿거리를 물어다줄 동안, 내 안전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무려 세계를 파멸로 몰아갔던 바네사라면 내 신변을 보호하기에는 충분했다.

“할 수 있겠어요?”

나는 다급히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물었다. 바네사는 내 머리에 껌을 뱉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성심을 보이며 말했다.

“다이앤 영애의 명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완수하겠어요.”

원작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감동이 와장창 깨지면서 내 체스말을 얻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망나니 황제에게 치명상을 입힐 준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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