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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38화 (38/134)

#38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가슴을 다스리려 마차의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누나가 나를 보고 싶다고 부르다니.’

침착하게 파악해본바, 가슴이 뛰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먼저, 가고일 백작이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던 아멜에게 으름을 놓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가고일 백작이라면 황제의 수족이나 다름없다. 그가 아멜에게 직접 가 으름을 놓았다면 분명 반협박이었으리라.

‘마음에 안 들어. 조만간 따로 만나야겠어.’

가슴이 뛰는 이유, 그 두 번째는 아멜이 먼저 연락해 보고 싶으니 와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카일은 퐁퐁 샘솟는 기쁨을 티 내지 않으려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의 충실한 집사 하일드가 주인의 심경을 대변해 수선을 떨었다.

“공작 전하. 이것은 예사가 아닙니다. 무려! 누나 님께서 직접! 공작 전하가 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하일드.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약혼한 사이니까.”

사랑에 푹 빠진 주인의 목소리를 들은 마부는 말을 더욱 힘차게 몰았다. 차이엘드의 백마는 유니콘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나 님도 참…… 얼마나 보고 싶으셨기에.”

“하일드.”

카일이 자못 엄한 목소리를 냈다. 집사장은 그제야 자신의 주접이 과했나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카일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하일드. 황궁에서 다이앤 백작저와 차이엘드 공작저 중 어느 곳이 더 가깝습니까?”

“그야…….”

두 저택은 비교할 만한 거리에 놓여 있지도 않았다. 총기사단장직을 지냈던 다이앤 백작의 거처는 황궁에 출퇴근하기 쉽도록 황궁과 가까웠다.

반면 공작저는 공국을 다스리는 것이 주요 기능이기 때문에 다이앤 백작저보다 황궁에서 훨씬 멀었다.

차이엘드에서 가장 빠른 말을 타고 간다고 해도 그 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다이앤 백작저가 차이엘드 공작저보다 황궁에서 세 배쯤 더 가깝습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카일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황궁을 바라보며 입술을 맞물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리 내서 웃을 것만 같았다.

아멜리아는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버지를 부르는 대신 자신을 불렀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드디어 진짜 약혼자라고 생각해주시는 건가.’

좋은 조짐이었다. 약혼자가 남편이 되는 건 순식간이라고 카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래 사랑이란 힘들 때 의지하면서 커져 가는 것이 아니던가.

처음 그녀를 봤을 때처럼.

카일은 아멜과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밝혀 버리고 결혼 준비를 서두르겠다고 다짐했다.

말들이 지칠 줄도 모르고 내달린 덕에 카일은 예상 소요 시간보다 훨씬 빨리 황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이 또 있었다.

“카일!”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멜이 손을 붕붕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카일은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새 많이 여위신 것 같습니다. 조사가 힘들었습니까?”

“음…… 점심을 안 먹어서 그런가? 이따 같이 먹어요. 카일도 아직이죠? 우리 공작 전하께선 늘 1시에 점심 식사를 하시니까.”

카일이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아멜은 평소보다 백 배쯤 사랑스러웠다. 언제부터 자신이 1시에 식사를 한다는 사실을 외워두고 있었는지 묻고 싶지만 주책인 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누나, 드시고 싶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카일이랑 같이 먹는 거면 아무거나 좋아요. 공작저에 가서 둘이 오붓하게 식사하는 것도 좋고, 밖에서 먹고 가는 것도 좋아요.”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심장은 그야말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누나가 방긋방긋 웃으며 말해주는 걸 듣고 있자니 오늘이 생일이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상태라면 간을 빼달라고 해도 냉큼 빼다 주리라.

카일이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멜은 그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원래 욕먹을 행동을 하기 전에는 밑밥을 잘 깔아놔야 하는 법.

“카일. 얼굴이 빨간데.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고 대답하면 낫게 해주실 겁니까?”

아멜은 접촉을 통해 들려오는 시커먼 ‘낫게 하는 방법’들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우리 남주 혈기왕성한 건 알아줘야지. 이젠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짧게 입 맞추는 것으로 그를 달랜 아멜은 자신의 행동이 그를 더 끓게 했다는 것을 모르는 채 말을 이었다.

“카일. 진지하게 할 말이 있는데……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어요.”

“……!”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머릿속에서 축포가 터지고 꽃이 흩날렸다. 약혼한 남녀 사이에 진지한 대화라면 오직 하나, 결혼뿐이었다. 카일은 눈짓으로 고용인들을 물리고 아멜과 단둘이 마차에 탔다.

아멜은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비좁은 실내에서 저런 얼굴을 하면 섹시하다는 걸 처음 안 카일은 나쁜 생각들을 훌훌 털어버리려 대화 주제를 가늠했다.

‘혼수? 결혼식? 자녀계획부터? 아니면…… 신혼여행?’

어느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차이엘드 공작이 머릿속의 꽃밭에서 홀로 퍼레이드를 벌이는 동안 아멜은 마음을 다잡았다. 바네사를 경호원으로 쓰고 싶다고 말하면 카일이 무슨 반응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카일이 바네사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아직 없을 테니……. 그리 반응이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카일과 바네사가 서로를 경멸하게 된 첫만남을 가졌다곤 생각지도 못하는 그녀였다.

“카일. 할 말이 있는데요,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제가 과민반응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경호원을 하나 붙이고 싶어요.”

“좋습니다. 안 그래도 가고일 백작이 으름을 놓았다고 해 불안했는데. 공작 부인이 될 여성을 노리는 자들이 없진 않을 겁니다. 하일드에게 유능한 여성 중 골라두라고 말해두겠습니다.”

카일은 화산처럼 터지는 기쁨을 억누르는 중이었다. 아멜리아 다이앤이 드디어 자신이 미래의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 분명하다. 경호원을 필요로 하다니!

‘시계 방향으로 한 명씩 열두 명을 붙이는 게 좋겠군.’

오늘도 그간 번 돈을 알차게 쓸 생각에 미소 지은 카일은 잠시 후 황망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카일. 제가 경호원으로 두고 싶은 여자분이 하나 있는데, 꼭 이분이 제 경호를 맡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아는 사람입니까?”

아멜은 대답 대신 커튼을 젖히고 구금실을 가리켰다. 철창 안에 있는 바네사가 아멜을 발견하곤 해맑게 팔을 흔들어 보였다. 카일은 그 뻔뻔함에 즉각 인상을 찌푸렸지만.

“바네사 메이브란테. 누나의 머리카락을 자른 저 파렴치한 여성을 경호원으로 삼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바네사가 정신머리가 자유롭긴 해도 실력은 최고예요. 저랑 잘 맞기도 하고.”

“…….”

카일의 얼굴이 삽시간에 뚱해졌다. 껌이나 짝짝 씹으며 밀반입한 나이프로 남의 머리카락이나 자르는 망나니 같은 여자를 경호원으로 삼고 싶다니.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아멜은 잠시 머뭇거리다 가고일 백작이 자신에게 쏟아놓고 간 말들을 카일에게 전했다. 수려한 눈썹 사이에 주름이 지고 눈매가 사나워졌다.

차이엘드라는 뒷배를 이용해 결백을 증명하라는 말이 나올 즈음, 카일은 무표정으로 냉랭함만 발산했다.

“가고일 백작과 황제 폐하는 제가 목걸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를 원하고 있어요. 켈트만과의 외교 문제가 엮였기 때문에 황실에서 직접 움직였다가 허탕을 치면 위험이 크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카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멜의 분석은 정확했고 자신도 그 의견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왜. 왜 아멜리아 다이앤이 직접 움직이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카일에게는 켈트만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할 여러 수단들이 있었다. 하지만 켈트만은 황제와 달랐다. 귀족들의 신임과 백성들의 지지를 잃은 하일 제국의 황제는 이 빠진 늙은 개나 다름없다.

그러나 켈트만의 수장 지디마는 호전적인 자였다. 상업화와 도시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빨을 감추고 있지만 다혈질인 그가 언제 마음을 바꿀지는 모르는 일.

“왜 그 일을 누나가 직접 하려는 겁니까. 부릴 사람이라면 차이엘드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멜은 예상한 질문이 들려오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그 말을 카일에게 전할 타이밍이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에 대한 진상을 밝힐 수 있는 힘이 제게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움직이지 않으면 죄 없는 영애들이 화를 입을지도 몰라요.”

아멜은 아랫도리를 방탕하게 놀린 황제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싶다는 본래 의도를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다간 하일 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줄줄 읊어야 하리라.

카일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아멜이 무예, 특히 칼싸움에 상당한 재능이 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칼싸움으로 절도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는 없다.

‘섣불리 막으면 반감을 사겠지.’

일이 원만히 해결될 때까지 얌전히 공작저에 머물러 달라는 부탁을 하면 아멜리아는 창문이나 배수관을 통해서라도 빠져나갈 게 분명했다.

애초에 그런 감금이나 다름없는 부탁을 약혼녀에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업무를 처리할 때처럼 이성적으로 사고한 카일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분실 사건을 해결해 누명을 벗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된 영애를 구하고 싶다는 것 맞습니까?”

“정리하자면 그렇죠.”

“제가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자면 그 일을 누나 혼자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른 영애들보다 월등한 싸움 실력을 갖췄다고 해도 그 힘으로는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카일 말이 맞아요. 칼싸움 좀 한다고 해서 도난 사건이 해결되면 세상에 못 찾는 물건은 없겠죠.”

“그럼 왜…….”

아멜은 카일에게 바짝 다가갔다. 구두코가 닿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이젠 정말 말할 때였다.

“카일. 숨기려던 건 아닌데 이제야 말하게 되어서 미안해요. 사실 카일이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약혼반지를 줬을 때 제게 아레테가 부여되었어요.”

“…….”

그는 적잖이 놀랐다는 것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형제들이 서로를 찌르고 찢어발기는 상황에서 겨우 빠져나왔을 때 자신에게 부여된 아레테가 ‘방어’였듯, 아레테는 아주, 아주 절실한 욕망이 있는 자에게만 발현되는 힘이었다.

과연 아멜리아의 아레테는 어떤 기능을 할까.

“어떤 능력입니까.”

“닿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처음에는 살갗이 닿아야만 읽을 수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옷깃이 스치는 것으로도 속마음이 들리더라고요.”

확실히 목걸이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아레테였다. 카일은 아멜에게 어떤 간절함이 있었기에 상대의 마음을 읽는 힘이 부여되었을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레테는 약혼반지에 박혀 있던 아레테의 결정 때문에 부여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가 누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아닌지가 그렇게 궁금하셨던 겁니까?”

카일은 나누던 이야기도 잊고 얼굴을 환히 밝혔다. 역시 이유는 이것뿐이었다. 그 당시 아멜이 속마음을 가장 궁금했을 대상이 누구였겠는가!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항상 진심이었습니다. 진심이 아닌 상대를 안고 싶어 할 만큼 형편없는 남자는 아닙…… 잠깐.”

정오의 태양처럼 화사했던 카일의 낯빛이 갑자기 우중충해졌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속마음을 읽는다면 그간 자신이 했던 불순한 생각들도 모두 읽은 것일까? 나쁜 생각을 하루 이틀 한 게 아니라 특정 날짜를 꼽을 수조차 없었다.

손만 잡고 자겠다고 말해놓고 그렇고 그런 생각을 숨 쉬듯 했다. 아멜리아가 허락의 여지를 내주길 바라며 굶주린 늑대처럼 입술을 혀로 축이던 밤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 언행 불일치 퍼레이드를 누나가 모두 보았다고 생각하니 카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멜은 쐐기를 박듯 사과했다.

“미안해요, 카일. 좀…… 귀엽긴 했어요.”

“……!”

카일이 순결의 위협을 받는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양팔을 교차해 몸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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